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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김 Apr 04. 2022

내가 못 읽는 이유

한 권이 아니라, 한 장, 한 토막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언젠가 신문에 정기적으로 칼럼을 연재하던 전문가가 칼럼을 모아 책을 냈는데, 전문가의 원고를 받아 게재하는 일을 맡았던 담당자는 그 책을 선물로 받고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고 했다. 보내 주는 원고마다 발행할 수 없는 수준이어서 매번 시간에 쫓기다 직접 수정을 해야 했는데, 그렇게 수정된 글들이 책으로 나온 거였다.


인플루언서들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요즘 같은 때에는 더 직접적으로 기획되고 편집된 책들이 많은 것 같다. 유튜브 작업물을 글로 옮기거나, 인터뷰를 해서 글로 풀어내거나, 강연을 녹취해 다듬는 식이다. 중요한 건 글 쓰는 능력이나 글 자체가 아니라, 내용이고 관점이니 충분히 가능하고 또 필요한 일이다.


문제는 그런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리소스가 낭비되고 있다는 거다. 전문가 혹은 인플루언서의 멋진 결과물을 만드는 데에 많은 사람들의 많은 시간이 들어간다. 이전처럼 몇 십만 부 베스트셀러가 나오는 시대라면 납득할 수 있는 규모지만, 출판 시장에서 수만 부만 팔려도 잘 팔렸다고 하는 시대에 맞는 방식은 아니다.


책 많이 읽는 건 무조건 좋은 거니까 독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나는 좀 다르게 생각한다. 책은 하나의 상품인 것이고 책이라고 해서 다른 매체에 실린 내용보다 월등히 좋은 내용만 있는 건 아니다. 솔직히 나도 책 읽는 시간이 길지 않다. 내 관심사에 맞는 내용을 찾기 어려울뿐더러, 3-4시간은 투입해야 완독 가능한 분량을 읽어 낼 '뭉텅이 시간'도 별로 없다. 5분, 10분 단위로 쪼개서 콘텐츠를 소비하거나 길어야 1~2시간 투입하는 생활 패턴이 굳어졌는데 400페이지, 500페이지짜리 책을 집어 들기가 쉽지는 않다. 그렇게 시간을 들였다가 절반 정도 보고 내가 찾던 게 아니어서 그냥 덮은 경우도 적지 않다. (물론 책은 산 것 중에 읽는 거지만요.)


결국 보는 사람들의 패턴에 맞지 않는 형태를 만들어 내느라 만드는 사람들의 시간과 에너지를 과도하게 투입하고, 성과는 나지 않는 것이 지금의 한국 지식 시장 구조다.


정보, 지식의 단위가 한 권이 아니라 한 장이 될 수도 있고, 한 토막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유려한 글쓰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실 그럴 필요도 별로 없는) 전문가와 인플루언서를 '문장가'로 만드는 데 리소스를 투입하지 말고, 전문가와 인플루언서가 쉽게 생각을 기록, 공유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방법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 만들고, 고치고, 다시 만들면서 더 쉽고 재미있게 생각을 나누고 발전시킬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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