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은_2019 설 즈음 나는 생각
1.
해마다 설이며 추석이며 명절이면 전라도 해남을 찾아 간다. 이른바 고향이라는 장소가 주는 어떤 감정들이 거의 40여년동안 인생에 켜켜히 쌓여져 있다. 어린시절 비포장도로의 해남을 가는 길은 너무 힘들고 괴롭고 지루한 일상이었다. 보이는 것들은 산들과 나무들 그리고 개울가 하천의 다슬기와 고동이었다. 할머니는 벼농사에 한창이셨고 나는 나락들이라고 하는 벼들의 집단을 보고서는 자연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미지와 감정을 쌓아 갔었다. 지금 이렇게 빠른 열차를 타고서 내려가는 사이에 낭만적인 희망과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의 절망이 교차하는 지점에 잠시 머물러 있다.
2.
어머니가 많이 늙으셨다. 얼굴살도 많이 늘어나셔서 축 처지시고, 걸음도 조금씩 느려지신다.(어머니는 이렇게 아들이 쓰는 것을 보고, '엄마 팔지 마라~!'이러신다 ㅎㅎ) 명절을 지내러 해남으로 내려가는 사이 아들은 귀찮은 듯이 옷을 여며매지만 어머니는 돼기갈비며 부침개 거리며, 나물거리를 담아서 한 봇다리를 쌓아 놓으셨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아들은 어머니가 누가 준 오리털패딩을 입고 다니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부랴부랴 설빔이라고 오리털패딩을 사드렸다. 꽤 까다로운 우리 어머니의 디자인감각을 통과하지 못한 첫번째 콜롬비아 패딩은 반품을 시켰다. (아버지 여행가신다고 콜롬비아 패딩을 사드렸더니, 질투하신 어머니께 사드렸는데 경량패딩이라서 디자인이 맘에 안드신다고..) 그래서 저녁에 김포공항 롯데몰을 돌아다니면서 털이 복실복실하고 두툼하지만 너무 살쪄보이지 않는 블랙컬러의 오리털패딩을 선물해 드렸다. 몇 번 입어 보시더니 결국 맘에 들어하셔서 오케이! 설빔으로 부모님 외투를 이제야 사드리는 '불효자는 웁니다 ㅠ'
3.
40년간 지속되는 시집살이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 어머니는 못내 시어머니의 작은 숨소리에도 지친 한숨에 심장이 쪼그라드셨다. 물론 할머니가 시집살이를 많이 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서운하고 생각하지 않고 말씀하시는 것들에서 진절머리가 나시는 것 같았다. 울고 계신 어머니를 모시고 저녁밤 야심한 시간에 완도대교로 향했다. 어머니와 커피 한잔을 마시며 아들은 어린아이처럼 '엄마 이건 이랬고, 저건 저랬는데...'라며. 나도 안다. 얼마나 힘들고 어려우신지. 그러나 나는 어린아이처럼 어머니의 기쁨이 되고자 소위 '촉새'가 되기로 했다. 그윽한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보시는 어머니의 눈동자는 어느새 천국을 맛 본 것처럼 즐거워지신 듯하다. 자식농사 잘 지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되물어 본다. 용돈마니 드리고 호강시켜주는 것과 같은 고전적인 것 말고, 지금 여기 내 앞에서 함께 하시는 부모님과 인생의 세세한 이야기까지 나눌 수 있는 관계들. 나는 이것이 효도라고 생각한다. 열심히 1시간을 떠들고 다시 모셔왔다. 가정에 어느정도의 평화가 임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4.
팽목항으로 향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것 같은 설의 오후, 나는 학생들의 단체 사진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진도항의 뒷모습 가운데, 아이들의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방명록에 이름을 남기고 몇 년전 다짐했던 것처럼 '절대 잊지 않겠다'라며 발걸음을 돌렸다. 우리 사회는 병들었다. 사람들은 힘들어하고 자본에 쫓겨난 이들에게 남겨진 것이 이제는 이름까지도 기억에서 사라지는 순간들이다. 누군가가 기뻐할 때 누군가를 피눈물을 흘린다. 피눈물을 흘리는 이들을 기억하며, 한번이라는 손 잡아주는 것. 그러나 가슴 속에 희망이 실현될 수 있도록 현실의 길을 만들어가는 작업을 게을리할 수 없겠단 생각을 한다.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세월호의 주범들과 책임소재가 나의 버킷리스트에 올랐다. 진도를 돌아서 지나가는 사이 남도국악원이 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호화로운 건물에서 박근혜정권의 해양수산부장관과 총리는 특실에서 거주하고, 세월호 유가족은 그렇게 누추한 체육관 바닥을 전전긍긍했다는 생각이 하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5.
진도를 한바퀴 돌아서 외삼촌을 모시고 오는 길. 평화로운 국립진도휴양림이 있다. 여름에는 제법 산새와 바다가 만나서 시원하고 아늑한 공간이 될 것 같았다. 봄에는 부모님을 모시고 와야겠단 생각을 해보았다. 시간은 점점점 빠르게 가는데, 부모님들의 기억은 점점 느려지시나보다. 나는 잠시 바다를 바라보면서 한 사람의 인생에 지나가고 있는 은하수 같은 역사들을 본다. 누군가에게 따뜻했던 시간과 어떤이에게는 추웠던 인생의 역사들이 뒷모습에 어려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