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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선siseon Aug 18. 2022

그리지 않고는 견딜수가 없어서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이중섭»

누구든 일상에서 남기고 싶은 순간이 있다. 그 순간, 혹은 감정을 대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른데, 크게 사람이 관여하는 방식과 관여하지 않는 방식으로 나뉜다. 사람이 관여하는 방식은 누군가와 그 순간을 공유하는 것이다. 주로 대화를 통해, 혹은 물리적으로 함께 있음을 통해 공유한다. 그리고 사람이 관여하지 않는 방식. 이 방식은 소위 '예술'로 구분되는 장르인 사진, 글, 그림, 음악, 영화 등이 있다. 그래서 나는 예술작품은 모두 누군가가 일상의 한 순간이나 감정을 박제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떤 박제는 예술 작품이 되고 어떤 박제는 그저 흔적으로 남을 뿐이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나. 


좀 낯간지러운 방식으로 표현하면 나는 그것이 '불덩이'를 가졌느냐 차이에서 온다고 본다. 일상의 한 장면이 마음에 남았고 그것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 혹은 의지의 정도가 0에서 10까지 라면 예술가의 의지는 10에 가깝다. 그리고 욕구가 곧 그 순간을 내가 느낀 방식대로 최대한 잘, 적확하게 남기려는 의지의 원동력이다. 누구도 그 순간을 표현해내라 강요하지 않았지만 밖으로 토해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어서 스스로 고통스럽게 뱉어내는 생각의 결과물. 혹은 그것을 자신의 도구와 언어로 표현해냈을 때의 그 희열에 대한 중독. 그 욕구와 의지가 내 안에 불덩이처럼 활활 타오르는 사람이 곧 예술가다. 


그러나 불덩이가 존재만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차이는 그 불덩이가 식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 오랜 기간 사랑받는 예술가의 자질 중 하나는 '연대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 했다. 그러니까, 그것이 '한 순간'이 아니라 '일생에 걸쳐' 끊임없이 순간을 남기려는 의지를 불태우고, 구현해내야 하는 것이다. 누구나 한 순간을 기록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자의든, 혹은 견딜 수 없게 느껴지는 자기 안의 타의든 전 생에 걸쳐 끊임없이 그 일을 해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게 남은 결과물들이 쌓여 누군가를 예술가로, 그 결과물들을 예술작품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나에겐 굵은 선들로 그려진 황소, 돈이 없어 껌종이 담뱃갑의 은박에 그림을 그린 것으로만 기억되던 이중섭이라는 작가는 진정 그 불덩이를 평생 가슴에 품고 산 작가가 아니었나 새삼스레 생각해본다. 몇 번의 선과 색만으로도 일상을 재치 있게, 끊임없이 그려내던 작가는 사랑하는 여인, 그리고 두 명의 아이들과 함께했고, 생활고에 시달려 그들과 헤어졌으며, 그 이후 평생 다시 함께 하고자 노력했으나 결국 타지에서 홀로 무연고사 했다. 이 생의 모든 순간을 이중섭은 끊임없이 그리고, 또 그렸다. 가족이 함께 했던 순간, 특히 짧았던 제주도 여행은 그의 기억 속에서 수 십 번, 수 백번 재생되었을 것이며 그래서 그 여행의 모든 면을 그린 수십 개의 작품으로 남았다. 가족과 헤어진 후의 작품들에서 아이들은, 그리고 사람들은 손가락이든 발가락이든 어디든 신체의 일부가 닿아있는, 그래서 한데 뭉쳐져 있는 형태로 그려져 홀로 있었던 그의 외로움을 절절히 느껴지게 한다. 


그 외로움 조차도, 생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포함해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생을 그려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하나의 영화처럼 연결되어 마음을 울린다. 그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그, 그리고 그 외의 어떤 방식으로든 평생의 일상을 기록해 감동을 주는 모든 예술가들을, 존경하지 않을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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