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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과학일기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

노버트위너와 사이버네틱스의 고뇌_4장_feat. 케서린헤일스

by 낭만민네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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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네틱스(Cybernetics)는 1940년대 중반, 제2차 세계대전 중 고안된 대공포 사격 통제 시스템 연구를 배경으로 태동하여 1948년 노버트 위너의 기념비적인 저서 '사이버네틱스'를 통해 공표된 다학제적(Interdisciplinary) 과학 분야이다. 이 학문은 생물학, 공학, 수학, 사회학 등 이질적인 분야를 제어(Control), 통신(Communication), 그리고 정보(Information)라는 세 가지 핵심 개념으로 통합하는 메타디서플린(Metadiscipline)을 제안했다. 사이버네틱스는 단순한 기술적 진보가 아니라, 17세기 뉴턴 역학 이래로 서구 지성사를 지배해 온 라플라스적 결정론(Laplacian Determinism)의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뒤집는 혁명적인 철학적 토대를 제공했다.


사이버네틱스는 제어, 커뮤니케이션, 정보를 통합된 시스템으로 개념화한다. 더 나아가 인간 주체의 경계가 사실은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통해 사이버네틱스와 관련된 주제가 가진 혁명적인 잠재력을 제시한다. 예를 들면, 그레고리 베이트슨의 경우 시각 장애인의 지팡이가 주변 환경 정보를 전달하여 사람과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된다는 사이버네틱스적 관점을 설명하고 있다. 보청기, 음성 합성 장치 등 장애 보완 장치에서 일반 기능 향상 장치로 확장되며 개념적 한계를 설정하기 어렵다. 이것에 더해서 도나 해러웨이는 '사이보그 선언문'에서 사이보그가 인간/기계, 인간/동물, 생물/무생물의 구분을 어지럽히는 기존 범주 파괴 잠재력을 가진다고 논한다. 후반부에 더 자세히 알아보겠지만, 사이보그는 경계 침범의 이면에 있는 "쾌락적일 만큼 밀접한 짝짓기"로 불안감과 에로틱한 환상을 동시에 유발한다는 점도 생각해볼 문제이다. 특히 상상계 영역에서 사이버네틱스는 신체 경계를 마음대로 정의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사이보그는 신체적 경계 논쟁의 무대가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결국 이번 장의 중심 인물인 노버트 위너로 넘어가야 한다.


민네이션 : 자크라캉의 상상계와 상징계, 실재계의 구분에서 보면 사이버네틱스는 상상계의 혼종성을 만들어낸다고 볼 수 있다. 라캉의 논의에 의하면 상상계는 실재계와 연결되어서 '언어'라는 상징계로 드러난다. 이렇게 본다면 인공지능의 발전에 있어서 LLM이 나왔다는 것은 우연한 연결성이 아니라 필연적인 결론이라고 볼 수 있다. 이후에 사이버네틱스의 개념에 의하면 피지컬AI의 도입으로 비로소 상상계-상징계-실재계를 모두 갖는 새로운 존재가 태어난다. 위너는 이러한 측면을 조망하면서 그것이 가능해지는 것은 상상계에서 이미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새로운 '유물'들이 새로운 '존재'를 만든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신체에 대한 이미지와 그 한계는 우리가 사고하는 지적 영역에 영향을 준다. 신체가 바꾸거나 재정의할 수 있는 구성체가 되면, 지식 체계 역시 인간의 신체처럼 불가피하지 않은 구성체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사이버네틱스는 신체를 정보 시스템으로 바꾸는 동시에 지적 영역의 지도를 다시 그리는 정보 과학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경계작업'과 같이 사이버네틱스에 관한 논의를 꺼내는 사람들은 기존 학문의 경계를 허무는 만능 해결책이라고 주장했다. 사이버네틱스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노버트 위너는 경계 허물기로 인한 인간 존재에 자유함에 대한 황홀과 반대로 인간존재의 불안을 모두 보였다. 이러한 고민의 결심이 '사이보그; 구성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위너는 인간과 기계를 동등하게 만드는 방법을 상상하는 동시에,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의 가치(일관적이고 이성적인 자아 등)를 강하게 주장하는 모순에 갇혀 있었다. 그는 사고 기계로서의 컴퓨터를 예언했지만, 기계가 인간의 주인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또한, 뇌엽 절리술을 반대하고 군 관련 연구를 거부하는 등 휴머니즘적 가치에 영향을 주고 받았다. 아이러니 하게도 위너는 사이버네틱스로 효과적인 살인 기계를 만드는 데 기여하면서도, 기계를 휴머니즘적 자아의 확장으로 상상하여 인간 주체를 위협하지 않도록 하려고 애썼다.

자기 조정 기계와 자유주의적 주체성의 훼손

오토 마이어는 스스로 조정하는 기계와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의 유사성이 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증명했다. 자동 조정 개념은 권위주의적 통치에서 자유주의적인 자기 조정과 민주주의로 넘어가기 위한 도구였다.

애덤 스미스의 자기 조정 시장처럼, 스스로 조정하는 시스템이라는 생각은 자율적이고 자기 조정적인 주체로서의 자유주의적 주체 개념을 만들어 냈다. (홍기빈이 번역한 '거대한 전환'에서는 이러한 자기조정 시장이 망상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시간이 흘러 이러한 자기조정이라는 개념은 20세기 중반,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자기 조정 기계, 소유적 개인주의라는 시대정신과 불안한 동맹을 맺고 사이보그의 탄생을 거들었다. 이것은 계속 논의하는 것처럼 유도한 효과와 동시에 자유주의적 주체성의 근본을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필립 K. 딕은 자신의 소설에서 '합리적인 사이버네틱스 기계에게 스스로를 소유하도록 허락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면서, 사이보그가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의 관점에서 존재로 인정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던졌다.


위너의 글은 여러가지 비판을 낳았다. 특히 일부 특권층 대변한다거나, 구조적 불평등 은폐하거나,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와 긴밀하게 공모한다는 등의 '자유주의의 평판'을 떨어뜨린다고 볼 수 있는 단서들을 보여주었다. 위너는 경직된 기계 개념을 통해 억압, 군사주의, 인간 환원 같은 부정적 가치들을 격리시키려 했지만, 자신의 프로젝트와 거리를 두는 제한적인 비판에 그쳤다. 위너는 자동화 공장으로 인한 대규모 경제적 추방을 예견했으나, 어떤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고 기계가 우위를 차지하도록 놔둬서는 안 된다는 진부한 말만 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위너는 사이버네틱스 패러다임과 자유주의 전통을 조화시키려 했다. 이러한 시도는 지금도 실행되어야할 시도이기는 하다. 그러나 캐서린 헤일스의 상상처럼 위너 자신이 사이보그임을 깨닫고 공포에 질려 물러서는 위너가 인공지능이라는 것에 놀라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면 위너의 주장이 강렬한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이러한 논의의 근본에는 위너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있다. 위너는 세상이 확률적이어서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유연하고 자기 조정적인 제어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제어 시스템의 필요성은 뉴턴주의적 예측성을 비웃는 시스템에서 시작되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가 양자영역에서 나타난 것처럼, 확률적인 세상에서 인과적이고 필연적인 세계관이 맞지 않는다는 지점을 발견한 것이다. 위너의 초기 확률 연구에서부터 항상성의 재도입, 확률적 우주에 대한 신뢰에서 나온 정보의 구성, 노이즈와 죽음의 연결, 그리고 유추적 사고와 같은 접근으로 기존의 논의를 뒤집는다. 특히 유추적 사고는 서로 다른 구조들의 패턴 유사성을 밝히며 위너가 상상하던 사이보그 구성을 도왔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생물학을 포기할 정도로 자신의 몸을 잘 못 관리했던 위너의 신체적 특징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추측이 있다. 어쨌든 확률과 분포로 이야기를 넘어가보자.




1. 분자와 인간_사이버네틱스와 확률


사이버네틱스는 브라운 운동, 즉 분자들의 임의적인 운동에 대한 노버트 위너의 초기 연구에서 비롯되었다. 개별 분자의 행동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확률적 통계가 필요하다. 불확정성 원리는 지식의 한계를 더한다. 위너는 브라운 운동의 불규칙한 운동이 동질하다는 에르고드 가설을 조지 데이비드 버코프의 뒤를 이어 더욱 정밀하게 만들었다. 위너는 윌러드 기브스가 확률 이론의 심오한 함의를 실현하여 20세기 물리학 최초의 대혁명을 개시한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위너는 이미 물리적 측정은 결코 완벽히 정확할 수 없으므로 초기 조건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초기 위치와 운동량이 완벽히 정확하게 알려졌을 때가 아니라 얻어 낼 수 있는 만큼의 정확성에 이르렀을 때 우리가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었다.


기브스의 접근법은 수많은 입자에 대한 확률이 아니라, 서로 다른 초기 조건이 시스템을 어떻게 다르게 진화하게 만드는지 생각하기 위해 확률을 사용했다. 이는 라플라스의 결정론적 우주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위너는 기브스가 '우리의 환경 중 일부 질문들에 가능한 해답을 줄 수 있는 모든 세계'를 생각했다고 보았다. 위너는 이 관점이 사이버네틱스라는 새로운 과학의 핵심에 놓여 있다고 주장했다. 위너는 세상이 가능한 수많은 세상들 중에서 실현된 하나의 진화라고 생각하는 확률 이론의 관점을 정보에도 적용했다. 그는 클로드 섀넌 등과 독립적으로 연구했지만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


위너는 정보를 보낼 수 있는 수많은 메시지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확률 함수라고 정의했다. 이는 기브스의 아이디어를 어받아 세계를 언어로 대체한 것으로, 가능한 메시지들의 불협화음 속에서 하나의 메시지가 생겨나는 것이다. 위너는 이러한 이론의 성공이 현실의 근본적인 무언가를 표현하며, 언어와 세상 모두 본질적으로 확률적이라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정보 이론의 구조적 측면을 축소하는 해석이지만 확률적 세계관을 커뮤니케이션 이론으로 능동적으로 확장한 것이 되었다. 위너는 이러한 미시세계와 거시세계 모두에 통용될 수 있다는 확률적인 관점이 보편적인 관점이라고 생각했다. 더 나아가 유한하고 불완전한 생명체인 우리가 우주를 아는 방식을 반영하기 때문에 성공할 것이라고 믿었다.


후기 정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그러니깐 유튜브와 다양한 LLM의 정보의 홍수 속에서 커뮤니케이션제어가 가장 필요할지 모른다. 오히려 제어를 커뮤니케이션의 한 형태로 해석하는 것은 당연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하는데에는 또한 복잡한 역사가 존재한다. 제임스 베니거에 따르면, 제어의 형태는 기계적 제어에서 열역학적 제어로, 그리고 정보적 제어(사이버네틱스 메커니즘)로 변해왔다. 기계적 정보 교환에서는 결정론이 대두되었지만, 브라운 운동이 활발한 용광로가 된 불확정성의 원리는 사람들을 새로운 관점인 확률로 연결시켰다. 정보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작은 관심 범주에 있던, 상태에 대한 무지를 뜻했던 확률은 커뮤니케이션 활동의 근본적인 특징이 된다. 새로운 제어 메커니즘은 이전 형태를 소멸시키지 않고 남아 있었으며, 제어 메커니즘의 특성 변화에 따라 구분되며, 이는 기계가 수행한다고 생각되는 정보 교환의 종류에 따라 결정된다.


유추적 사고와 관계를 통한 의미 구성

사이버네틱스 제어 이론으로의 이행은 이론과 인공물, 연구와 연구자 사이의 피드백 루프에 의해 이루어진다. 위너의 가정은 확률적 세계관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메시지는 물자체로서가 아니라 요소들의 상대적 차이를 통해 구성, 측정, 소통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커뮤니케이션은 본질이 아니라 관계에 대한 것이다. 위너의 글에서 가장 중요한 수사적 장치는 유추이다. 커뮤니케이션을 관계로 이해하면 유추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관계를 통해 의미를 구성하는 강력한 개념 양식이다.

유추는 위너의 수학부터 블랙박스 공학, 행동주의적 철학 옹호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작용 요소이며, 유추가 없었다면 사이버네틱스라는 학문 분야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유추를 통해 사이버네틱스 담론의 작인을 구성하면 본질에 대한 질문을 교묘하게 회피하게 되는데, 대상이 다른 대상과 물질적 차이나 특성이 아니라 오직 관계를 통해서만 구성되기 때문이다.

위너는 포스트구조주의 이론의 일부 측면들을 예측하며, 인간, 동물, 기계가 담론과 커뮤니케이션의 장 안에서 그것들을 구성하는 관계망 이외에 자체적으로 갖는 '본질적인' 특성이 있는지를 물었다.

유추를 이용하는 방식은 사이버네틱스와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를 조화시키려는 그의 시도에 새로운 빛을 비춰준다.

의미가 관계를 통해 구성된다면, 인간과 기계를욘결하는 것은 이미 존재하던 두 대상의 조화로운 관계 이상이며, 유추는 둘의 관계를 확실히 밝히는 과정을 통해 양쪽 모두를 구성하는 것이다.




2. 경계 넘나들기_ 모든 것은 유추이며, 이 진술도 마찬가지다


위너는 폐렴으로 인한 환각 상태에서 육체적 고통, 외부 자극, 수학적 추상 작용을 구분할 수 없게 되면서 중요한 통찰을 얻었다. 그는 고통과 수학적 긴장을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느꼈다. 위너는 거의 모든 경험이 해결되지 않은 수학적 상황의 일시적 상징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깨달았으며, 수학은 그러한 부조화를 반영구적이고 인식 가능한 것으로 환원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인식은 위너가 수학을 감정적 갈등으로 나타내는 유추 사용의 한 방식이었다. 위너는 수학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거대한 은유이며, 지성적 측면뿐 아니라 미학적으로 성공했는지 여부에 따라 판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개인적 갈등과 개념 문제를 너무 강력하게 동일시했기 때문에, 갈등이 자신을 수학으로 '몰고 간다'고 인식했으며, 이는 아버지의 속박에서 벗어난 후 스스로 동기를 찾으려던 그의 심리적 역동성과 관련이 있다.


유추와 경계 작업의 관계

유추는 비유로서 경계를 넘나들면서 힘을 얻으며, 경계가 없다면 그 연관성은 혁신적인 힘을 잃는다. 위너에게 유추와 경계 작업은 한 세트였다.

위너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반유대주의적 태도로 인해 소외감을 느끼고 평생 내부/외부를 나누는 반응을 보였으며, 자신을 특권층의 경계 밖에 있는 외부인으로 묘사했다.

그의 과학적 연구에서도 경계 문제는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환각 상태 당시에 몰두했던 연구는 물리적 불연속성 주변의 전기장에서 일어나는 일과 관련된 경계 문제였다.


위너는 후기 사이버네틱스 연구에서 경계 형성과 유추적 연관성을 결합하여 동물, 인간, 기계를 동일한 사이버네틱스 시스템으로 다룰 수 있는 담론의 장을 만들었다. 줄리언 비글로, 아르투로 로젠블루스와 함께 쓴 '행동과 목적, 목적론'(1943)은 사이버네틱스의 의제를 제시한 주요 선언문이다. 이 글은 내부 구조보다는 유기체와 환경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행동주의적 접근법을 통해 블랙박스 엔지니어링으로 나아간다. 블랙박스 엔지니어링은 유기체를 내용물이 알려져 있지 않은 '블랙박스'로 가정하므로, 같은 행동을 만들어내는 것은 같은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이는 인간과 기계가 비슷한 행동을 하므로 본질적으로 비슷하다는 주장을 이끌어낸다. 저자들은 질적으로 독특하고 고유한 특징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저자들은 목적을 가진 행동에 초점을 맞추어 경계를 형성하면 기계와 살아 있는 유기체 양쪽에 동일한 행동주의적 분석을 적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동일시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유기체의 입장에서 봤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숨긴다.(비유기체의 관점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들뢰즈가 말하는 것처럼, 인간 외부는 모두 무의식인데 말이다) 글은 목적(목표를 향한 행동)과 목적론(부적 피드백으로 성취된 목표)이라는 용어를 재도입하며, 목적론적 행동을 단순히 '부적 피드백에 의해 제어되는 행동'으로 정의한다. 이러한 재도입은 기계에도 의미가 존재할 수 있음을 함축하며, 행동주의 프로젝트에 우주적 차원을 암시한다. 저자들은 그들의 목적론이 뉴턴의 인과율과 기독교의 목적론의 논쟁을 새로운 장으로 옮기면서, 중요한 긴장 관계를 목적과 임의성 사이의 긴장으로 규정한다. 부적 피드백을 통해 목적을 성취하는 것은 목표를 추구하는 장치가 확률적 우주를 다루는 방법이다. 사이버네틱스는 이러한 재도입과 유추적 관계를 통해 기브스적 우주론을 배경으로 한 철학이 되었다.




철학자 리처드 테일러는 위너 등의 선언문이 '목적'의 의미를 지나치게 확장했거나, 인간 관찰자의 추측을 기계에 몰래 끌어들였다고 비판했다. 그는 블랙박스 엔지니어링이 상자를 연 다음 만들어낸 특징을 다시 블랙박스 안에 넣었을 수도 있음과 같이 발생하는 문제점을 지적하려 했다. 위너와 로젠블루스는 반박문에서 자신들이 과학자 담화 공동체에 호소하고 있다며, 자신들의 분석을 철학자의 '사소하고 쓸모없는' 언어 분석과 구분했다. 테일러가 제시한 비목적론적 행동의 예에 반박하기 위해 위너와 로젠블루스는 내부 구조를 논의해야 했으며, 이는 원래 글이 피하려고 했던 행동주의 원칙에 거슬러 내부 구조의 상이성을 이용해 행동을 분류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처럼 행동과 내부 구조에 번갈아 초점을 맞추는 수사적 전략은 제프 보커가 지적한 내용이 없는 사이버네틱스(메타과학)와 내용이 풍부한 사이버네틱스(실체)를 교대로 사용하여 학제에 침투하고 영역을 유지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구조가 없는 사이버네틱스는 내부구조를 없앰으로써
인간과 기계를 연결시키고, 구조가 풍부한 사이버네틱스는
정보흐름과 부적 피드백을 중요한 구조적 요소로 제시한다


당시 사이버네틱스에 대한 비판은 '단순한 유추'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위너는 '유추의 본질'(1950년 미완성 원고)에서 유추를 강력하게 옹호하며 논쟁을 새로운 단계로 가져간다. 위너에게 유추는 단순한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접근할 수 없고 지각만 할 수 있는 유한한 존재인 우리에게 유일하게 가능한 의미 작용을 만들어내는 시스템이다. 위너는 언어란 아리스토텔레스적 본질의 전달이 아니라, 청자가 화자의 경험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해석하는 범주의 구성을 통해 항상 유추적이라고 보았다. 이는 소쉬르의 라 랑그와 유사하며, 커뮤니케이션을 확률 우주에서 일어나는 확률적 행동으로 본다. 감각적 인식 또한 현실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감각 양태와 신경 인터페이스를 넘나들며 패턴을 유지시키는 변화에 달려 있다. 인식, 수학, 정보 모두 내용보다 패턴에 집중한다. 유추는 데이터가 경계를 넘나들게 해주는 보편적인 교환 시스템이며, 본질로 파악되기보다는 관계를 통해서 (재)구성되는 현실의 공통어다. 위너가 설계한 '보청 장갑'처럼 인공 기관 역시 음향 주파수를 촉각 기호로 변환시키는 등 정보를 한 양태에서 다른 양태로 전환시키므로 유추를 통해 작동하는 것이다.


위너가 생각하는 사이버네틱스는 본질이 아니라 관계에 있다


위너의 접근법의 문제는 생명 시스템과 기계 시스템 사이에 유추적 관계를 상정한 것이 아니라, 신체화된 물질성 내의 아주 현실적인 차이, 즉 유추로 표현되지 않는 차이를 지워버리는 경향이었다. 그는 두 가지 상황에 맞닥뜨리면 특수성보다 패턴의 유사성이 분명히 드러나는 추상적 차원으로 이동하는 경향이 있었다. 위너는 실험실 작업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자신의 빠른 정신과 느린 몸의 불일치에서 오는 초조함 때문이었다. 그는 실험의 세세한 사항을 견디지 못했으며, 유추를 강조하는 것은 신체와 결별하는 것과 같았다. 이는 열렬한 실험주의자였던 매컬러와 대조된다. 위너는 사이버네틱스를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를 강화하는 드라마에 새겨 넣고자 했다. 이 드라마는 확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위너는 확률을 정보와 연결시킴으로써 혼돈과 질서라는 우주론적 드라마에 사이버네틱스 주체를 포함시킬 수 있었다. 그는 이러한 우주적 차원에서 자율적인 주체를 강화하는 '좋은' 사이버네틱스 시스템과 자율성을 훼손하는 '나쁜' 기계를 윤리적으로 구별했다. (터미네이터가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거대한 싸움에서 중요한 요소는 복잡한 역사를 가진 엔트로피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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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엔트로피의 문화적 중계_열기관에서 정보로


열역학 제1법칙(에너지 보존, 에너지는 만들어지지도 파괴되지도 않는다)과 제2법칙(엔트로피 증가, 퇴보는 끊임없이 쇠퇴해가는 우주를 상정한다) 사이의 긴장은 세기 전환기의 문화 형성에 중심 생각처럼 작용한다. 셀처에 따르면, 이 긴장 자체가 열역학 교환기 역할을 하여 생산과 재생산, 기계와 신체처럼 모순적인 용어들을 연결한다. 신체는 에너지를 순환시키고 저하시킨다는 점에서 열기관과 같지만, 에너지를 활용하여 스스로를 고치고 재생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러한 비교는 반대 영역과 모순 영역을 중계하고 변형시키는 어느 정도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시스템을 만들어낸다. 루드비히 볼츠만이 엔트로피를 확률 함수로 정의하면서, 열역학은 문화 내에서 이미 교환 시스템으로 작동하며 '탈물질화된 물질주의'로 진화했으며, 엔트로피는 이제 임의성을 측정하는 방법으로 해석되었다.


마크 셀처의 '신체와 기계'

마크 셀처는 19세기 후반 자연주의에서 모순적인 이중의 추력이 존재함을 발견한다.

물질성/물리성의 강조: 인간, 재현, 행동의 물질성 또는 물리성을 강조한다. (구상력이라고 볼 수 있다)

끈질긴 추상화: 인간, 신체, 움직임을 모델, 숫자, 지도 등의 추상적 표현으로 바꾼다.

셀처는 이 두 추력에서 생겨난 사상을 '탈물질화된 물질주의'라고 부른다. 이는 인간 행동을 통계적으로 표현하거나 신체에 인체 공학적 관심을 갖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데이터를 통계적으로 구성해서 추상화한 행동에 초점을 맞추고, 하난느 에너지의 소비와 소멸이라는 물질적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이중성은 신체를 물질적 대상과 확률적 분포로 설명하며, 통계 열역학이 정보 이론과 합쳐지면서 20세기 사이버네틱스에서 계속된다.




엔트로피가 정보와 연관되면서 탈물질화는 더욱 강화된다. 레오 실라르드의 맥스웰의 악마 해석을 통해 엔트로피와 정보가 연관되었다. 맥스웰의 악마가 분자를 분류하려면 분자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정보를 얻는 데 소비되는 에너지가 분류 과정에서 얻는 에너지보다 크므로 열역학 제2법칙이 지켜질 수 있었다.여기서 엔트로피와 정보가 서로 역전 관계를 이룬다는 함의가 중요했다. 정보가 많을수록 엔트로피는 적고, 엔트로피가 많을수록 정보는 적다. 레옹 브리유앙은 정보를 네거티브 엔트로피(네젠트로피)로 생각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위너는 엔트로피가 임의성, 소멸, 죽음과 관련되고 정보는 구조와 연관된다고 보아, 정보와 엔트로피의 역관계(네젠트로피)를 받아들였다. 위너에게 엔트로피의 증가는 우주가 질서에서 혼돈과 동일성으로 퇴화하는 경향을 의미한다. 위너는 생명체를 무질서의 바다에 떠 있는 네젠트로피의 섬으로 보았으며, 생명체는 전체 우주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며 조직성이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는 국지적인 고립 지역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달리, 클로드 섀넌은 정반대의 관점을 취하여 정보와 엔트로피는 반대가 아니라 동일하다고 생각했다. 이는 메시지가 예상하지 못한 것일수록 (임의적일수록) 정보가 많다는 논리였다. 위너는 엔트로피가 정보의 전달을 좌우하는 확률 분포에 거슬러 작용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를 윤리적으로 나쁘다고 보았다. 엔트로피는 억압, 경직, 죽음과 연관된다.


커뮤니케이션을 두 인간(또는 기계)이 노이즈와 싸우는 게임으로 생각했는데, 경직되면 노이즈에 의해 메시지가 파괴될 수밖에 없다. 창의적인 움직임과 유연한 순응만이 항상성이 쇠퇴를 향한 엔트로피의 압력에 맞서 일시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한다. '탈물질화된 물질주의'의 전장에서 신체는 정보 패턴으로 여겨지며, 이는 패턴을 보존하려는 전략가와 패턴을 파괴하려는 노이즈의 싸움이다. 위너는 인간은 끝없이 흐르는 강물 속 소용돌이와 같으며, 지속되는 물질이 아니라 스스로를 영속화하는 패턴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가진 정보 패턴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구성되는지 이해해야 하며, 이를 이용해 사이버네틱스 기계를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사이버네틱스 기계와 인간은 정보 패턴으로 간주되어 노이즈와 엔트로피에 맞서 공동의 대의를 형성할 수 있다. 민첩함은 이 싸움에서 필수적인 무기이다.


좋은 기계와 나쁜 기계의 경계 작업

위너는 좋은 기계와 나쁜 기계를 구분하며,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와 사이버네틱스 기계를 같은 특권화된 공간에 넣는 경계 작업을 강화한다.

나쁜 기계는 경직되고 유연하지 않을 때이며, 이는 지배와 흡수를 통해 인간의 자율성을 빼앗는 것으로 표현된다. 인간이 경직된 기계의 톱니와 지레 역할만 할 경우, 살과 뼈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사이버네틱스 기계(유연성, 확률성)는 인간의 형제이자 동료로 간주되지만, 경직된 기계(억압적, 단순함)는 자율적 자아를 위협한다.

이 싸움의 무대는 확률이 통치하는 기브스의 우주이며, 열역학 제2법칙이 죽음을 준비하는 중이기 때문에 사이버네틱스적인 인간-기계가 작용할 수 있는 여지가 허용된다. 엔트로피가 증가하여 우주가 단일한 상태가 되면 모든 것이 소멸된다.


위너는 변함없는 규칙을 지키는 아우구스티누스적인 것(자연)과 조작을 통해 이기려는 마니교적인 것(체스 선수, 체스 기계)을 구분했다. 피터 갤리슨은 위너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개발한 대공 화기를 분석하며 사이버네틱스를 '마니교적 과학'이라고 주장했다. 위너는 적군 조종사를 기존 관점이 아닌 확률 체계로 보았으며, 사격 시스템은 과거 관찰을 바탕으로 새로운 규칙을 만들 수 있었다. 이러한 유추적 중계 시스템을 통해 적은 우리와 같아지고 우리는 적과 같아진다. 이는 적군 조종사를 악마로 여기지 않게 만들었을 수 있지만, 동시에 사이버네틱스 기계를 마니교적 전술을 사용하는 피투성이 싸움에 가담시켰다. 위너는 전쟁 후 군사 프로젝트를 단호히 거절하고 이를 조작적인 체스 기계와 연관시키면서, 마니교적 전략에 함축된 조작에 대한 깊은 혐오감을 드러냈다. 위너는 에로틱한 은유를 사용하여 사이버네틱스라는 지식의 신체에 의해 주체의 신체가 관통당하고 녹는 것에 대한 불안을 표현했다. 이러한 불안은 사이버네틱스를 발전시키려는 갈망과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를 보존해야 한다는 걱정 사이의 불안한 긴장을 보여준다.



4. 금욕을 주장하며_주체의 경계 보존하기


위너는 '사이버네틱스'에서 사이보그라는 거울을 잠시 들여다보지만 금방 물러선다. 그는 사이버네틱스가 사회 과학과 자연 과학을 통합시키는 생산적인 사고방식을 제공할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결국 이 욕망의 대상에 반대하며 지적인 금욕을 지키려 한다. 위너가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은 경계를 재구성함으로써 불안을 표현하고 반대로 제어한다는 환상 때문이며, 이 환상은 에로틱하게 부호화된 은유들을 환기시킨다. 위너는 호흡스(Hobbes)의 리바이어던이나 고갈해파리 군체처럼 작은 조직들이 합쳐져서 구성되는 조직이 있다는 생각을 제시한다. 그는 정치적 통일체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설명하는 원칙으로 정보의 흐름을 도입한다. 그 예로 곤충의 번식을 돕는 페로몬과 같은 '성적 매력을 풍기는 물질'을 든다. 이 유추는 외부 호르몬이 내부 호르몬을 조직한다는 것을 암시하며, 인간 유기체는 사실상 호르몬 정보가 흐르는 투과막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위너는 이것을 설명한 후, 이것이 사변적일 뿐 아니라 거슬리기 때문에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며 후퇴한다. 이 생각은 개인의 정체성과 자율적 의지가 사이버네틱스적인 현실을 감추는 환영일 뿐이라고 암시하며, 자율적 자아의 해체를 통해 성적 놀이의 동의나 쾌락을 피해 간다. 위너의 첫 번째 충동은 이러한 '섹스 없는 섹스'에 대한 질외사정과 같은 후퇴이다. 위너의 두 번째 충동은 정보의 흐름을 제어한다는 거짓된 성적 환상을 통해 스스로를 자유주의적 주체로 재건하는 것이다. 이 환상은 미국 문학에 자주 등장하는 남성적인 자율성과 제어에 대한 환상이다. 위너는 숲속에서 '지적인 야만인'을 만나 언어를 공유하지 않고도 친밀감을 쌓는 모습을 상상한다. 이들은 시선의 상호 작용을 통해 소통하며, 서로의 감정에 참여하고 '특별하고 적극적으로 주목'함으로써 자율적 주체로 재구성된다. 이 환상은 위너에게 친밀감과 자율성, 제어력을 회복시킨다. 그러나 야만인은 위너의 생각에 그의 등장이 적당하다고 여겨질 때에만 다시 등장하는 종속적인 타자이다.


친밀감과 제어력을 회복한 위너는 '정치적 통일체'로 돌아와 그곳의 항상성 부족에 집중한다. 정치적 통일체에서는 깡패와 바보들의 소통이 지배적이며, 경제는 깡패를 위해 욕망의 계산법을 극대화하는 경제학자, 사회학자들에 의해 강화된다. 이러한 무자비한 조종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해결책은 소규모의 자율적 집단에 있다. 야만인의 재등장은 욕망이 조종당하는 것에 대한 불안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위너가 조종당할 필요가 없음을 상기시키는 효과를 갖는다. 위너에게 사이버네틱스가 위험한 것은 개인을 욕망에 의해 깡패에게 조종당하는 바보로 만들거나, 더 작은 단위의 그릇으로 만들어서 제어의 소재로서의 자유주의적 주체를 전멸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위너가 고민하는 사이버네틱스를 완전히 자율적인 주체로 놓을 수 없는 이유이다. 영화 프랑켄슈타인의 제작자와 비슷한 심경인 것이다.


위너는 사이버네틱스가 여러 학문 분야로 지나치게 확장되어
창시자인 자신에게서 제어력을 빼앗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느꼈다.


물리 과학과 사회 과학 분야가 통합될 수 있다는 가정은 '모든 과학적 성취의 본질에 대한 오해'라고 주장한다. 엄밀한 과학은 연구 대상과 '충분히 느슨한 짝짓기'를 이루지만, 사회 과학에서는 결합이 훨씬 더 긴밀하고 강렬하여 과학자가 객관성을 잃을 위험이 있다. 위너는 인류학자가 원시 사회를 관찰하다가 그 사회를 바꾸어 버린 경우를 예로 들며 긴밀한 짝짓기의 위험성을 설명한다. 그는 '우리는 관찰하는 대상과 너무나 밀접하게 하나가 되기 때문에 좋은 연구자가 될 수 없다'고 결론 내린다. 사이버네틱스를 물리 과학에 맡기고 인문 과학으로는 옮겨가지 않는 금욕을 지키는 것이 낫다고 충고한다. 이러한 결론 뒤에는 너무나 완전한 상호 침투가 일어나 개인을 욕망에 대한 제어력도 없고 쾌락을 이끌어 낼 능력도 없는 투과막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라는 불안이 도사리고 있었다.


위너의 사상에서 유추는 추상적 형태의 유사성을 통해서도 구성되지만, 자연어가 은유적 울림을 통해 드러내는 신체화된 물질성의 복잡한 생활 세계를 통해서도 구성된다. 역사적으로 위너는 사이버네틱스를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의 가정에 가두지 못했다. 1980년대가 되자 자유주의적 휴머니즘과 자기 조정의 관련성은 거의 무너졌다. 사이버네틱스는 위너의 의도와 달리 온갖 형태의 난잡한 짝짓기를 통해 문화 전반에 널리 퍼졌으며, 그 의미는 창시자 혼자서 제어할 수 없게 되었다. 위너가 보여준 에로틱한 불안은 사이버네틱스를 발전시키고 싶은 강렬한 갈망과 자유주의적 주체를 보존해야 한다는 걱정 사이의 불안한 긴장을 나타내기는 하지만 사이보그에 대해서 말하는 목소리들은 더욱 퍼저나간다.


뜨거운 관심을 모았던 영화 'Her'의 한 장면


0. 나오기


노버트 위너의 사이버네틱스는 결정론적 세계관을 종식시키고 확률적 패러다임을 확립한 20세기 과학의 기념비적 전환점이다. 위너는 기브스의 통계 역학을 기반으로, 인간 주체를 물질적 연속성이 아닌 정보의 패턴으로 재정의했으며, 유추(Analogy)라는 도구를 통해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해체했다. 이로써 생명체는 엔트로피의 압력에 맞서 싸우는 네젠트로피(정보)의 존재로 규정되었으며, 유연성은 경직성에 대항하는 생존의 윤리적 미덕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위너의 과학은 인간을 물질적 한계에서 해방시키고 포스트휴먼 주체의 가능성을 열었다. 이와 함께 자신의 창조물인 사이버네틱스가 인간의 자율성을 조종하고 흡수하여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를 전복시킬 수 있다는 깊은 윤리적 불안을 낳았다.


인간의 자율성을 흡수한 사이버네틱스의 미래는?


위너는 이 불안에 대응하여 사이버네틱스를 사회 과학으로부터 분리하는 '지적인 금욕'을 주장하며 경계 봉쇄를 시도했다. 그러나 그의 의도와 달리, 사이버네틱스의 논리는 결국 학문적 경계를 넘어 확산되었고, 오늘날 인공지능, 알고리즘적 통제 등 현대 사회의 모든 영역에 침투하여 보편 과학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위너의 유산은 확률적 통제 시스템을 창조하여 인류에게 엄청난 기술적 발전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조종당하는 것에 대한 공포와 주체 경계의 해체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남겼다. 결국 사이버네틱스는 해방과 불안이라는 상반된 유산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현대 사회의 기술 윤리적 쟁점을 관통하는 핵심 동력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 더 가속화되는 AI의 진화 속에서 자율성과 인간성의 경계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 최근 KBS다큐에서 트랜스휴먼을 제대로 다루고 있다. 80년전의 고민이 이제야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https://brunch.co.kr/@plutoun/158


https://m.blog.naver.com/jng02/221558304406


https://www.youtube.com/watch?v=7w0fB7X_apg&t=11s


https://www.youtube.com/watch?v=8rCVA_114tA&pp=ugUEEgJrbw%3D%3D


https://www.youtube.com/watch?v=_C0TpBv1sec

사이버네틱스의 정수를 보여주는 사이버펑크 엣지러너


https://www.youtube.com/watch?v=AF3XJT9YKpM&t=1286s

인지와 유추에 관련된 논문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