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현대 과학에서는 특정한 이론에 대해서 특정 영역의 상세한 정략적 예측을 산출하는 수지적 일관성의 능력을 기준으로 평가한다. 또한 그것의 원래 영역 이외의 다양한 영역을 가로지르는 적용성인 수평적 일관성을 추구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자연 현상에 과한 올바른 표상으로 간주되는 개념과 법칙 그리고 이론의 일관성 있는 네트워크를 생성한다. 이제 뉴턴과 함께 만유인력의 법칙의 발견과 그 발전에 대한 설명을 들어보고 이것이 어떻게 공간과 시간에 대한 우리의 개념과 연결되는지 알아보자. 이 과정에서 일관성 있는 내러티브가 만들어지기 위해서 과학적 사실들이 어떻게 선택되고 만들어지는지 볼 수 있게 된다. 오늘의 내러티브는 뉴턴의 발견이다. 절대공간과 상대공간의 개념과 함께 이전의 천동설과 지동설 논쟁을 어떤 방식으로 돌이켜갔는지 살펴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지구는 천구의 중심이며 지구와 천구 사이의 모든 공간은 동심원 구역들로 분할되어 있다. 각 구형은 각 행성들의 영역에 속한다. 이러한 구형 구역 체제는 관찰된 별과 행성의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가 다른 하나 속에서 회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전체 시스템은 가장 바깥쪽 껍질인 친구의 운동에 의해서 유도된다. 그리고 천구 바깥쪽은 아무것도 없다. 이 모델에서 하늘의 운동은 달 아래 세상의 모든 변화와 다양성에 대하 책임을 갖는다. 지구는 그 중앙에 본성적으로 정지해 있고 지상의 모든 운동은 하늘로부터 간접적으로 유되된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적 이론은 물리적 세계를 이해하는 훌륭한 첫걸음이었다. 이것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새로운 운동법칙을 필요로 했지만 말이다.
코페르니쿠스에 의해서 제안된 태양중심 모델이 톨레미의 지구중심 모델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를 보여준 것은 아니지만 기존에 모델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고 결국 뉴턴의 '프린키피아'가 행성의 운동을 설명하는 일단의 법칙과 원리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함으로써 혁명을 종결시켰다. 코페르니쿠스의 사상은 기독교적 사상 전체에 그리고 성서의 세계관에 잠재적으로 파괴적인 것처럼 보였다. 영국의 시인이자 신학자였더 존 던은 '세계의 해부'에서 '새로운 철학은 모든 것을 의심으로 몰아가네, 모든 것은 산산조각나고, 일관성은 사라졌네'와 같은 이야기를 쓴다. 플라톤적인 개념에 의하여 존재의 거대한 사슬이 실재의 일관성을 만들고 가장 늦은 형태에서부터 시작해서 가장 높은 형태로 연결하는 선충실의 원리와 다원성의 개념을 도출하게 만든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의 관점은 이것을 깨뜨리는 위협으로 보였다.
브라헤와 케플러는 맨눈으로 관찰을 했지만 1609년 갈릴레이는 망원경을 통해서 하늘을 연구했다. 이것은 당대의 세계관에 극적인 영향을 미쳤다. 갈릴레이는 망원경을 통해서 새로운 별들을 발견했고 일반적으로 믿었던 것보다 하늘이 밀도가 더 크고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달의 관찰을 통해서 그동안 완성형의 달의 표면이 실제로는 울퉁불퉁한 표면을 갖는다는 것도 발견했다. 지구와 하늘에 있는 물체들의 구성물들 간에는 어떤 차이점도 보이지 않았다. 갈릴레이는 목성의 위성을 관찰했고, 코페르니쿠스적 태양계의 가시적인 모델을 제공했다. 자연의 패턴들은 올바른 분석에 기초해서만 명확해진다. 행성운동이 복잡하고 계산하기 매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 기본법칙은 간단하다. 이 간결성은 사려깊은 분석 후에 수학의 언어로만 보여질 수 있다. 물론 모든 것을 하나로 포괄하는 법칙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법칙들과 이론을 가지고 특정영역에서 연구를 할 수 있다.
중력이 발견된 방법은 완전히 근대적인 것이며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과학적 연구와 진보의 패러다임에 해당한다. 브라헤의 향상된 자료들에 기초하여 케플러는 경험저으로 세 개의 법칙을 발견했다. 갈릴레이는 이론적으로도, 실험적으로도 이상적인 상황에 대해서 연구했고 그의 관성개념에 외삽을 작용했다. 뉴턴은 이것을 그 자신의 관성과 만유린력의 법칙에 결합시켰다. 케플러의 법칙을 인용하여 태양이 역제곱의 힘으로 행성들을 끌어당긴다는 주장을 펼친 뉴턴의 위대함은 웆의 모든 천체들 사이의 상호 인력으로 확장되는 일반화를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뉴턴은 이전에 연구들을 통해서 중력 때문에 지구가 구형이고, 행성운동의 법칙은 만유인력의 원리를 찾게 해주었고 적도는 회전축둘레로 원심력이 작용하기 때문에 부풀었다는 것과 대양의 조수효과 역시 설명할 수 있었다.
뉴턴은 귀납법과 함께 사실상 가설연역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또한 때때로 귀납적인 측면을 강조한 경우도 있었다. 뉴턴은 코츠와의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 번째 원리들은 현상으로부터 연역되고 귀납에 의해서 일반화되는데 그것은 철학에서 명제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고차원의 증거이다. 그리고 나는 가설이라는 단어를 여기서 단지 그런 명제가 현상이거나 어떤 현상으로부터 끌어내진 것으로서가 아니라 어떤 실험적인 증거도 없이 추측되거나 가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위해서 사용했다"
또한 영국 왕립학회의 간사 올덴버그와의 편지에서 어떻게 자신이 만유인력의 법칙에 도달했고 그것이 어떻게 검증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내가 제안했던 이론이 나에게 분명한 것이었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확실하고 직접적으로 결론을 내려주는 실험으로부터 유도된 것이다. 만일 내가 주장하는 실험들이 결함이 있는 것이라면 그 결함들을 보여주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유효하다면 이론들을 증명함으로써 모든 반밥들이 무효한 것이 된다."
코페르니쿠스적 모델, 케플러의 법칙, 뉴턴의 운동과 중력의 법칙들이 받아들여지면 그것에 종속될 수 있는 많은 검증들이 존재하고 그것들과 일관성을 갖는 다른 사실들이 존재한다. 1675년 덴마크 천문학자 뢰머는 행성운동의 규칙성을 의심하기보다는 시간차를 빛의 유한한 진행 속도에 귀속시켰다. 물체에서 출발한 빛이 눈에 도착했을 때 물체를 본다는 것을 상기하면 물체의 빛이 실제로 우리의 눈에 도착했을 때 그것을 본 물체가 그 자리에 있을 필요는 없다. 이것은 빛의 유한한 속도에 대한 첫 번째 측정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법칙이 다른 법칙의 발견에 도움이 된다는 수평적 일관성의 예를 볼 수 있다.
뉴턴의 운동과 만유인력의 법칙에 대한 신념에 근거하여 천문학자들은 천왕성과 궤도의 설명하기 힘든 섭동으로부터 해왕성의 존재와 위치를 예측할 수 있었다. 해왕성과 명왕성의 발견은 지식의 축적적 효과의 이며 이는 과학적 활동의 주된 요소에 해당한다. 자연이라는 천의 이러한 얽혀진 실의 짜임새는 근대과학에 의해 대체되었던 아리스토텔레스적 사고의 복잡한 양상을 회상시킨다. 뉴턴의 중력이론의 모든 검증들은 실험실의 실험들보다는 천문학적 관잘에 기초하며 뉴턴의 이론은 캐번디시에 의한 만유인력상수 G의 결정에서 직접적인 실험적 증명을 얻었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공간의 본성에 대한 신념은 극적인 변화를 겪어왔다. 오늘날 사람들은 공간을 빈공간에서 연속적으로 무한히 나눌 수 있으며, 내재적인 방향성이 없는 등방적인 것으로 본다. 그리고 어디나 똑같은 등질적인 것으로 보면서 무한한 크기를 가진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물질에 의존하지 않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공간은 물질이 존재할 수 있는 수동적인 그릇이나 배경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한 특성들은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모두 추상적인 개념이며감삭수용을 위한 어떤 즉각적인 증거도 없다. 위치(place)에 대한 원시적인 개념이 먼저 생기고, 그 함축은 국지적인(Local)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뉴턴 이전의 공간개념이 이와 같은데 그 이전에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원자론으로 유명한 고대 그리스의 데모그리토스는 공간 또는 진공은 단지 물질과 원자들의 운동을 포함할 뿐 물질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는 무한의 빈 확장의 일종이었다. 후대에 로마의 시인이자 철학자인 루크레티우스는 '우주의 본석'이라는 논문에서 우주의 크기는 무한하다고 주장한다. 기본적으로 공간의 경계나 끝은 공간의 끝이라고 가정되는 곳인 '벽'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논증은 우주의 범위가 무한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무한히 반복될 수 있다. 무한의 공간에서 무한한 존재를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요즘 사람들의 공간개념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에게는 물질과 공간은 서로 벗어날 수 없게 결합되어 있었다. 플라톤은 물리적 대상의 세계를 기하학적 형상의 세계와 일치시켰기 때문에 물질과 빈공간도 돌일시했다. 세상을 구성하는 네 개의 기본원소에는 규칙적인 공간구조가 주어졌다. 예를 들면, 30면체의 물, 8면체의 공기, 4면체의 불, 6면체의 흙과 같은 것이다. 물리학은 플라톤에게는 기하학이었다. 이러한 흐름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공간은 물체의 자연스러운 운동을 결정하므로 물질에 적극적인 영향을 미쳤다. 공간상의 다양한 영역의 상이한 조건들은 물체가 적당한 위치를 향하는 자연스러운 운동을 결정했다. 진공은 방향의 특성이나 위치의 이동의 조건 변화를 갖지 않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진공에서 자연스러운 운동은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진공이라는 존재는 불가능했다.
고대의 세가지 공간이론
원자론적 관점 : 공간 자체의 물리적 특징을 강조한다.
플라톤적 관점 : 수학적 측면과 공간의 물질적 연결을 강조한다.
아리스토텔레스적 관점 : 공간의 인과적 본성을 강조한다.
고전적 그리스 철학과 과학은 플라톤을 통해 공간을 국소적 기하학적 변화를 갖는 불균형한 것으로 표현했고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상하의 명백한 내재적 구분을 갖는 비등방적인 것으로 표현했다.
유대교의 경우에는 공간과 신 사이의 연결이 존재했다. 공간을 뜻하는 유대어 'makom'은 신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신의 편재에 대해서 시편 139편은 신과 공간을 동일시하고 있다. 모든 물질에 스며들고 활동하는 것으로 신과 우주를 동일시함으로서 신의 존재 증거를 찾았던 캠브릿지의 철학자 헨리모어의 작품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뉴턴에 영향을 끼쳤다. 모어는 필연적으로 공간은 무한하다고 믿었으며 신과 공유하는 정신이었다. 모어는 이러한 무한의 필연적 정신적 존재를 신과 동일시했다. 물질적인 그리고 우연적인 세계는 유한한 것으로서 무한한 공간안에 놓여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뉴턴의 '프린키피아'이 성공 이후 공간개념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뉴턴은 자신의 공간 이론 이외의 곳에서는 물리학과 형이상학을 구분했다. 뉴턴에게 모어의 철학적인 영향력과 함께 아이작 베로는 또 다른 영향력을 끼쳤다. 베로는 자신의 기하학적 체제를 발전시키면서 공간은 신의 편재와 동일한 것으로 생각했다. 뉴턴은 절대공간은 운동 제1법칙인 관성의 법칙을 위해서도 논리적이고 필연적으로 여겨졌고 '프린키피아' 초판 서문에서도 기하학을 여학의 일부로 보고 있었다. "그러므로 기하학은 동역학적 실천 위에 세워졌고 측정의 기술을 정확히 제안하고 설명하는 보편 역학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뉴턴은 공간과 그 구조를 역학이라는 경험 과학의 일부로 이해했다.
'프린키피아' 1권에서 상대적 공간과 절대적 공간의 본성을 분석한다. 상대적 공간은 물질적 대상들의 위치에 의해서 결정되는 거인 반면, 절대적 공간은 물질적 대상들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뉴턴은 절대공간은 운동학적으로 관찰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말하면 물체들의 운동을 그들에 작용하는 힘을 고려하지 않고 연구하는 것으로 관찰될 수 없는 것이다. 단지 상대적 운동만이 그런 다른 과찰들에 의해서 검출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뉴턴은 원심력에 기초하여 절대운동의 존재를 말할 수 있는 동역학적 논증을 주장했다.
뉴턴의 양동이 사고실험은 줄을 매달은 양동이를 회전시킴으로써 처음에는 양동이 벽에 물이 차오르다가 결국 계속된 회전으로 양동이 안의 물이 오목한 형태로 귀착되는 것을 말한다. 이를 통해서 뉴턴은 절대운동을 관찰할 수 있다고 보았고 이는 물체가 단지 하나의 참된 원운동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뉴턴의 기본적인 생각은 상대운동은 물체에 부과되는 힘 없이 일어나는 운동인 반면 절대운동은 힘에 의해 야기되는 운동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대해서 마흐, 버클리, 라이프니츠와 같은 사람들은 반대했다. 뉴턴에게 공간은 실재적 물체의 용기이고 물질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었다. 공간을 물질을 나누는 수단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에게 공간은 물질적 대상의 위치적 성질이고 물질 없니는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비록 위대한 수학자 오일러(Euler)가 절대공간의 필연성을 믿었고 관성의 법칙의 논리 적 필연성을 보임으로써 그것의 선험적 존재성을 증명하려고 시도했음에도, 역학 분야의 뛰어난 프랑스 저술가들은-라그랑지, 라플라스, 푸아송- 절대공간에 대해 실제적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에게 절대공간은 이론적 증명이 필요하지 않는 작업가설(working hypothesis)에 불과했다. 마흐는 과학에서 모든 형이상학적 가정들이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행함의 주체는 되지만 그 대상이 될 수는 없는 절대공간의 개념은 과학적 생각에 유해한 것이었고, 이런 주장은 나중에 아인슈타인에 의해 되풀이되었다. 마흐는 질량의 비가속 운동을 공간 자체보다 전체 우주의 질량중심과 연관시켰다. 관찰 불가능 한 절대 관성기준계에 대한 이러한 반대가 갈릴레이의 작업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언급에서 반복되었다.
아인슈타인의 절대공간에 대한 주장
여기서 나는 갈릴레이가 무거운 물체의 낙하를 설명하기 위한 우주 중심의 가설을 부정한 것과 물질의 관성적 행동을 설명하기 위한 관성계의 가설을 부정하는 것 사이에는 긴밀한 유사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추가하겠다(후자는 일반 상대성 이론의 기초가 된다).
두 가설의 공통점은 다음의 특성을 갖는 개념적인 대상을 도입하는 것이다.
① 그것은 무게가 있는 물질(또는 장)과 같은 실재하는 어떤 것으로 가정되지 않는다.
② 그것은 실제 대상의 행동을 결정하지만 그것에 의해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와 같은 개념적 요소의 도입은, 순수하게 논리적인 관점으로부터 절대 받아들 일 수 없지는 않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직관과 일치하지 않는다.
이와 유사한 정신에서, 이론이 원리적으로 관측할 수 없거나 측정의 절차가 상술될 수 없는 대상을 포함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은, 실증주의(Posivism) 또는 논리 경험주의 (togical capircism) 철학 운동이 성장하였던 배경의 일부분이 되었다. 절대공간과 절대운동이 물리적으로 검출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지자 점점 더 많은 과학자들이 이런 개념들은 정밀과학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느꼈다. 절대좌표계에서 살리려는 마지막 시도는 19세기말 에테르와 그것을 동일시하려는 움직임이었다.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기본적인 쟁점은 수학적 공간으로부터
물리적 공간을 분리해내는 것이었다.
모든 물리적 실재로부터 독립적으로, 우리는 정신적이고 논리적으로 유클리드 공간이라 불리는 대상을 구성할 수 있다. 그러나 논리적이고 모순 없이 다른 형태의 수학적 공간을 구성할 수도 있다. 물리학에서 질문은 수학적 공간처럼 물리적 공간이 그 내부에 존재하는 물질에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이다. 뉴턴은 그렇게 생각했고, 유클리드 공간과 동리한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이에 반해서 물리적 공간과 물질은 서로 구분될 수 없이 연결된 것으로 가정했다. 여전히 이러한 논의는 계속된다. 하이젠베르크는 말했다. '넌센스야! 공간은 푸르고 그곳에는 새가 날고 있지'
오늘은 뉴턴의 절대공간과 상대공간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지난시간 톨레미와 코페르니쿠스 그리고 갈릴레이가 살았던 시대의 패러다임을 보면서 갖힌 세계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면 이제 우주를 관측하는 것에서 넘어서서 우주에서 어떤 힘들이 작용하는지를 고민하는 시기까지 왔다. 물론 고전역학은 뉴턴의 역학에서 마무리를 하고 우주공간이 휘어있다는 상대성이론으로 넘어오면 현대물리학으로 넘어오게 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넘어서기 전에 공간에 대한 이해를 넓혀준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은 여전히 거대한 우주에서는 사용되는 면이 많다. 그러나 실제로 시간의 개념이 들어가고 중력의 편차가 생기면서 뉴턴의 이론도 조금씩 균열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차원은 4차원 이상이라서 3차원까지의 절대공간이 4차원인 시간을 만나면 다른 방식으로 변화되고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역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인식체계가 과학적 발견에 의해서 조금씩 혹은 거대하게 바뀐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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