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읽는 영미현대철학_역사와 유토피아 공간
'정치적 무의식'으로 유명한 문화평론가이면서 맑스주의자인 프레드릭 제임슨은 1934년 미국 오하이오에서 태어났다. 미국의 맑스주의 철학자이면서 문화 이론가이고 샤르트르의 실존주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프레데릭 제임슨은 1950년대를 지나면서 미국 사회가 양가감정을 가지게 되는 '매카시즘'과 '경험주의' 그리고 '실증주의'라는 주제를 다루는 한편 맑스주의의 후기적인 구조의 양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맑스주의와 형식'을 쓴다. 어떻게 프레데릭 제임슨의 사상이 시작되었을까? 1968년 프랑스에서 시작된 68혁명은 '금지된 것을 금지한다'라고 하는 슬로건 아래 그동안 구조적 폐단으로 자리잡은 대학 사회와 경직된 사회의 규칙들을 흔들면서 등장했다. 이러한 자유주의의 여파는 유럽을 한바퀴 휩쓸고 서진하여 미국까지 건너왔다. 토대와 구조에 대한 고민들이 다시금 미국인들의 의식 속에 등장하게 되었고 그 동안 데리다를 중심으로 예일대학의 해체파들의 활동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무의식 속에서 구조화되어 있고
문학은 그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그의 명작인 '정치적 무의식'은 맑스주의 문학연구의 방법론을 확립하고 이른바 맑스주의 이후를 연구한 포스트맑스주의를 비판하였다. 근대화의 과정으로 식민지와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세례를 받는 이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며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적 논리'와 '문화적 선회'를 썼다. 현재까지도 모더니티, 리얼리티에 대한 변증법적 변화과정을 분석하며 맑스주의 이론으로 현상에서 드러나는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제임슨의 이론은 한마디로 일상의 구조와 반복에서 억압된 희망이 자연스럽게 정치적인 무의식으로 축적되고 이것이 문학을 통해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소설, 영화, 노래, 트렌드를 읽으면 사람들이 추구하지만 이루어지지 않는 '정치적 무의식'을 읽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지난번 제주도 여행을 가면서 프레드릭 제임슨의 저작을 들고 갔지만 사실 혼자 사색에 빠지느라 제대로 다루지 못하다가 이제서야 스터디를 같이 하는 사람들과 깊은 이야기를 나누며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오늘은 프레드릭 제임슨의 많은 저작 중에서 정치적 무의식을 바탕으로 어떻게 맑스주의와 연결되며 문화혁명과 관계를 맺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문화연구의 한 측면으로 조금만 들여다보면 바로바로 적용해볼 수 있게 되어서 프레드릭 제임슨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될 것이다. 불친절하게 문장과 단어들만 나열했는데 이제 조금은 친절하게 하나하나 살펴보자.
간단한 개념 소개
변증법 : 헤겔의 이론 중에 하나인 변증법은 '정-반-합'이라는 구도로 유명하다. '정'은 개념과 이성, 지성의 총합이고, '반'은 현상과 현실, 상황의 총체이다. '합'은 기존의 개념이 현상을 만나서 새롭게 상승하고 확장되는 차원으로의 '절대적 지성'을 말한다. 여기서는 '정-반-합'이 기존의 이해(맑스주의)에서 새로운 현상(모더니티와 실증주의, 자본주의, 문화혁명과 라이프스타일)을 만나서 새로운 이해를 갖는 것을 말한다.
RSI : 라캉의 '상상계-상징계-실재계'를 해석한 슬라보예 지젝은 Real, Symbol, Image라는 단어를 줄여서 RSI로 사용한다. 후반에서 설명하는 '문화혁명'으로 등장하는 문학작품들은 '상징계'를 뜻하며, 실재계는 자본주의 현실을, 상상계는 맑스주의 이데올로기를 뜻한다. 여기서 RSI의 변증법이 계속해서 굴러간다고 볼 수 있다.
무의식 : 라캉은 '무의식은 언어로 체계화되어 있다'라고 설명했다. 프레드릭 제임슨이 말하는 정치적 '무의식'은 그래서 언어로 체계화된 내면의 언어들이 '문학작품'과 같은 상징계를 통해서 드러나는데 여기서의 내용이 바로 정치적 무의식이라는 것이다. 정치적 무의식은 그래서 문학작품을 통해서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언제나 미래와 내일에 대한 열망과 욕망, 기대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하부구조 : 맑스주의에서 하부구조는 상부구조인 법, 체계, 이론을 떠 받치고 있는 실재의 생산양식, 생산관계를 뜻한다.
어떠한 개념이 처음에 등장하면 그것은 그 자체로 불리지만 한 세대가 지나고 개념이 변형되면 '후기'라는 단어를 붙인다. 합리성을 기반으로 하는 현대성 즉, 모더니즘은 전세계를 다 휩쓸고 와서 합리성이 파괴된 합리성 혹은 해체된 합리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을 '후기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불렀다. 후기라는 것은 원래 개념의 형식은 가지고 있지만 그 내용이 달라진 것을 말한다. 이런 방식으로 '후기 자본주의'라고 한다면 이미 한 세대를 자본주의라는 개념이 현실화가 되어서 이제는 자본주의가 다른 내용을 담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본주의 체제가 사회주의 체제와 경합을 벌일 때는 '노동-자본-토지'라는 요건에서 토지는 상수이고 '노동-자본'의 관계에서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는 자본가들의 세계와 노동을 주체로 하고 있는 프롤레탈리아들의 대립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소련과 동구권이 체제경쟁에서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고르바초프의 소련해체 선억은 그 유명한 프랜시스후쿠야마가 이야기한 '역사의 종언'을 가지고 왔다. 체제 경쟁에서 자본주의가 승리한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이제는 경쟁적인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곳에 자본주의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후기 자본주의'라고 볼 수 있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이러한 후기자본주의 혹은 역사의 종언이라는 개념에 반대한다. 제임슨의 입장에서 보면 사회주의는 맑스의 말처럼 자본주의가 붕괴하고 그 다음에 등장하는 사회인데, 자본주의가 붕괴하지도 않았고 제대로된 사회주의 체제를 실현해본적도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러니깐 소련이 해체하기 전까지 체제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의 한 형태라고 본 것이다. 제임슨은 이러한 가정 하에서 여전히 사회주의체 체제의 도대를 기다리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글 자체가 스스로의 '정치적 무의식'인 샘이다.
상부구조인 법률과 이론, 문화와 정치는 이것들을 떠 받치는 생산양식, 생산관계에 의해서 정해지는데 자본주의의 등장 이후에 여전히 이 토대는 바뀐 적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오히려 후기 자본주의가 되면 단순히 생산수단과 생산관계에서 '자본-노동'의 관계 내지 '자본가-노동자', '부르주아지-프롤레탈리아 계급'의 구조가 문화 전반에 퍼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상품화로 가격이 매겨지고, 교환할 수 있는 '노동시장'에서 거래된다. 영화는 철저히 손익계산서를 따져야 하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개봉관수를 지키는 것이 필요하며, 예술은 이미 부르주아지의 차별화된 문화 양식이 된지 오래다. 주제에 있어서도 모더니즘 이후에 개별화된 포스터모더니즘과 포스트자본주의 즉, 후기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딱 맞아 떨어져서 4차 산업혁명으로 발전한다. 핵개인의 시대에 시대예보가 발령되는 것이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계급성이 어디에나 들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문학의 범주에 있는 소설과 시, 수필과 오페라, 뮤지컬과 연극에도 바로 이러한 요소가 내재적으로도, 외재적으로도 존재하고 있다. 그리스의 비극이나 서사시, 중세의 기사도와 로맨스 발자크나 찰스 디킨스의 리얼리즘 소설(두 도시 이야기, 레미제라블), 랭보의 상징주의, 조이스나 콘래드의 모더니즘 소설도 후기 자본주의 관점에서 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제임슨이 보기에 우리가 사는 시기에 해석들은 후기자본주의 토대인 생산양식과 생산관계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양식을 기반으로 인간의 정신은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자신의 삶의 양식이 바뀌면 정신세계도 자연스럽게 바뀌는 것이다.
그러나 20세기를 넘어서면서 이러한 연결고리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회주의가 서로 길항적으로 이행하면서 넘어올 수 없는 어떤 경계지점이 생긴 것이다. 체제 경쟁이라고도 하지만 이념들은 서로 '교차'하는 지점만 있을 뿐 통합될 수는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모든 교차지점을 '우연성'으로 치부해버리는 일이 발생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말 그대로 '하나의 진리'가 통하던 시기가 사라지고 '모든 것이 진리'이면서 '모두가 진리'를 가지고 살아가는 세상이 된다. 그러니 '하나의 단어'에 '하나의 의미'를 담는 일은 모두 허무하게 느껴져 버린다. 마치 중세시대의 '유명론'이 부활한 것이다. 상징은 있으나, 의미는 없고, 역사는 허울만 가득할 뿐 실재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은 세상이 온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역사적인 존재, 시대적인 사명 혹은 국가적인 정체성은 유명론에 지나지 않는다. 그 대신의 개인의 삶과 연결고리 그리고 소중한 나와 관계맺는 이들과의 실재가 진리가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다양한 찬반논쟁과 깊이있는 토론이 이어질 수 있지만 제임슨은 프로이트의 '억압된 거의 회귀'처럼 이렇게 연결되지 않은 상징들이 어느날 우리의 삶을 덮친다고 말한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사건'이고 달리보면 역사적인 인과관계일 수도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혁명'이나 '쿠테타' 혹은 '전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회귀는 우리가 어디서나 읽을 수 있는 '문학작품'에 계속해서 드러나고 있었다. 우리가 만나는 대부분의 문학작품은 이름만 남은 상징체계의 공백을 매우는 정치적인 무의식의 다름 아니다. 이것이 바로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넘어오는 '문화혁명'인 것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1977년 '라캉에서의 상상계와 상징계'를 통해서 라캉의 인식범주에 드러난 '상상계와 실재계, 그리고 상징계'를 구체적으로 다룬다. 라캉의 상상계와 상징계의 연결은 '이데올로기'로 표현된다. 알튀세르에 의해서 이러한 연결고리가 실재가 없는데도 어떻게 사람들은 상상력을 가지고 믿게 되는가에 대한 부분을 밝혀주었다. 사람들은 현실적이지 않아도 언어적 설득에 의해서 '상상력'을 발휘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바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상상과 언어만으로 믿는 것'을 말한다. 반대로 프레드릭 제임슨은 '역사'는 상상계나 상징계와 다르게 '실재'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역사의 종말이라던지 문명의 충돌이라던지 하는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선언하는 사람들에게 제임슨은 그렇게 아무리 말하더라도 실재하는 역사는 계속해서 지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문제가 생긴다. 실재가 아무리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도 흘러가고 있고 지속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도대체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이다. 라캉의 의해서 실재로 존재하는 것들은 자연스럽게 상상계를 자극하여 상상의 이미지를 만들고 이것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언어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제임슨은 이렇게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오히려 존재의 양식은 '문화혁명'을 통해서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문화혁명을 토해서 역사라는 것을 재현할 수 있고 생산양식도 마찬가지이다. 다시 말하면, 직접적인 말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증상과 증후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실재에 대한 실재의 비판이 메타코멘터리다.
자본주의 생산양식 역시도 이데올로기이다. 교환할 수 있다는 상상계와 이것을 드러내는 화폐가 연결되어서 '실물'이 존재하지 않아도 자본주의는 이데올로기가 되어서 돌아간다. 이에 대해서 맑스주의는 다시 실재가 그렇지 않으며, 실재에 대응하는 상상계도 당연히 다른 방식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화폐라는 상징으로 치환될 수 없다는 것을 분석한다. 실재에 대한 실재의 비판이 메타코멘터리다. 즉, 자본주의는 실재에 대한 이데올로기이며 이것을 다시 실재의 방식으로 분석하는 것이 맑스주의이며 이것이 메타코멘터리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 자체가 이미 실재를 드러내는 코멘터리인데, 이 코멘터리를 다시 실재에 대해서 코멘터리했기 때문에 코멘터리에 대한 코멘터리가 맑스주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깰려면 '실재'가 맑스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말하는 '자본들끼리 연결되어도 스스로 움직이는 시스템'이 되어야 하지만 그것은 말이 안된다. (물론 AI가 발전하게 되어서 노동자와 자본가가 사라지고 화폐의 사용이 완전히 사라지면 다른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질 것이다)
문화혁명과 이행기의 실재계
하나의 생산양식이 다른 방식으로 바뀌게 될 때 문화혁명을 겪게 된다. 즉 역사는 기존 체계에서 다른 체계로 바뀌게 될 때 생산양식이 바뀌게 된다. 원시사회에서 고대 사회에서 넘어갈 때, 유목민에서 정착민으로 넘어가면서 생활양식 자체가 달라지게 된다. 예를 들면, 수렵 채집이 아니라 농사를 짓는 방식으로 생활양식이 바뀌면서 건축과 도시의 실재가 바뀌게 된다.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이다.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넘어갈 때에도 왕 중심의 사회에서 자본가 중심의 사회로 바뀌면서 생활양식 자체가 자본을 중심으로 변화되어 시장이 만들어지고 국제무역이 일어나면서, 제국주의와 세계대전까지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문학작품은 실재계의 변화가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마음과 관계, 생각의 변화를 잘 드러낸다. 예를 들면 안톤체호프의 작품들은 19세기 러시아가 몰락해가는 과정에서 지주들의 삶의 변화와 귀족들의 몰락을 생활양식의 변화로 잘 드러내고 있다. 이렇듯이 제임슨은 역사는 실재하며 역사가 흘러가는 과정에서 변화는 자연스럽게 시대를 반영하는 문학작품에 잘 드러난다는 것이다. 문학작품은 그 자체로 상징계를 대변하지만 구체적으로 실재계의 자료들을 가지고 작가들의 상상계가 자극되어서 나오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실재에 대한 코멘터리'로써 문학작품은 문화혁명 즉, 생활양식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제임슨의 '실재'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면 모더니티가 무엇인가를 쉽게 정의할 수 있다. 제임슨은 모더니티란 '봉겅제에서 자본제로 이행하는 체제'라고 본다. 다시 말하면 기존의 봉건질서에 대항한 부르주아 혁명이 시작되는 시점부터 자본제로 이행하는 전과정을 모더니티라고 본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실재의 개념으로 보면 생활양식의 자연스러운 변화, 문화의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전환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실재가 드러나는 문학작품은 '리얼리티'로 표현되는 장르에서 더 자세하게 다룬다. 문학작품은 언제나 실재의 변화에 대한 코멘터리로써 생활양식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현실적으로, 세부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에서 혁명 이후에 일어나는 기존의 체제가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과정에서 주인공들의 생각의 변화와 주거, 관계, 마음의 변화를 리얼리즘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역사의 실체를 읽고 공유하게 된다. 제임슨이 모더니티를 문화혁명이라고도 부르며 이는 막스 베버의 관점에서는 '합리화 과정'이며, 루카치의 관점에서 '물화', 들뢰즈와 가타리의 관점에서는 '탈약호화와 재약호화, 재영토화'가 된다. 하나의 문화양식은 '상상계'와 '실재계'를 연결시켜주는 것이다. 따라서 '모터니티'라는 상징에는 실재의 변화와 상상력의 변화가 모두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면, '학교'라는 상징이 사용되는 토대가 모더니티면 산업사회에 맞게 작업장에서 일할 수 있는 일꾼들을 뽑아내기 위해서 일정한 규칙과 과정으로 교육시키는 곳으로 정의가 된다. 모더니티 이전에는 작업장이 아니라 봉건제였으므로 일부 귀족들만 가는 '대학'이 융성했지만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산업일꾼이 되어야 함으로 학교의 개념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활양식이 달라지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부르주의 혁명의 3가지 단계
부르주아 혁명은 단순하게 하나의 방법이나 목표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역사에 따라서 정리해보면 대략 3가지의 발전단계를 거친다고 볼 수 있다. 산업자본주의, 제국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여기서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했으나 프로레탈리아와 다르게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임슨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혁명의 핵심에는 자본주의가 있다. 자본주의가 태동하고 발전하고 분화되는 과정에서 부르주아의 생활양식은 자연스럽게 일상 생활속으로 침투한다. 제임슨의 문제의식은 혁명의 단계에 따라서 사람들의 무의식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산업자본주의 : 자연주의 소설이 대표적으로 등장한다. 제인오스틴의 소설이나 기싱의 소설은 '자연주의'로 대표되면서 산업화를 통해서 부를 축정한 부르주아들의 낭만적인 사랑을 다룬다. 또한 이와 반대로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자연스럽게 풀어내는 소설들도 등장한다. 레미제라블같은 소설들이 그 예이다. 계급관계가 고착화되어 가는 시기의 사람들의 생활의 변화를 볼 수 있다.
제국주의 : 자본주의가 확장되어 제국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독점자본주의 시대라고도 하는데, 이때는 이제 자본주의에 대한 대항헤게모니가 없으며 오로자 자본의 논리에 의해서만 사람들의 삶이 구성된다. 또한 자본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자본주의 제국주의가세계적으로 확산된다. 랭보나 발레리 같은 작가들의 '인도로 가는 길', '전망 좋은 방'에는 자연스러운 식민지의 일상을 다루고 있다. 랭보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는 표현을 쓰는 데 이것은 식민지 현실 자체를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제임스 조이스 작품들이 제국주의 시대의 부르주아의 삶과 생각을 드러내고 있다. 더블린 사람들의 경우 식민지 제국주의를 몸소 경험하는 아일랜드 시민들 중에서도 계층화된 시민들의 삶을 '더블린'에 빗대에 표현하고 있다. 경쟁을 통해 '1등 시민'이 되고 싶은 사람들의 심리를 잘 묘사했다. (개인적으로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은 읽다보면 '아~'라는 깨달음이 엄청 깊게 박힌다)
포스트모더니즘 : 현대를 모더니즘이 지나간 모더니즘의 시대라고 본다면 이제는 자본주의라는 이름이 이름을 감추고 미세플라스틱이 우리 몸에 돌아다니는 것처럼 자본주의 생활양식인 '교환'이 모든 관계와 생각, 제품과 서비스, 사회구성요소에 스며들어 있는 것을 말한다. 이 때 나오는 작품들은 한강의 '채식주의자'같이 자본주의를 벗어나려는 생활양식의 형태를 보여주기도 하고 아예 노골적으로 자본주의를 추구하기도 하지만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가 이렇게 산다는 데?'라는 식의 반응으로 나타난다. 다른 한편으로는 '페미니즘'과 같이 계급의 충돌이 드러나는 작품들도 나오게 된다. 더 자본화가 되는 과정에 맞물려 덜 자본화가 되는 과정도 등장하는 말 그대로 '아포칼립스'와 같은 혼돈의 시기이다.
제임슨이 '모순'을 발견하고 그것을 해결해 가는 과정은 헤겔의 '변증법'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을 설명하면서 정신의 깊이에서 나온 개념을 '정'이라고 했고 이에 대해서 변화하는 현상을 '반'이라고 했다. '정'과 '반'은 서로 반대되기 보다는 정해진 개념을 변화하는 현실이 계속 추가하기 때문에 안티테제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 둘이 서로 만나서 다시 개념이 현실의 모순을 포괄하면서 더 큰 테제로 발전하는 것을 '합'이라고 보았다. '정반합'의 핵심은 개념과 현실 그리고 이것을 승화시켜서 더 큰 개념으로 발전시킨다는 '절대정신'의 탄생이다.
이러한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세계적인 관점으로 가져온 제임슨은 '정'으로써의 1세계인 선진국과 '반'으로서의 2세계인 소련 혹은 중국과 같은 패권과 다르게 3세계인 후진국 혹은 식민지 국가들을 구분한다. 특히,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통해서 주인이 계속 일을 시키는 가운데 노예은 현실의 기술을 익히고 결국 주인이 노예보다 더 못한 기술과 상황으로 처하는 것을 적용한다. 다시 말하면 1,2세계가 서로 박터지게 싸우고 있는 도중에 이것을 전체적으로 외부자의 시선에서 보고 있던 제 3세계가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고 종합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선진국들의 싸움, 패권들의 싸움을 보면서 제 3세계는 이모든 것을 전체적이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임슨에게는 모순의 해결은 1,2세계 작가들에게서 보이지 않고, 오히려 제 3세계의 작가들에게서 보인다는 것이다.
현실에서 모순은 언제나 중첩적으로 등장한다.
제임슨에게는 '민족모순'이라는 개념이 중요한데, 전통적으로는 맑스주의에서 계급 모순을 다루었고, 고대 사회에서는 귀족과 노예의 모순을 다루었다. 봉건사회에서는 영주와 농노, 자본주의에서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가 모순이다. 이러한 모순의 해결은 결국 누가할 수 있을까? 이러한 계급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 할 수 있다느 것이다. 오히려 계급에 속하지 않으면서 계급의 문제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이다. 이해관계자가 아니여야만 그 이해관계의 득실을 따지지 않고 모순을 해결하는 것과 같다. 민족의 관점에서도 '어느 민족'에 서지 않고 객관적으로 모순을 바라볼 수 있을 때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전개된다. 여기서 바로 정치적 무의식이 등장한다. 어딘가에 속해 있는 사람들에게는 정치적 무의식이 작동한다. 자신이 해결하고 싶었지만 표현할 수 없는 문제의 본질이 의식이 아닌 무의식에 존재하다가 자연스럽게 문학작품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꿈은 모순의 해결책에 대한 갈망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현실적으로 모순을 해결할수 없을 때 '상상적'인 해결책을 찾게 되고 이것이 자연스럽게 '꿈'이라는 상징으로 치환된다.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은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욕망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꿈은 그 자체로 무의식의 영역에서 등장하는 '존재하지만 존재를 알 수 없는' 존재이다. 제임슨에게 이러한 꿈은 곧 사람들이 일상에서 '가치의 판단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들이 정치적으로 억압된 상태를 드러내는 기제이다. 앞에서 다룬 라캉의 관점에서도 제임슨은 '꿈'이라는 상징계는 결국 실재계에서 불만과 상상계에서의 미래에 대한 열망이 '꿈'이라는 상징체계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꿈은 사실 상징계로서 실재의 다양한 이미지들과 상상계의 다양한 개념들과 만나지 않으면 그것을 '꿈'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워진다. 그런 경우가 있다 어떤 꿈을 꾸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 꿈 말이다. 상상계의 개념이나 실재계의 이미지가 없는 경우에는 당연히 꿈이 생각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상상계와 상징계'의 연결이 이데올로기라면 '꿈'은 '실재계와 상징계'의 연결을 통해서 '상상계'를 드러내는 방법이다. 이데올로기가 상상을 상징으로 표현하는 작업이라면 꿈은 실재를 상징계로 표현하는 작업이다. 다만 꿈은 상상할 수 없던 것들을 자신도 모르게 상상하고 있는 것으로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으나 무의식 속에서, 무의식의 상상계 속에서 존재하던 것이다. 이러한 구도라면 혁명은 꿈이 감추고 있는 상상계를 찾아서 다시 현실계로 연결하는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제임슨은 무의식 속으로 들어간 모순적 현실을 '하부텍스트'라고 부르며 꿈은 바로 이 하브텍스트를 찾아내는 작업이 시작점이라고 말한다. 문학작품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하브텍스트를 드러내는 작품들이 보여주는 꿈의 상징은 그 당시 사람들이 꿈꾸고 있으나 표현되지 않는 것들을 찾을 수 있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모순의 해결은 언제나 상징계에서 일어난다. 상징계는 사회적으로 용인되면서 하나의 제도나 의식 혹은 제의가 된다. 국가에서 3.1절이나 5.18을 기념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그 당시의 모순이었던 현실에서 표현되지 않은 하브텍스트를 기리는 행위가 된다. 이를 통해서 해소될 수 없는 그 당신의 현실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사람들의 상상계 속에서 꿈으로 등장할 수 있는 통로를 여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감상에 빠지기도 하며 그 당시의 주인공들에게 푹 빠져서 그들의 상상계를 쫓아가는 일도 생긴다. 사실 이러한 방식은 어떤 사람에게 매료 되었을 때도 동일하게 일어난다. 그 사람이 표현하지 않았지만 그 사람이 드러내는 '하브텍스트'를 읽는 순간 그 사람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는 것과도 같다. 그래서 어떤 작가의 작품의 푹 빠지는 경우가 바로 그 작가가 표현하는 하브텍스트 안에 숨겨진 상상계를 찾았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제임슨은 모순을 끌어내어 상징화시키기도 하고 숨겨진 것들을 드러내는 '정치적 무의식'을 찾기도 한다.
제임슨은 헤겔에서 시작해서 맑스까지 이어져내려오는 '사회'의 발현과 '상품'의 생산체계에 대해서 어떻게 해석할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한다. 헤겔의 관점에서 '사회'는 가정이 가진 사랑의 인륜성을 저해하는 문제적인 집단이 된다. 이것을 극복하는 것이 절대정신인 '국가'가 되기 때문에 헤겔의 텍스트는 언제나 국가의 관점에서 사랑의 인륜성을 어떻게 극복하고 확대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된다. 이것이 자연스럽게 전체주의로 흐를수도 있고 민족주의로 흐를 수도 있는 경로가 된다. 이에 대해서 맑스는 헤겔이 비판하는 '사회'자체에 집중하면서 오히려 사회야 말로 '유토피아'적인 공간이라고 설정하게 된다. 그래서 맑스주의자들이 말하는 '사회주의'는 가정과 국가의 문제와 모순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단순히 인간을, 가족을, 국가를 해체하자는 논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사회의 발현은 그 자체로 시장과의 대립각을 만들어 냈다. 이를 칼폴라니는 사회의 이중운동이라고 이야기한다. 사회가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침투당해서 자본화되는 거대한 전환이 있는 반면에, 사회가 생존하기 위해서 대안을 만들고 대항헤게모니를 축정하여 카운터를 날리는 방식이다. 이러한 카운터가 때론 사회주의가 되고 가끔은 무정부주의가 되며 다른 방식으로는 공동체주의로 변환되기도 했다. 또한 이중운동의 중첩적인 부분에서 사회민주주의, 사회자유주의와 같은 결합의 체제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각 사회마다 시장의 권력인 '상품'이 어떻게 스며들어가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제임슨의 작업이었다.
제임슨이 보기에 초기 자본주의에서는 상품은 '교환'을 통해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결합으로 이루어졌지만, 점차 사용가치보다는 교환가치로로 바뀌어 가면서 화폐가 등장하고 화폐 자체로는 이데올로기도 아니고 꿈도 아닌 '물화'가 되어 버리는 인간존재가 구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정치적 무의식'에 자리잡은 '유토피아' 혹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꿈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꿈, 유토피아, 인간이 바라는 이상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것이 바로 제임슨의 고민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은 어떤 주제던지 미래에 대해서 투사하고 있는 '문학작품'의 텍스트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유토피아가 등장했다. 단순히 장르로서 SF소설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나온 모든 문학작품들이 유토피아의 일부분을 이야기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학작품에는 그 자체로 '사회'를 상정할 수 밖에 없으며(주인공 혼자만 나오는 작품은 없으며 혼자 독백을 하더라도 사건은 항상 타자와의 관계이다) 일정한 시점이 존재한다. 기록된 문학작품은 그 자체로 일정한 역사를 반영하는 요소가 되는 것이다. 역사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문학작품의 텍스트들이다. 인물과 사건 그리고 배경을 가진 작품들은 그 자체로 '자연적'인 것이 아니며 일단 글을 읽기 시작하면 현실을 '낯설게 보기'시작하기 때문에 어떤 텍스트라도 문학작품은 일상 생활에 대해서 메타코멘터리를 가질 수 밖에 없다. 실재의 삶에서 우리가 느끼는 생각이 코멘터리라면 문학작품은 그에 대한 코멘터리의 코멘터리이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의 세가지 지평
모순을 해결하는 상징적 행위 : 문학은 모순적인 현실 속에서 실재와 상징의 연결을 통해서 드러나지 않은 '상상'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곧 이데올로기에 대한 상상이다.
유토피아를 만드는 이데올로기의 재료 : 계급적, 성적, 인종적 측면에서 은폐되고 하브텍스트가 된 이데올로기의 재료들을 꺼내에 유토피아를 만들어내는 재료로 사용한다. 다시 말하면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수 많은 이데올로기들은 유토피아의 재료가 되다.
생산양식과 관련된 '장르' : 로맨스, 서사시, 비극, 코메디와 같은 장르는 장르 자체로 상징과 해석을 요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같은 주제라도 장르를 선택하는 것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효과를 줄 수 있다.
프레드릭 제임슨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한마디로 '메타인지'가 떠오른다. 혹은 '메타코멘터리'가 떠오른다. 그의 책에서도 '알레고리적 인식'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총체성에 대한 갈구와 파편화된 인간성을 문학작품으로 회복하려는 시도를 볼 수 있다. 역사를 전반적으로 조망하는 것은 결국 역사의 이행 과정을 하나하나 들여다 본다는 것이고 그것을 보는 방법은 문화양식을 통해서 '문화혁명'이 일어나는 때이다. 이전에 살던대로 살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살게 될 때 우리는 역사가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변화'에 관점을 가지고 약동하는 인간의 문화와 역사를 바라보고 있으면 현재의 문제와 이데올로기들의 붕괴가 새로운 사회를 열어낼 것이라는 기대도 가지게 된다.
언제나 있는 것은 없는 것을 상징하면, 없는 것들은 있는 것들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 우리가 슬픔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슬프지 않은 상황이 있어야만 그렇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유토피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현재의 절망이 처절하게 유토피아의 희망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무의식이 문학작품으로 쓰여지듯이 일상에서의 말과 표현들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다가오는 것들을 예견해준다. 프레드릭 제임슨의 '정치적 무의식'에 이끌려 여기까지 왔다. 이제 문학작품을 제대로 읽어야 할 때이다. 제임슨에게 배운대로 제임슨을 넘어서는 메타코멘터리의 방식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