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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철학일기

기계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정신의 힘

에밀 브레이어의 서양철학사_19세기 유럽사상사

by 낭만민네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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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브레이너의 서양철학사 강의를 듣고 있다. 프랑스철학의 관점에서 서양철학 전반을 돌아본다는 것은, 관념론도 아니고 경험론도 아닌 생생한 몸을 기반으로 관계를 본다는 것에서 다른 관점을 제시해본다. 오늘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전개된 유럽 철학의 주요 흐름들을 소개한다. 이러한 흐름에서 당시 과학적 결정론과 문화적 상대주의의 도전에 직면한 근대성의 위기에 대한 철학적 응답들이 전개된다. 먼저 신칸트주의는 칸트의 비판정신을 계승하여 철학의 중심을 존재에서 가치와 논리적 타당성으로 전환하는 것을 보게 된다. 마르부르크학파는 논리주의를 통해 인식의 객관성을 확보하려 했고, 바덴학파는 문화적 가치의 절대성을 주장하며 윤리적 기반을 재정립하고자 한다.


기계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정신의 힘


동시에 프랑스의 유심론은 기계론적 세계관에 맞서 인간 정신의 능동성과 자율성을 강조하며, 브룅슈비크의 합리적 유심론이나 랄랑드의 합리주의처럼 정신 활동을 과학적 지식과 도덕적 확신의 근원으로 삼는다. 이러한 흐름들은 정신(Geist/Esprit)의 활동을 통해 주관을 초월한 질서를 재확립하려는 시도로, 앞으로 이 장들에서는 이러한 가치론 및 합리주의적 경향을 구체적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이 장들은 실재(Realism) 개념이 복합적으로 해석되는 양상을 조명한다. 앵글로색슨의 실재론은 러셀과 무어를 중심으로 인식 대상의 주관 독립적인 존재를 주장하며, 분석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외부 세계의 객관성을 확립하려 한다. 이는 현상을 곧 실재로 보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반면, 독일에서는 후설의 현상학이 등장하여, 심리학주의를 비판하고 의식의 지향성을 통해 파악되는 논리적, 수학적 대상과 같은 이상적 실재(Ideal Reality)의 존재를 밝히고, 이후 셸러와 하이데거 등에게 영향을 주며 존재론적 탐구의 새로운 지평을 연다. 마지막으로 신토마스주의는 아퀴나스의 전통을 부활시켜 형이상학적 실재와 이성의 능력을 옹호하며, 종교적 기반 위에서 객관적 진리를 수호하려 한다. 이처럼 본 장들에서는 논리, 의식, 형이상학 등 다양한 차원에서 실재가 어떻게 이해되고 구성되었는지 탐색하는 다각적인 논의들을 소개할 것이다.



1. 마르부르크학파의 신칸트주의 (Le néokantisme de l'école de Marbourg)


에밀 브레이어의 서양철학사 제12장 철학적 비판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 독일 철학계의 주류를 형성한 신칸트주의를 조명하고 있다. 이 운동은 당대 자연과학의 발전과 그에 따른 기계론적 결정론에 대한 철학적 비판으로 시작된다. 칸트의 논리주의적 비판주의를 방법론적 근거로 수용하며, 철학의 중심 과제를 존재 자체의 탐구(형이상학)에서 인간의 인식과 가치의 타당성을 탐구하는 가치철학(Axiologie)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신칸트주의는 주로 마르부르크학파와 바덴학파라는 두 주류로 나뉘어 전개된다.


마르부르크학파는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에 집중하여, 논리학을 철학의 최우선 원리로 삼는 논리주의적 신칸트주의이다. 이 학파의 창시자인 헤르만 코헨(Hermann Cohen)은 논리학을 "지배하는 학문"으로 격상시키며, 자신의 주요 저서 순수 인식의 논리, 순수의지의 윤리학, 순수 감정의 미학을 통해 칸트의 세 비판서와 같은 순서로 철학 체계를 논리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그는 특히 수학적 사고방식에 주목하여, 미적분학의 핵심 개념인 무한소(Infinitesimal)를 단순한 수학적 기법이 아닌, 외연과 수에 선행하는 진실한 단위로 해석하며, 이 원리 속에서 보편적 논리의 기반을 찾으려 하였다. 이러한 주지주의적(Intellectualistic) 정신은 윤리, 미학, 종교 분야에까지 확대 적용된다.


파울 나토릅(Paul Natorp)은 스승인 코헨의 논리주의를 계승하면서도 플라톤 철학과의 접목을 시도한다. 그는 저서 플라톤의 이데아학설에서 사유(생각)와 존재(있는 것)의 통일성을 철학의 근본 문제로 제시하며, 이는 결국 인식의 논리적 근거를 확립하는 문제이다. 나토릅은 인식을 객관화의 방향과 순수 주체의 방향이라는 두 측면으로 분석했으며, 이는 당대 생철학의 주요 사상가였던 베르그송의 영향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에른스트 카시러(Ernst Cassirer)는 함수 개념과 기호 형식을 통해 칸트의 선험철학을 현대 과학에 맞게 심화 발전시킨다. 그는 새로운 시대의 철학과 과학의 인식에서 수학적 방법론이 물리학을 넘어 화학 등에 응용되는 과정을 분석하며, 인식의 대상이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관계와 생성 과정 속에서 파악되는 함수적 개념임을 주장한다.


마르부르크학파는 인식의 대상을 '존재하는 것(Sein)'이 아닌 '인식되어야 하는 것(Sollen)'으로 보며 타당성(Gültigkeit)의 문제를 중시한다. 아르투르 리베르트(Arthur Liebert)는 타당성의 문제를 통해 철학의 임무는 존재 자체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과 가치가 갖는 자기 가치 또는 타당성을 탐구하는 데 있다고 천명한다. 이는 마르부르크학파가 궁극적으로 인식의 논리적 타당성을 가치론의 핵심으로 삼았음을 보여준다. 한편, 루돌프 스탐믈러(Rudolf Stammler)는 경영과 권리, 법학 이론등을 저술하여 신칸트주의의 형식적, 비판적 방법론을 법철학 분야에 적용하고, 정의로운 법의 형식적 원리를 확립하려 시도한다.



2. 바덴학파의 신칸트주의 (Le néokantisme de l'école badoise)


바덴학파는 칸트의 실천 이성 비판에 초점을 맞추어 가치의 문제를 철학의 중심에 두는 학파이다. 마르부르크학파가 가치를 인식의 논리적 타당성으로 이해했다면, 바덴학파는 가치를 도덕적이며 사회적 규칙에 알맞은 것으로 정의하며, 가치를 당위(Sollen)의 영역으로 확립한다. 이 학파는 자연과학이 다루는 보편적 법칙(자연)과 달리, 철학이 다루어야 할 영역은 인간의 문화와 역사라는 가치 연관적(Wertbeziehung)이고 개별적인 영역임을 강조한다.


빌헬름 빈델반트(Wilhelm Windelband)는 철학입문 등에서 진실한 표상, 선한 행동, 아름다운 사물을 인간 "문화"의 세 가지 영역적 표상으로 제시한다. 그는 역사적 상대주의에 반대하며, 시대를 초월하여 문화 현상을 판단하는 절대적 가치들이 존재함을 역설한다. 그의 정신을 계승한 하인리히 릭케르트(Heinrich Rickert)는 가치와 실재의 관계를 더욱 명확히 한다. 그는 인식의 대상에서 가치가 우리가 경험하는 실재성(Wirklichkeit)과는 독립적이며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가치를 현상을 초월하는 당위적이고 초월적인(transzendent) 영역으로 확립하여, 가치론을 논리적 인식론이 아닌 초월적 가치론의 기반 위에 세우려는 시도이다.


바덴학파의 가치론적 경향은 다양한 학문 분야로 확산된다. 에른스트 트뢸치(Ernst Troeltsch)는 크리스트교의 절대성 등을 저술하며 신칸트주의의 가치론을 종교철학 및 역사철학 분야에 적용한다. 그는 기독교 가치의 역사적 상대성과 절대성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었다. 브루노 바우흐(Bruno Bauch)는 '자연법칙의 개념에 관하여'를 통해 인식론적 문제에 기여하고 있다. 또한, 미국에서 활동한 휴고 뮌스터베르크(Hugo Münsterberg)는 바덴학파의 가치론적 관점을 심리학 및 응용철학 분야로 확장하며, 신칸트주의의 영향력이 유럽을 넘어 확산되는 데 일조한다.


이 시기의 철학은 상대주의를 중요한 주제로 다루고 있다. 게오르크 짐멜(Georg Simmel)은 그의 저서 도덕과학 입문과 사회학에서 이러한 상대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그는 정신이 환경 속에서 선택의 능동적 행위자로서 나타난다고 보았으며, 삶의 모든 영역에서 회의적 주관주의를 견지하였다. 한편, 요하네스 폴켈트(Johannes Volkelt)는 경험과 사유 등의 저서를 통해 신칸트주의적 맥락에서 확신의 문제를 탐구한다. 그는 인식의 영역을 넘어선 초월주관적 실재성에 대한 직관적 확신을 주장하여, 주관적 확신과 객관적 진리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려 했다. 이들과 함께 오스발트 스펭글러 등이 이 시기 회의주의 운동에 참여한다.


이탈리아에서도 칸트 철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이는 이탈리아의 신칸트주의로 불린다. 대표적인 칸트 연구가로는 방대한 연구서 칸트를 저술한 카를로 칸토니(Carlo Cantoni)가 있으며, 바르젤로티와 치아벨리 등도 이 흐름에 참여한다. 한편, 코펜하겐 대학의 교수였던 하랄드 회프딩(Harald Høffding)은 회프딩의 상대주의를 전개한다. 그는 도덕론, 종교철학, 심리학개론 등 다양한 저술을 남겼으며, 세계관을 기계론과 생기론이라는 두 경향성 사이의 대립으로 파악하고, 이러한 대립적인 관점들을 조화시키려는 시도를 한다.



3. 프랑스 합리주의와 유심론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는 진화론적 결정론을 주장한 스펜서 등에 맞서 유심론(Spiritualisme)이 강력하게 전개된다. 이 유심론은 정신의 자유와 능동성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알프레드 푸이예(Alfred Fouillée)는 자유와 결정론에서 모든 이념(toute idée)은 곧 어떤 힘(une force)이며, 이 힘이 의식적 사실들의 특성으로서 직접적으로 파악된다고 주장한다. 라베송은 "이념"을 통해 유심론적 실증주의를 전개하며, 샤를 뒤낭은 생명과 정신을 연결하며 정신적 삶을 "분석할 수 없는 인식, 즉 신적인 도취"로 설명한다. 또한, 쥘 라뇨(Jules Lagneau)는 스승인 라슐리에의 영향으로 반성적 분석을 철학적 모델로 삼았으며, 제자인 알랑(샤르띠에)에게 영향을 준다. 이들은 예술(세아이유, 수리오)과 도덕(라뇨의 도덕행동연합)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정신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레옹 브룅슈비크(Léon Brunschvicg)는 과학의 역사를 통해 정신의 활동을 규명하려 한 프랑스의 유심론자이다. 그는 판단의 양상론을 시작으로, 정신의 활동(mentalité)이 과학들 속에서 발현되는 과정을 분석한다. 수학 철학의 제 단계에서 그는 관념을 플라톤과 데카르트의 맥락에서 발생과 방법의 관점으로 파악하며, 정신을 정적인 개념이 아닌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주체로 본다. 인간의 경험과 물리적 인과성에서는 순수 물리학이 기하학으로 변환되는 것을 정신의 작용으로 설명한다. 자기 인식에 대해에서 그는 도구인(Homo faber)의 제작 활동부터 과학, 도덕성에 이르기까지 정신의 인식이 관여함을 강조한다. 그의 유심론은 라베송 등의 생기론과 달리, 정신의 우위를 합리적 활동에 두며 이와 결정적인 단절을 보인다.


앙드레 랄랑드(André Lalande)는 프랑스 합리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물리학과 도덕에서 진화에 대립된 해체의 관념을 통해 당시 유행하던 진화론적 관점에 맞선다. 그는 까르노-클라지우스의 법칙처럼 정신적 활동도 단순화되고 동화되는 동화작용(assimilation)으로 진행된다고 보며, 이는 메이에르송의 생각과 같다. 또한, 그는 스티르너의 개인주의적 무정부주의에 대립한다. 한편, 에드몽 고블로(Edmond Goblot)는 과학들의 분류에 관한 시론, 가치 판단들의 논리 등의 저술을 통해 논리학 분야에 기여했으며, 지그바르트의 영향을 받아 논리학은 심리학의 일부라는 입장을 취한다. 이 외에도 폴 라삐, 도미니크 빠로디, 르네 르센 등이 프랑스 합리주의의 맥락에서 활동한다.


프레데릭 로(Frédéric Rauh)는 도덕 경험을 심리학적, 철학적으로 탐구한 학자이다. 그는 저서 감정심리학에서 방법에 대하여와 도덕경험을 통해 도덕적 확신과 과학적 확신을 비교한다. 로는 이 두 종류의 확신이 정신의 태도 상으로는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는 도덕적 판단과 과학적 판단 모두 경험적 근거와 확신이라는 공통된 정신적 기초를 가지고 있음을 보이려는 시도이다.


제12장 철학적 비판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주요 철학적 흐름인 신칸트주의, 상대주의, 그리고 프랑스 유심론을 다루고 있다. 신칸트주의는 크게 두 학파로 나뉘는데, 마르부르크학파(코헨, 나토릅, 카시러 등)는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에 집중하여 논리주의와 인식의 타당성을 모든 학문의 근간으로 삼은 반면, 바덴학파(빈델반트, 릭케르트 등)는 실천 이성 비판에 근거하여 가치철학을 중심으로 전개하며, 가치를 도덕적 당위이자 실재성을 초월하는 절대적 영역으로 규정한다. 이 두 학파는 과학의 결정론에 비판적이며, 철학의 과제를 존재 탐구에서 가치 탐구로 전환하였다. 한편, 이탈리아 신칸트주의와 회프딩의 상대주의도 이 시기 학계에 기여하였으며, 특히 짐멜은 회의적 주관주의를 바탕으로 상대주의를 수용하고 발전시킨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프랑스 유심론은 스펜서의 진화론적 결정론에 대항하며 정신의 자유와 능동성을 강조한다. 푸이예는 모든 이념이 곧 힘이라고 주장하며, 라베송 등은 유심론적 실증주의를 전개한다. 특히 레옹 브룅슈비크는 과학의 역사를 분석하며 정신의 활동을 합리적 작용으로 보고 생기론적 유심론과 단절한다. 앙드레 랄랑드를 중심으로 한 합리주의는 정신 활동이 동화작용으로 진행됨을 주장하며, 프레데릭 로는 도덕적 확신과 과학적 확신이 정신의 태도 상 다르지 않음을 보이며 경험을 통한 확신의 기반을 찾으려 한다. 이 모든 사조들은 당대의 지적 혼란 속에서 이성과 가치의 토대를 새롭게 정립하려는 시도였다.



4. 앵글로 색슨의 실재론 (Le réalisme)


앵글로색슨의 실재론은 인식 행위와 주관으로부터 대상이 독립적으로 존재함을 주장하는 신실재론(New Realism)의 강력한 흐름이다. 러셀(Bertrand Russell)은 실재론의 입장에서, 참된 인식이란 대상이 주체의 개입 없이 무매개적으로(immediately) 의식에 현전(presence)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화이트헤드(A. N. Whitehead)와 함께 수학의 원리를 저술하며 논리적 원리를 실재론의 기반으로 삼았으며, 철학의 제 문제들 등에서 지식의 분석을 통해 대상의 객관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무어(George Moore) 또한 분석철학의 방법론을 사용하여 인식 대상의 객관적 실재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으며, 특히 윤리학에서 '좋음'과 같은 가치 개념이 주관적 느낌이 아닌 직관으로 파악되는 객관적 속성임을 주장한다.


이 시기 실재론자들은 인식 주체와 대상 간의 관계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스타우트(George Stout)는 마음과 물질에서 "관계들이 내적인가 외적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며, 인식 관계가 주체의 내재적인 경험인지, 아니면 외부적으로 존재하는지에 대한 논의를 촉발한다. 한편, 사무엘 알렉산더(Samuel Alexander)는 공간과 시간에서 지각 대상을 각성(awareness)으로, 주체의 내면적 경험을 소유를 즐김(enjoying)이라고 부르는 독특한 용어를 사용한다. 존재 전체를 공간-시간의 발생 과정으로 보는 과정 존재론적 실재론을 제시한다. 이는 러셀의 원자론적 실재론과는 구분되는 독자적인 실재론 노선이다. 또한, 윌든 카(Wildon Carr)는 모나드론과 상대성이론을 연결하며 실재론을 새로운 과학적 패러다임과 결부시키려 시도한다.


앵글로색슨 실재론은 대륙을 넘어 미국에서도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미국의 신실재론자들은 새로운 실재론을 공동 집필하며, 의식의 대상이 주관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비판적 실재론을 넘어선 급진적 실재론을 주도한다. 이 흐름은 존 브로더스 왓슨(John Broadus Watson)이 제시한 행동주의와도 연결된다. 행동주의는 인간의 심리적 현상을 관찰 가능한 외적 행동으로만 설명하려 했으며, 이는 의식 내부의 주관적 요소를 배제하고 객관적 실재만을 인정하려는 실재론적 태도와 맥을 같이한다. 이처럼 영미권의 실재론은 분석적 명확성을 추구하며, 과학적 방법론과 심리학적 접근 방식에까지 그 영향을 확장한다.



5. 독일 실재론: 후설의 현상학적 실재와 존재론적 탐구


독일 철학에서 후설(Edmund Husserl)의 현상학(Phénoménologie)은 인식의 대상에 대한 독자적인 이상적 실재론을 전개한다. 후설은 논리 탐구를 통해 당시 논리학을 심리 현상으로 환원하려 했던 심리학주의를 강력히 비판한다. 그는 논리학과 수학의 대상들(개념, 수 등)이 주체의 심리적 경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유클리드 기하학의 대상처럼 객관적이며 수적으로 동일성을 유지하는 이상적 존재임을 확립한다. 이러한 구성적 대상은 현실의 대상은 아니지만, 사유의 독립적인 기준을 형성하는 추상적 실재이며, 마흐나 바이힝거가 이 동일성을 단순한 허구로 본 것과 대립된다.


후설은 의식의 본질적 특징인 지향성(Intentionalité), 즉 의식이 항상 “...로 향하는 방향”을 가지고 대상을 구성함을 분석하고, 참된 인식을 단순한 수용이 아닌 "의도의 완수(Erfüllung, 충족)"라고 정의한다. 이 지향성을 통해 의식의 대상이 어떻게 독립적인 기준을 형성하는지 탐구한다. 후설에게 현상학은 경험에 독립적인 선천적인 직관인 본질 직관(Wesensschau)을 통해 이상적 항들(본질)을 포착하는 본질의 과학이다. 그는 데카르트 성찰과 파리의 강연에서 자신의 사유와 데카르트의 명석 판명한 사유가 유사함을 인정하며, 논리 계산과 산술 계산을 동일하게 취급하는 보편학(Mathesis univeralis)의 이상을 제시한다. 현상학은 심리학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의식의 순수한 작용에 대한 순수 심리학적 서술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


후설의 현상학적 방법론은 이후 독일 철학의 주요 흐름을 형성하며 확장된다. 막스 셸러(Max Scheler)는 현상학을 가치론에 독창적으로 적용하여 칸트의 도덕적 형식주의를 극복하고 실질적 도덕 선천주의를 구축하며 가치의 위계를 종교성까지 확장시킨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후설의 현상학을 근본 존재론으로 전환하여, 인간의 현존재(Dasein)가 자료와 함께 세계내 존재(Sein-in-der-Welt)로서 현실적이고 실재적인 존재임을 탐구한다. 또한, 하르트만(Nicolai Hartmann)은 존재론의 기초 등을 통해 비판적 실재론에 기초한 방대한 존재론을 구축하며 실재의 다양한 층위와 구조를 분석한다. 한편, 렘케(Johannes Rehmke)는 기초과학으로서 철학에서 후설의 관념론적 요소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객관적 실재론을 제시한다.



6. 신토마스주의의 실재론


신토마스주의의 실재론(Le réalisme néothomiste)은 19세기 말에 시작되어 20세기 초에 활발해진, 중세 스콜라 철학의 대성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을 현대적으로 부활시키고 재해석한 흐름이다. 이 실재론은 가톨릭 교회의 지원 아래 발전했으며,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의 존재를 확고히 인정하고, 인간의 이성이 세계의 본질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전통적인 입장을 고수한다. 이는 당시 유행하던 비판철학(신칸트주의)의 관념론적 경향과 상대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종교적, 철학적 대항이었다. 독일에서는 프르찌바라와 같은 예수회 소속 가톨릭 학자들이 아퀴나스의 사상을 현대 학문과 연결시키려 노력한다.


신토마스주의는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중세 철학 전문가인 에티엔 질송(Étienne Gilson)을 비롯하여 세르띠양쥬, 가리구-라그랑쥬 등이 아퀴나스의 존재론적 실재론을 현대 철학의 문제 상황에 적용하여 그 형이상학적 기반을 강화하려 했다. 질송은 특히 토마스적 존재론의 특징을 현대 철학에 부각시키는 데 집중한다. 벨기에의 조셉 마레샬(Joseph Maréchal) 신부는 루방 가톨릭 대학교수로서 활동했는데, 그는 아퀴나스의 사상을 칸트의 선험철학과 대화시키려는 독창적인 시도를 한다. 마레샬은 이성의 지향적 활동을 통해 칸트의 비판철학과 토마스주의의 형이상학적 실재론을 연결할 수 있는 접점을 찾으려 했다.


신토마스주의의 실재론은 추상적 개념이나 논리적 항목이 단순한 주관적 허구나 언어적 기호가 아니라, 외적 실재에 근거를 둔 진정한 존재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이는 지성이 파악하는 보편자(Universals)가 사물 속에 존재하거나(실재론적 입장), 적어도 사물을 통해 파악되는 실재적 의미를 지닌다는 전통적인 해석에 기반한다. 이러한 운동은 종교적 신앙과 형이상학적 확신 위에서, 당시 과학주의와 상대주의로 인해 위협받던 객관적 진리와 도덕적 가치의 기반을 재정립하려는 강력한 노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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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철학적 논의는 과학적 결정론과 상대주의의 도전에 맞서 인간의 정신(Geist/Esprit)과 가치의 토대를 복권하려는 시도였다. 신칸트주의(마르부르크학파와 바덴학파)는 칸트의 비판철학을 계승하여 철학의 중심을 존재 탐구에서 가치철학(Axiologie)으로 이동시킨다. 마르부르크학파는 논리적 타당성을, 바덴학파는 도덕적 당위를 가치의 근거로 삼으며, 두 흐름 모두 주관을 넘어선 초월적 혹은 이상적 질서를 확립하려 한다. 프랑스의 유심론 역시 푸이예의 '이념=힘'이나 브룅슈비크의 '과학적 활동으로서의 정신' 분석처럼, 생기론적 경향이든 합리주의적 경향이든 인간 정신의 능동성과 자율성을 강조하며 기계론적 세계관에 맞선다. 이러한 흐름들은 정신의 활동 자체를 객관적 실재를 형성하는 근원으로 보고, 과학적 지식뿐만 아니라 윤리적, 문화적 영역까지 포괄하는 인식의 통일적 기반을 재구축하려는 근대성의 마지막 시도였다.


'실재(Realism)' 개념은 이 시기에 다양한 해석을 낳으며 다층적으로 전개된다. 앵글로색슨의 신실재론(러셀, 무어)은 인식 대상이 주관과 무매개적으로 독립되어 존재함을 주장하며, 분석적 명료성과 과학적 객관성을 통해 실재를 파악하려 한다. 이는 현상을 곧 실재로 보는 현실론적(Actualistic) 경향으로 나타난다. 반면, 독일의 현상학(후설)은 심리학주의를 비판하고, 의식의 지향성을 통해 파악되는 논리학적, 수학적 대상과 같은 이상적 실재(Ideal Reality)의 존재를 확립한다. 후설의 현상학은 이후 셸러의 가치론이나 하이데거의 세계내 존재 탐구로 확장되며, 실재를 의미의 구조나 구체적 현존재의 맥락에서 파악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신토마스주의는 아퀴나스의 전통을 부활시켜 이성이 객관적, 형이상학적 실재를 파악할 수 있다는 확신을 재천명하며, 근대적 도전에 맞서 종교적·형이상학적 기반 위에서 실재를 수호하려 한 것이다. 결국 이 모든 실재론적 논의는 실재가 단순히 외부의 물질적 대상이 아니라, 이상적(논리/가치), 지향적(의식), 또는 형이상학적(신학) 차원에서 복합적으로 구성되거나 파악되어야 한다는 실재 개념의 변용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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