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사회학 3장 속물화와 윤리_김홍중
김홍중 교수님의 마음의 사회학으로 북스터디를 하고 있다. 오랜만에 좋은 책을 만났고, 가끔 이 책을 읽다가 지하철을 내리기 힘든 때가 있기도 하다. 지난번에는 진정성과 속물화에 대해서 알아보았다면 이번에는 속물화가 전사회를 뒤 덮은 '스노보크라시'의 개념과 그 속에서 다양한 양상들을 살펴본다. 또한 극성르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윤리'를 살펴보고 앞으로 어떤 방향성을 가져야 하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사회학에 대해서 고민이 많았는데 마음의 사회학을 읽으면서 어떤 감각이 생기고 일정한 관점이 생기는 것도 같다. 읽으면서 이제야 깨닫는 것은 내가 왜 이렇게 방황했는지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속지않는 자는 방황한다!" 방황은 즐거울 일이지만 스노보크라시가 만연한 세상에서 속물화되지 않은 방식으로 사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미래의 나를 위해서 남겨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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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는 자기개발서의 향연이었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 등 사회적 성공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좋은 습관과 품성, 매너와 처세술을 명령한다.
‘여자의 모든 것은 20대에 결정된다'에서는 ‘속물이 되라'라는 명령을 한다. 속물마인드는 눈 앞에 놓은 모든 선택에서 후회가 가장 적은 쪽을 선택하라는 것을 말한다.
스스로 속물이 되자고 다짐하면 현실적으로 확실한 선택을 하는데 갈등이 없어진다.
남인숙은 “속물을 인정하면 인생의 해법이 보인다"라고 하면서도 ‘고급 속물’이 되라고 명령한다.
고급속물이란 환상과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히지 않고 현실을 자기편으로 만들며 사는 여자를 뜻한다.
‘스놉이 되어라'라는 명령은 세속적 성공, 공경적 생존에 적합한 스놉의 주체성 형성을 기도한다. 스놉은 이러한 배경에서 더 이상 음흉하거나 시기심이 많고 위선적인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건설적이다.
스노보크라시의 사회는 스놉에 대한 성공담이 모범이 되고 모방이 되고 선망되는 사회로 사회적인 월계관으로써 ‘스놉'을 마땅히 자랑스러워하는 사회이다.
스노보크라시는 대중을 스놉으로 구성하는 대중독재이다. 속물적 초자아에 의한 속물적 자아의 관리와 통제이다.
87년 체제에서 97년 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시대를 구축하는 주체의 형식이 바로 스놉이다.
자신들의 속물적 욕망이 시대의 면죄부가 되었다는 해방감과 모두가 속물적인 욕망을 분출하는 사회에 대한 도덕적 불안감의 양가감정을 가진다.
스노보크라시의 이중적 지배체제
거시적 통치성 : 스놉들이 스노비즘으로 무장하고 도구적 성찰성을 가진채로 사회의 지배층이 되는 과정이다.
자아 통치 : 포스트-진정성 에토스의 시대에 ‘자기관리 테크닉'으로써 스노비즘은 생존의 필수 방법
거시적인 스노비즘의 통치성과 미시적인 자기관리 테크닉으로써 스노비즘은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을 완전히 갉아 먹는다.
그런데 자아의 내면으로 들어가면 슈퍼에고도 스노비즘에, 에고도 스노비즘의 지배를 받고 있어서 이중적 지배체제는 겹겹히 진행된다.
스놉은 근대의 산물이다(장은주). 위계적 신분질서가 파괴되고 자유경쟁과 평등의 원리로 재구성되는 시민사회에서 인정투쟁을 왜곡된 방식으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존재가 스놉이다.
근대 시민사회는 헤겔이 말하는대로 인정투쟁의 장이었다. 타자의 인정을 받으면 사회 속에서 높은 지위로 올라갈 수 있다. (정치인, 연예인, 인플루언서, 소비사회의 상품들)
스놉은 인정을 열망하다가 인정의 목적을 잊는다. 그래서 속물은 주체가 없고, 자신이 갖고 있는 자원과 자신을 혼동한다. 자신이 가진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삼는다.
스놉은 타인을 타인 그 자체로 보지 못하고 그가 가진 지위나 돈 혹은 문화적 자본으로 그를 판단한다. (Boton)
스놉은 언제나 실패자이며 허약한 실존, 인간적 약자이다. ‘인정에의 맹목적 욕망'을 스스로 청산하기 전까지 스놉은 ‘자동기계'로 남는다. 스놉은 악의 화신이라기보다는 ‘악덕'의 소유자이며 덕성을 결여하고 있다. 시민사회는 선한 본성을 깨우며 열등한 스놉들을 치유하고자 했다. 이것이 고전적 스놉의 초상이다.
서구 근대의 간판 소설들에 숨어 있는 공통의 의미구조는 ‘소외된 정신의 자기회복'의 과정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면서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지라르는 이것을 일종의 광기로 파악한다. 그러나 이러한 광기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자들'이 가진 무지에서 나온다.
스놉의 본질은 외적태도의 천박함이 아니라 그가 종속되어 있는 욕망의 메커니즘에서 찾아야 한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면서 그것을 모른다면 욕망의 삼격형 속에서 갖힌 채로 스스로에게 비밀인 존재가 된다.
카프카의 소설에 등장하는 익명의 형상들은 진부한 성격의 독창적이지도 않은 스놉들이다. 스놉은 악마성과 결합되는데 바로 평범하고 일상적인 진부함을 가진 유혹에 걸려드는 자이다.
예루살렘의 아히히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진부한 평범함을 채워가는 스놉인 아이히만은 자신의 무지에서 깨어날수도 없고 각성할수도 없다.
나치 전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은 1961년 4월 11일 예루살렘 지방법원으로 재판받기 위해서 이송된 후 15가지 죄로 기소된다. 1962년 5월 31일 거행된 아이히만의 사형장면에서 그는 사형을 앞두고 상투적인 인사로 마무리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아이히만은 마지막에 당의 언어를 빌려와 타자의 언어로 광고카피같은 클리셰를 연발한다. 회심은 일어나지 않았고 아이히만은 주체도 코기토도 자아도 아닌 자동인형처럼 행동하고 말했다.
코제브의 분석처럼 스톱은 현실에서 이미 존재하지 않는 형식적 추종을 지속하는 자이다.
이미 죽은 ‘고전적’ 문학 혹은 예술의 제스처만을 물신화하여 이를 과시하고 자원화하는 과정을 통해서 문학과 예술의 진정성을 보유하고 있다고 스스로 착각하는 것이 스놉이다.
이러한 스놉은 대타자의 죽음을 부정하면서 상징계에 고착화되어 있다. 대타자를 유령으로 만들고 그 시선 앞에서 교태를 부리고 인정을 받기 위해서 노력한다.
나치라는 대타자의 언어와 법에 대한 고착은 파시스트적 스노비즘이다. 악은 평범하다. 순전한 무사유의 방식으로 죽는 순간에도 자신이 의식으로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결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치와 같이 수용소 안에서 무슬림이라고 불리운 자들에게서 발견되는 사유불능이었다.
생각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무슬림과 순전한 사유에 빠져 있는 아이히만은 동일한 절멸캠프에 있던 두 종류의 결손 인간이었다.
한쪽은 나치라는 대타자에 의해 생산되는 법에 완전히 종속된 스놉이었다면, 다른 하나는 나치의 의해 생산된 살아있는 시체였다.
무슬림의 반대는 좀비다. 대량소비사회에서 무뇌적 소비대중, 고도관리사회의 일차원적 욕망의 대중들이다. 무슬림은 반대로 살아 있지만 죽은 영혼이다. 호모사케르(저주받은, 거룩한 이중적 의미)로서 무슬림은 우리시대의 수많은 대중들과 같이 저항의 의지도 삶의 의지도 없는 자들을 말한다.
그러나 무슬림과 다르게 아이히만은 죽기 전에 놀라움 집중력과 성찰성(reflexivity)을 갖고 있다. 자신의 신체, 정념, 욕망에 대한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할 수 있는 인식과 실천능력을 가졌다.
성찰적 주체는 스스로를 마치 하나의 타인처럼 대상으로 변환시켜 객관적이고 무사심한 판단의 거리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통제한다.
문제는 그의 성찰이 성찰의 목표 그 자체에 대해서는 성찰하고 있지 않다는 점, 그의 성찰서이 특정 지점에 정지에 있다는 사실이다.
스노비즘의 본질은 자기개발 담론의 본질과 만난다. 스놉의 문제는 단순한 성찰성의 마비가 아니라 극단적으로 발전된 성찰성의 도구화의 문제이다. 스놉은 성찰성을 도구화한다. 그는 성찰 그 자체를 성찰하지 않는다.
도구적 성찰성은 ‘키치'(Kitsch)에 상응한다. 키치의 본질은 추와 변증법적 관계를 상실한 허구적인 아름다움이다. 추함과 대결하여 얻어낸 아름다움이 아니라 근원적 대결을 피하고 돌아간 귀여움이다.
성공에 대한 강한 속물적 열망은 성공 그 자체를 하나의 키치로 만들어 버린다. 존재에 대한 정언적 동의의 미학으로 키치를 정의하는 쿤데라는 “전적인 키치의 제국에서는 대답은 처음부터 주어져 있다. 그래서 그것은 모든 질문을 배제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전적인 키치의 본래적인 적은 질문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도구적 성찰성은 성찰의 목적에 대한 성찰을 거부한다. 그러나 성찰을 시작하는 순간 거대한 의문의 영역이 열리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윤리'이다.
‘성의 역사' 2권에서 푸코는 윤리와 모럴을 구분한다. 모럴은 “가족, 교육기관, 교회 등과 같은 다양한 규제체제를 통해 개인이나 그룹들에게 제시되는 행동규칙과 가치들의 총체"이다. 이것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공동체의 준칙들이자, 가치들의 총체”이다.
윤리란 그러한 규범에 대해서 자신의 고유한 판단과 성찰과 행위의 양식을 말한다.
모럴은 대타자로서 상징적 체계와 사회적 구성물의 장을 통합된 전체로 복원하는 것이라면 윤리는 이러한 선험적인 대타자의 상징계에서 의심하고 거부하는 데서 시작된다.
윤리적인 해결책은 수 많은 대타자와 상징체계로부터 자기자신의 고유한 본질, 자기 고유의 방법, 자기고유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순수하고 진정한 본성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조직하는 불확정의 힘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윤리적 개인은 눈을 외부로부터 돌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한다.
97년 체제 이후에 대한민국은 속물화의 과정을 급격하게 경험하게 된다. 그 누구랄 것도 없이 '부자되세요!'라는 단어에 굴복하면서 스스로 어떤 방법으로든 돈을 많이 벌면, 남보다 뛰어난 것처럼 인정을 받으면 행복해 한다. 도구화된 성찰성은 자신이 왜 그것을 추구하는지도 묻지 않은 채로 '나는 왜 없고 다른 사람은 있는가?
'라는 질문으로 사용된다. 오늘날 그렇게 많은 외로움과 두려움이 사회 도처에 출몰하는 것은 97년 체제의 안정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일지도 모른다. 사실 07년 체제는 금융위기로 인한 더욱 더 가속화된 신자유주의체제는 온 국민을 스놉으로 만드는 것도 모자라서 그들의 자녀까지 스높으로 만든다. 지금 태어나는 아이들은 스노비즘의 세례를 온전히 받은 부모님의 우산 아래서 '나는 왜 이런 것들을 추구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것을 얻을 수 있는가?'에 목숨을 걸고 있다. 우리에겐 윤리가 필요하다. 잠시 머뭇거리고, 주춤대고, 애매하게 서 있을 용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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