함께 하느라, 아빤 교육사업을 하게 되었구나, 고마워
2018년 9월, 아들이 태어났다. 네번째 아이를 얻은 최초의 가정이라고 작은 교회에서는 여러가지 말이 나왔다. 늦둥이 너무 봐주다가 잘 못된 케이스를 친절하게 생각해주시면서 말씀하신 어떤 분, 솔직히 외계인처럼 보이는 듯; 딸 3명을 키우면서 "작은 아씨들" 이야기처럼 하루 하루가 드라마같았던 우리 가족에게 특별했다.
아들은. 맞벌이 부부에게 4명의 자녀를 잘 키울 수 있었던 것은, 장모님의 섬김과 인내가 있어서 가능했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부터, 해외진출, 유학, 선교 spirit이 강한 작은 교회에서 인격적인 예수, 성경의 진리를 따라 마음은 벌써 한국을 떠나 있었기에, 케냐, 말라위에서 1년 힘들게 꼬인 일들을 뒤로하고 한국에서 IMF사태를 보았다. 학부시절 지도교수님을 찾아갔을 때 들은 말씀, "이런 분위기에 왜 귀국을 했나?"
//그런 사태를 아무도 예측할 수 없지만 그렇게 답답하신 듯
대형 출판 시스템을 다루는 해외 기업에서 영업력이 좋았다는 교회 선배를 통해 Mircosoft Certified System Engineer (MCSE)를 배워둘 것을 권유받아, 시작한 Server, Workstation, Networking ...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컴퓨터와 거리가 멀었던 비전공자에겐 다시 고등학교로 돌아간 듯 했다.
//실습을 하면서 NT4.0 Server를 100번은 넘게 설치했었다. 에어컨 냉방시설도 좋지 않은 컴퓨터실에서 쉽게 지쳤었다.
대학 친구들은 대기업에서 한참 열일하던 때, 검색엔진 회사, 인터넷 보안회사에서 비주류 (사업기획) 일을 하게 된 것 같아서 위축된 느낌, 처음 한국에서의 사회생활 뒤늦게 한 여러가지 불편함, 그래도 늘 다시 해외진출을 준비하면서 잘 견디었다. 작은교회에서 알게된 동기 친구들은 미국, 캐나다, 러시아, 인도네시아로 가서 착실히 하고 박사 코스를 밟고 있었는데, 제일 먼저 선교지로 향했었던 나보단 좀 다른 길을 가는가 보다 식이었다.
사회생활은 전혀 딴 세상이었다. 교회 친구들만 많았었던 내게 이분법적인 세계관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술 문화, 밤 문화는 너무 싫었다.
//이러한 직장경험 속에서 컴퓨터과학, 법학, 통계학 학사편입하여 공부를 하게 되었다. 경력관리를 위해서는 모멘텀을 새롭게 할만한 전공의 기초가 필요해서 더 늦기 전에 선택했다. (다소 관한 면도 있지만)
법학은 의외로 현실 세계에 대한 다양한 사실관계를 해석하는 흥미를 갖게 하였고,
통계학은 빅데이터 분석 시대에 매칭되는 데이터 감각을 키우는 의미있는 훈련을 할 수 있었다. 절대적인 시간부족으로 컴퓨터과학 이학사 학위를 얻을 수 있는 방통대 수업은, 모교 고려대학교 수학과 박사과정이 조교로 임용되어 이산수학을 가르쳐주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렇게 고군부투하면서 3명의 딸을 키우다가, 아들을 보면서
9회말 만루 홈런을 때리고 역전을 한 그런 기분이었다.
쌍동이들은 초등학교 6학년 때, 본격적으로 영어 원서 읽기를 했다.
매일 아빠는 같은 내용을 2명에게 반복하면서
영어 읽기를 통한 영어에 익숙해지기,
영어 텍스트 정보, 사운드 정보를 읽고 들으면서 즉시 이해하기,
원어민이 사용하는 맥락에 어울리는 표현을 활용하기
등을 염두하였고, 메모활용 경험을 전수했다.
뇌공학적으로 정보의 저장과 인출이 중요하다. 아무리 많은 새로운 정보를 얻어가는 것에 압박감을 갖더라도 이미 얻은 정보를 재활용하는 것이 훨씬 가성비가 높은 학습효과를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컴퓨터과학 전공은 학원에서 단기적인 몇 개월 코딩훈련,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보다 효율적이지 못한
공룡시대 구석기시대 이야기를 하는 따분한 면모, 실용적이지 못한 커리큘럼으로 폄화될 수 있지만
학사가 있으면 석사, 박사도 생각할 수 있으니 그만큼 효용성도 있다. 사실, 특허법률사무소에서 잠깐 일하면서 대표 변리사도 컴퓨터과학 학사 전공은 해볼만 하다는 조언도 주셨다.
당시에 변리사들도 방통대에서 법학 학사학위를 얻고자 대부분 학사편입이 유행이었다.
늦은 컴퓨터과학 전공은, 그동안 소프트웨어 벤처기업 연구개발실에서 만났었던 개발자들과 대화를 다시 떠올리게 하면서 근본 원리를 이해하는 힘이 되었고 어린 친구들과 학부모를 위해 <코딩시대> 책을 쓸만큼 좋은 역할을 했다. 아두이노, 라즈베리파이는 어릴 적 전자공학 키트를 만들어 본 경험이 전이된 것처럼 흥미로왔다. 3D프린팅을 배우다 보니, 설계 디자인 소프트웨어도 다루게 되었다.
가상현실, 증강현실을 배우다보니 Unity3D, C# 교육모임도 만들게 되었다.
크고 작은 드론대회에 참여해서 운 좋게 수상을 하기도 했다.
어릴 적 자주 다니던 세운상가에 다시 찾아가보면서 스타트업들과 여러 모임에 참여해보았고 스스로 관련 학습 교육 모임을 만들게 되었다. 단기간에 1,300여 명과 온라인, 오프라인 모임을 하면서 갑자기 바빠지게 되었다.
린 스타트업 프로세스를 경험하고 있었다.
첫딸은 남동생을 정말로 좋아했다. 집 바로 옆 놀이터에 유모차에 실은 동생을 자랑하며 작은 엄마 노릇을 했다.
초등학교 운동회는 가족이 다시 모였는 데, 미숙아 쌍동이로 태어난 키가 더 작아보이는 딸들을 보면 좋아보이기도 하면서 뭔가 그랬다.
2009년 8월, 첫딸은 교통사고로 우리 곁을 갑자기 떠났다.
나와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큰 비극이었다.
그런데 딸은 꿈으로 가족을 찾아왔다.
몸이 제일 약한 편이었던 hw, 부활하신 예수님의 손을 잡고 집을 찾아와 김치볶음밥을 가족에게 해주고 마지막 허그를 하고 천국으로 간 꿈 이야기를, 장례식을 끝나고 들어서 놀랜 것은
아내도 장례식장에서 딸의 손을 잡은 예수님의 뒷 모습, 엄마에게 인사를 하고 갈 길을 간다는 딸의 모습을 보았다. 내 옆에서 헛소리를 한다고 다들 걱정했었는데.
우리 딸은, 가족 곁을 떠나도
우리가 함께 사랑하고 사랑주시는 부활의 예수님의 손을 잡고 있었다.
엄청난 반전이었다.
시간이 흘러,
늦둥이 아들은 아빠 옷을 입을 정도로 성장이 빠르다.
2015년, 마지막으로 자연어처리, 번역엔진 소프트웨어 회사를 그만두고 흐른 시간;
40대 후반에서 50대초반에, 생존하기 위해 여러가지 도전하면서도
문득 가족의 힘으로 살고 있음을 돌아본다.
딸아, 아들아, 우리 잘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