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념론을 정리하고 실체론으로 연결하기
서양의 철학사를 통틀어 보면 보통 두 가지의 층위를 나눌 수 있다. 존재하는 것들을 기술하는 유물론이 있고, 인간의 생각을 파헤치는 관념론이 있다. 보통 관념론은 독일에서 발달했는데 그 유명한 칸트에서 부터 시작해서 헤겔과 마르크스의 철학은 모두 관념론이라고 볼 수 있다. 관념론을 다시 뒤집어보면 '의식에 대한 정의'로 볼 수 있다. 인간이 생각하고 상상하고 판단하는데 있어서 의식은 언제나 가장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것이 관념론의 특징이다. 이에 반해서 유물론은 인간의 생각과 사고는 언제나 물질적인 기초를 하고 있다고 본다. 물질이 있어야 의식과 사고가 가는하다고 보는 것이다.
관념론은 정신이나 영혼을 감각의 기초로 보고
물질을 그에 따라오는 것으로 본다
관념론은 다시 객관적 관념론과 주관적 관념론으로 나누어진다. 객관적 관념론이란 인간의 의식을 자신이 살고 있는 생활과 현상, 사건으로부터 분리시켜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객관적 관념론에서는 인간의 의식이 어떻게 반응하든지 거대한 역사의 흐름은 알아서 흘러가고 또 만들어진다고 본다. 그에 비해서 주관적 관념론은 인간의 의식을 절대화시켜서 인간이 우주를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외부세계에 대한 이해보다 자신의 내면을 더 중시한다. 객관적이라는 것과 주관적이라는 것은 결국 자기자신과의 관계에서 누가 우선순위이냐라는 것을 말한다. 객관적 관념론은 세상이 먼저이고 주관적 관념론은 자신의 의식이 먼저라는 것이다.
객관적 관념론은 플라톤에서 시작되어서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를 지나서 근대에는 라이프니츠와 헤겔까지 오게 된다. 인간의 의식의 바깥에 이데아가 존재하고 그 이데아를 의식할 수 있는 소수의 인간만이 철인된다는 논리는 헤겔에 오면 '변증법'을 통해서 인간은 '도야'를 하게 되고 결국은 절대정신에 도착할 수 있다고 본다. 라이프니츠에서 나타난 물리학적 접근은 우주를 움직이는 법칙이 결국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고 또 세상을 만들어 간다고 본다. 따라서 객관적 관념론은 지금 존재하는 것들의 초월적인 부분 혹은 더 포괄적인 부분에서 신의 존재를 생각하게 되기도 하고, 우주의 거대한 의식을 가정하기도 한다.
주관적 관념론은 18세기 초에 버클리와 흄에 의해서 발전했다. 현대 서양의 철학에서는 실증주의, 생철학, 실용주의, 실존주의와 같은 철학으로 발전하게 된다. 주관적 관념론은 실제적 사물이나 사건을 받아들이는 주체가 주관적으로 의식하고 인식한 것들을 절대화하여 세상을 정의하고 사건과 상황을 정의한다. 니체의 관점주의와 초인사상은 이러한 주관적 관념론의 끝판왕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낭만주의의 부활을 알리는 르네상스 이후에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이렇듯 주관적 관념론을 더욱 발전시켜 마침내 프로이트에까지 이르게 된다.
관념론을 눈여겨봐야 하는 것은 이 사회가 구성되고 국가가 운영되고, 어떤 조직이 움직이는 것들을 상상하고 생각할 때 이 두가지의 관념론의 관점에서 보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조직이 개인보다 중요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객관적 관념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반대로 '모든 것을 마음 먹기에 달렸어! 열심히 해보자'라고 말하는 사람은 주관적 관렴론을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철학의 많은 부분은 일정한 엘리트집단에 의해서 소비되고 사용되고 지배계층의 흥미에 반응하여 발전할 수도 있다. 반대로 해방과 예속에서 벗어남과 같은 방식으로 철학적 사고 혹은 관념론을 생각해볼 수 있다.
철학의 기본 개념은 존재론에서 시작해서
인식론 그리고 윤리론 혹은 가치론으로 발전한다.
존재론은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근본물음이다. 살아 있는 것이든, 죽어 있는 것이든 아니면 생물이 아닌 것이든 혹은 영혼과 같이 보이지 않는 것이든 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근원을 묻는 것이다. 가장 처음 시작된 존재론적 층위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일 것이다. 물론 그 전에 소피스트들이 다양한 존재의 원리들을 탐구했지만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존재론은 이데아론과 실체론이다. 사실 서양철학의 모든 근원은 이 두 가지 중에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이것이 위에서 설명한 관념론으로 발전하던가 아니면 유물론으로 발전한 결과이다. 이데아의 존재론을 받아들이면 이 세게를 양분해서 보게 된다. 이데아의 세계에 있는 존재들과 현실세계에 있는 이데아를 모방한 존재들말이다. 여기에서 중세시대에는 유출설까지 나오게 된다. 이데아의 유출이 진할수록 진리에 가까운 존재가 된다는 존재론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반대로 실체론을 존재론을 받아들이면 이데아는 없고 오직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증명가능하고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실체론은 실제의 존재들이 어떻게 연결되고 중첩되고 결합되는지가 매우 중요해진다. 실체론의 존재론을 받아들이면 이원론이 아니라 '일원론'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전통은 스피노자를 건너서 베르그손과 들뢰즈 그리고 브르노 나투르까지 오게 된다. 실체론에서는 생물과 무생물의 구분은 인간의 의식영역과 무의식영역으로도 나누어 볼 수 있다. 무생물은 인간이 감각하지 못하는 완전히 다른 존재라서 무의식의 영역으로 보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듯 관념론과 실체론의 측면에서 존재들은 다른 갈래로, 다른 그룹으로 구성된다.
존재론이 정해지면 그 존재들을 이제 어떤 방식으로 인식할 것인가의 문제가 발생한다. 이른바 인식론이다. 관념론에서는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객관적 인식론과 주관적 인식론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인간의 정신으로 볼 수 있는 세상이 있고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보든 상관없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반대로 우리가 보고 싶은대로 볼 수 있는 주관적 관념론에서는 세상은 우리의 의식 안에 존재하고 또한 구성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관념론은 인간의 정신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정신을 잘 구현해보면 쉽게는 프로이트가 이야기한 무의식과 의식, 전의식의 구분값이 생기기도 하고 절대정신과 순수이성이 구분이 생기기도 한다. 보통 관념론의 전통은 독일철학을 기반으로 만들어 졌다. 그에 비해서 실체론을 중심으로 하는 철학은 프랑스나 영미철학계통으로 발전했다.
사실 중세시대의 플로티누스로부터 시작되었다
인식론이 정해지면, 다시 말하면 세상을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인식하게 되면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가 생긴다. 이른바 원리론 혹은 가치론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데아로 나누어진 세상에서 존재들의 유출이 위계질서를 만든다면 인간의 욕망이 계속 이데아를 욕망하기 때문에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정신의 고귀함을 추구하는 원리를 도출할 수 있다. 반대로 인간의 시작점을 물질로 잡고 인식론을 발전시키면 물질에서부터 발생해서 정신으로 이어지는 베르그송과 들뢰즈식의 인식론을 가지고 존재론을 규정할 수 있게 된다. 사실 이러한 구분은 신플라톤주의라고 하는 플로티누스로부터 시작되었다. 물질과 정신을 나누고 서로의 발생근본을 양극단으로 정하면 두 지점이 만나는 지점이 오게 된다. 이게 바로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현실세계이며, 인간의 존재론이며, 온라인플래폼을 포함한 모든 것들이 이 두개가 만나고 있다.
인식론이 정리된 다음에는 이제 어떤 방식으로 방향을 잡고 생각을 움직이고 몸을 움직일 것인가라는 고민을 하게 된다. 이른바 가치론 혹은 원리론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어떻게 사용하거나 관계 맺어야 하는지가 정리된다. 그러니깐 우리가 감각하고 인식하는 모든 것들은 그 자체로 가치와 방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가치를 다르게 설정할 수 있지만 보통은 사물과 관계하는 방식에 이미 그 존재에 대한 인식이 들어 있다. 예를 들어 손잡이가 달린 컵을 보면 이미 그 컵 안에 손으로 손자이를 잡아서 입으로 가져와야만 먹을 수 있다는 방법이 들어 있고 이것은 '먹는다'는 가치를 담고 있다. 그런데 만약 컵에 빨대가 꽂혀 있다고 생각해보면 먹는다라는 '가치'는 그대로지만 그것을 먹는 방법은 다르게 되는 것이다. 존재는 이미 그 안에 가치와 방향을 담고 있는 것이다.
17세기 독일낭만주의의 계보를 따라서 헤겔은 절대정신의 존재를 변증법적으로 증명해 낸다. 주관적인 정신은 정반합을 통해서 절대정신으로 도야하고 이렇게 도야한 정신은 결국에는 최상층부인 신의 인식론까지 갈 수 있게 된다. 정신세계의 바운더리를 라캉은 '상상계'라고 보았을 것이다. 우리의 상상이 이루어지는 정신의 세계에서 존재하는 사람들과 존재들과 신. 이렇게 상상계의 영역에서, 정신의 영역에서, 신의 영역에서 일정한 체계가 부여되면서 현실로 구현되는 것을 '시뮬라크르'라고 해보자. 이 개념은 장보드리야르가 주장한 개념이지만 정신이 구체화되는 과정에서 반드시 체계가 필요하고 이 체계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람들의 머릿속에 반드시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어떤 사람은 '개념'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이론'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상상력'이라고 하지만 이것들을 이렇게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머릿속에 어떤 그림과 순서, 방법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위에서 부터 내려오는 시뮬라크르가 물질과 만나는 지점이 오는데, 이것이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존재들이다. 라캉의 표현을 빌리자만 '상징계'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상징계의 영역은 상징성을 가진 존재들이 현시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눈으로 혹은 귀로 혹은 감각으로 현시되지만 존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언어는 그런 의미에서 실재의 존재들과 상상의 존재론을 연결해주는 플랫폼과 같다. 물질에서부터 시작된 발생학적인 물질론은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이야기하는 대로 '아브젝시옹'을 통해서 독립된 개체가 된다. 크리스테는 물질이 스스로 독립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자신을 발생시킨 것과 이별해야 한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무엇을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들과 일정한 독립성을 가져야만 가능하다. 빵 1조각이라고 할 때 '빵 전체'로부터 독립해야 하고, '빵'이라고 부를려면 기존의 밀가루 반죽과 독립해야 한다. 인간이라고 부를려면 엄마의 태속에서 분리되어서 나와야 하나의 개체가 된다. 우리가 쓰는 모든 물걸들은 이렇게 아브젝트되어서 존재하는 것들이다.
물질들은 이름이 불려지기 전까지 노마드이다.
이름없는 유목민이다!!
아래로부터 독립되어 올라오는 개체들은 그 자체로 규정적이지고 않고 자유롭게 움직이기 때문에 노마드이다. 즉 유목민인것이다. 부유하고 떠돌아다니고 흘러다닌다. 그러나 위로부터 구조화되어서 내려오는 시뮬라크르와 만나면 이것은 하나의 언어로 상징화되어서 묶인다. 묶인다음에는 '이름'이 지어져서 상상계와 실재계가 하나로 존재하게 된다. 둘 중에서 하나라도 없으면 언어로 이야기할 수 없다. 들뢰즈는 기관없는 신체, 신체없는 기관을 이야기했지만 그것은 그런 종류의 존재들을 총칭하는 말이고, 이것들이 하나의 시뮬라크르와 만나면 어떤 이름이 지어진다. 누구의 작품이 되거나, 유령이 되거나, 유용하게 쓰이는 물건이 되거나, 어떤 집단이 되거나 한 사람을 칭할 수도 있게 된다. 그러니 이름이라는 상징은 두 가지를 잡아주는 묶음이다.
노마드들의 매칭이 바로 세계의 모습이다
상징계 혹은 정신의 세계에서 시뮬레이션(시뮬라시옹)되어서 개념과 체계를 가지게 된 정신적 노마드는 물질들 혹은 실재계에서 아브젝트(아브젝시옹)되어서 물질적 노마드가 되어서 만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정신적 노마드와 물질적 노마드가 만나는 플랫폼이다. 그렇지만 물질의 의식은 우리가 알 수 없기 때문에 무의식이라고 할 수 있고 따라서 물질은 오직 물질적 노마드만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물질을 바라보는 인간은 자신의 의식을 투사하여, 다시 말하면 주관을 투사하여 물질들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그에 맞게 분류를 하거나 사용을 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에 관점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플랫폼이고 또한 노마드들의 잔치가 된다. 들뢰즈의 경우에는 이러한 인간의 의식의 우선성을 부정하면서 물질들에 대해서 우리는 '무의식'의 관점에서 이야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 이야기를 받아들이더라도 무의식적인 대상을 볼 때 우리는 항상 의식을 가지고 의미와 가치를 상정하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상 우리에게 인식되는 모든 것은 의식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인간 자체를 말하기에는 의지, 감성, 꿈, 관계, 이야기, 말, 정체성, 기억, 과거, 추억, 시간과 같은 주제들을 논의해야하지만 말이다.
어쩌면 세상은 '대칭'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균형 혹은 불균형에서 상징이라는 묶음으로 연결된 '매칭'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생각을 한다. 위의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관념에서는 국가와 제도, 문화와 사회, 사람에 대한 인식과 가족에 대한 정의가 있다면 그 대칭엔느 행위와 자연, 인공과 작업이 있고 이것이 어떻게 매칭되는가에 따라서 다른 의미가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의미는 하나의 정의로 끝나지 않고 의미와 중첩되고 다시 대칭되고 다시 연결되어서 의미의 왕국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주관적인 관념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객관적인 관념으로 발전하게 된다.
관념의 상하운동을 통해서 정신은 완성된다
헤겔의 변증법을 다시 말해보면 위와 같은 그림으로도 생각해볼 수 있다. 관념의 상하운동이 곧 주관적인 관념론에서 객관적인 관념론으로 발전하는 과정이며 헤겔의 관점에서는 얼마나 자주 그리고 깊이 주관과 객관을 왔다갔다가 했는가에 따라서 절대정신에 다다랐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실체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정신의 움직임은 사실 '이데올로기'나 '거짓말'이 될 수도 있고 그런 체계나 이론은 없고 생동하는 물질의 세계에서 하나로 연결되는 것들을 정신의 도구로 분할시킨 것에 불과할 것이다. 개인의 주관적인 정신이 객관적인 정신으로 나오는 사회생활은 그 자체로 인간이 '사회화'과정을 거치면서 국가의 국민의 되고, 시민이 되고, 주민이 되는 과정이면서 가정에서는 아빠가 되고 엄마가 되며 자녀가 되는 과정이다. 실체론은 다시 이것을 한번에 걷어차면서 그러한 매칭은 말도 안된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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