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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피셔 Mar 02. 2020

"사랑한다"는 말이 부족한 이유

사랑해, 라는 말의 맹점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횡단보도 앞에 서있었다. 저녁에서 밤으로 넘어가던 시간, 평소처럼 멍청히 서있던 내게 조용한 바람이 불었다. '춥다'고 느끼며 옷을 여몄다. 곧 횡단보도가 파란불로 바뀌었고 나는 다시 걸었다. 걷다 보니 춥지 않았다. '서늘하다'고 말해도 될 것 같았다. 횡단보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가다 보니 '서늘하다'는 단어가 조금 약하게 느껴졌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집으로 가는 길에 나는 길을 잃었다. 내 사전엔 지금을 표현할 단어가 없었다. 춥지는 않지만 서늘하다고도 할 수 없는 그런 날씨였다. 그런데 기분 좋은 날씨. '상쾌하다?' 상쾌하다기엔 미세먼지가 가득했다. '서늘하다'라는 표현이 가장 가까우니 '서늘하다'라고 여기면 될까?


언젠가 읽었던 책은 말했다. 대부분 인간의 의식이 무한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언어를 배우는 순간 의식은 그 언어에 종속되고 결국 인간은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 안에 머물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인간이 '단어'를 배우며 세상을 배우고, 사용하는 '단어'의 영역이 인간의 세상을 보여준다고 믿었다. 영화 속에서 사는 인간은 영화의 단어를 사용하고, 정치 속에서 사는 인간은 정치의 단어를 사용할 테니. 

'춥다'와 '서늘하다' 두 개의 단어 사이에서 길을 잃은 나는 어떤 세상에서 머무는 걸까?



항상 타인과 어울려야 하는 우리에게 예민한 감정은 고통이다. 순식간에 떠나가는 주말을 힘겹게 보내고 월요일부터, 혐오하는 사람들과 가까스로 5일을 버텨야 하는 우리에게 감정은 사치다. 매 순간 급변하는 감정을 하나하나 받아들일 수 없으니 우린 감정을 뭉개야 한다. "오늘 하루 어땠어?"라는 질문에 "끔찍했어", "그냥 그랬어"라는 짧은 대답으로 우리는 오늘 하루 겪었던 모든 감정을 뭉갠다. 그러면 내일을 조금 더 잘 버틸 수 있지 않을까?


지구에 머무는 우리는 국가와 문화라는 테두리에 묶이며 태생적인 한계를 갖는다.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위해 언어를 배웠던 우리는 반대로 언어에 묶인다. 단어는 폭력적이다. "사랑해"라는 한마디 안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 담길까. 하지만 그 감정들은 세 글자에 뭉개진다. 여자 친구에게 느끼는 사랑, 어머니에게 느끼는 사랑, 친구들에게 느끼는 사랑. 각각 다른 감정들이 '사랑'이라는 단어로 죽는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스스로 뭉개려 노력하지 않아도 뭉개지는 것이다. 


우린 우리의 감정을 최대한 보존할 필요가 있다. 당신의 마음속에서 요동치는 감정을 가만히 들여다보시길. 그게 당신이 살아있다는 증거이고, 여과지에 걸러지지 않은 순수한 인간임을 확인하는 방법이니까.



Written By. 낭만피셔
Photo By. 낭만피셔
Instagram : @romanticpis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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