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읽는 영미철학_화이트헤드편
통계와 양적연구에 관심을 가지면서 소위 말하는 '영미철학'전통의 분석철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독일철학이나 프랑스철학의 관점에서 영미철학을 비판하는 것은 쉬운데 막상 그 철학 안으로 들어가서 내부적인 비판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 더욱이 과정 안에서 발견되는 사실과 진리들이 계속해서 연결되어 가는 학문의 구조에서는 단순히 멈추게 한다고 멈추는 것이 아니다. 베르그송이 말하는 '지속'의 관점에서 그리고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와 반복'의 관점에서 계속되어지는 것들은 그 나름대로의 프로세스와 단계가 있다. 이러한 과정을 기술하는데 있어서 화이트헤드를 이해하는 것은 시작이자 마지막처럼 보여진다. 그동안 화이트헤드에 대한 공부를 조금씩 하면서 정리해 놓은 글들을 이제는 내가 이해하는 방식으로 다시 정의해야할 때가 온 것 같다. 나름의 상상의 세계를 펼쳐보이는 글이 될 테니 쉽지 않은 작업임에는 분명하다. 철학아카데미에서 배우고 '처음읽는 영미철학'을 다시 음미하면서 정리한 글을 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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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역사는, 아니 이성의 역사는 비합리적인 것들이 합리성의 옷을 입어 가면서 만들어진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움직이는 모든 것들은 그 나름대로 지속하기 위해서 일종의 '체계'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 체계는 내부 조합들의 순서와 연결이 계속된다는 점에서 합리적인 체계라고 말한다. 그러니깐 존재하는 모든 것들, 특히 계속해서 지속하고 움직이는 것들은 생물이든 인공물이든 합리적인 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합리적인 체계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합리적인 이성'의 힘이다. 이성이 가진 힘으로 이 세상에 지속되고 반복되면서 유지되는 존재들을 분석할 수 있다면, 이것은 해체의 작업이면서 다시 생성의 시작이 될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과정과 실제'라는 책에서 다양한 범주를 동원하여 세계의 합리성을 정의한다. 영미철학의 전통이자 분석철학의 핵심이었던 '언어'로 구성된 세계와 그 분석에 찬 물을 끼얹으며 생성하는 세계는 분명 이성이 인식하는 방식으로 기술할 수 있지만 또한 반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기술할 수 없는 것도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언어를 랭귀지로 치환하지 않고 의사소통을 위한 모든 표현의 수단으로 확장한다면 이론이나 공식, 방정식이나 통계, 그림이나 상징으로 표현되지 않는 것들은 '언어화'되지 안핬다고 할 수 있는가? 언어로 표현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가? 이런 고민 속에서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철학을 구성과 헤체의 경계 위에서 구축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계를 계속해서 달려나가면서 표현되지 않는 것과 이해되지 않는 것들을 발견해 나가는 '관념의 모험'을 쓰게 된다.
비형식적이고 비합리적인 세계에서 새로움이 나온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지식이라고 부르는 학문의 체계는 사실 '비형식적이고 비합리적인 것'들을 '합리적인 기준'과 '공통으로 정한 지표'를 가지고 분류해내는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매번 정의해도 항상 비끄러져 가는 정의를 잡아 두기 위해서 규정짓고 분석하고 일단 언어로 박제해 놓은 것이다. 움직이고 항상 흐르는 시간과 존재의 움직임들을 언어로 잡아 놓기 시작하면 조금 후에 그 순서가 뒤 바뀌어 버린다. 움직이는 것들을 움직이지 않는 것들로 정의내리고 다시는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그 사이에도 계속 우리의 삶은 움직이고 존재는 꿈틀대며 새로운 옷을 입고 다양한 표정으로 삶 속에 침입해 들어 온다. 합리성의 관점에서 체계를 구성하게 되면 비합리적인 것들은 곳 합리성을 공격하는 요소가 되어 버리기 때문에 이러한 태도를 '보수적'이라고 말하게 된다. 진보는 그런 의미에서 계속해서 약동하는 움직임을 인정하려는 이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의 역사에서 지금도 논쟁적인 주제가 있다. 만물은 변하는가 아니면 고정적인가? 존재하는 것만 말할 수 있는가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 것도 말할 수 있는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존재하는가 아니면 말할 수 없드면 존재하지도 않는 것인가? 바로 헬라클레이토스의 '판타레이'라는 만물유전의 사상과 그 반대푠의 파르메니데스의 논쟁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물질과 기억에서 헬라클레이토스의 만물유전의 사상을 받아들여서 이 세계는 실재로 존재하는 것들의 원질etoffe이 지속duree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지속은 항상 다른 생성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합리성'으로 가두어 놓은 범주라는 개념으로는 절대로 볼 수 업는 영역이 된다.
실재와 이상을 연결하려고 했던 낭만주의자 헤겔은 이러한 약동을 어떻게든 이성의 힘으로 합류시키기 위해서 '변증법'을 만들었다. 움직이고 지속적인 것들이 난무하는 실재라는 영역을 지배하기 위해서 그 전에 만들어 놓은 '개념'을 대입하고, 개념이 포섭하지 못하는 영역까지 외연을 확대하여 생성하는 존재들을 모두 포함하는 '추상적인 생성'의 방식을 제시한 것이다. 역사를 헤겔의 방식으로 보게 될 경우 기존의 '개념'으로 만들어진 집에 계속해서 움직이는 존재들을 집어 넣을 수도 있고 아니면 제거할 수도 있기에 이러한 헤겔의 변증법은 이후 맑스주의를 포함하여 히틀러나 전체주의의 원흉이 되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 베르그송은 실재의 존재들이 약동하는 것은 금지해야될 것이나 잠잠하게 만들어야 할 것이 아니라 '자기창조'의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반복되는 것들은 반드시 차이를 생성한다.
그 차이가 곧 우리의 개성이 된다
베르그송은 존재들이 약동하는 이질적인 생성이 곧 자기차이화self-differentiation이며, 이것이야말로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존재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인간은 한번도 똑같은 시간을 다시 살아낼 수 없으며 우리가 방금 지었던 표정과 눈빛 그리고 상대방과 나눈 대화는 다시 돌아올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대화' 혹은 '만남'이라고 하면서 같은 것으로 놓지만 실재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이렇게 우리의 이성은 언어 속에서 경험을 포섭하고 있기 때문에 '차이'가 기억되지 않는 경험은 곧 사라지고 만다. 이에 대해서 베르그송의 철학을 헤겔과 플라톤의 대안으로 제시한 들뢰즈는 우리가 경험한 사건의 '이미지'와 '감정'은 절대로 비교될 수 없고 사라질수도 없다고 말한다. 인간의 기억은 이미지와 감정이 연결되어야만 기억이 된다. 그리고 어떤 사건도 우리의 삶에서 이미지와 감정이 없었던 것들을 없다. 다만 스스로 만든 '일상'이라는 범주 안에 이미지와 감정을 넣어 버림으로써 우리는 일상을 스스로 지우고 있을 뿐이다.
들뢰즈는 그래서 모든 존재는 '차이와 반복'의 거친다고 말한다. 반복되는 것들은 반드시 차이가 나게 되어있고 차이가 나는 것들은 반복되면서 자기 창조의 형상을 일정하게 보여주는데 이것이 바로 '지속'이라는 개념이다. 그러니 이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지속하는 존재들은 언제나 차이가 반복되게 나타나면서 존재할 수 있게 된 것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들뢰즈는 인식할 수 없는 대상, 인간이 자신의 인식을 떠나서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한 투영을 금지하면서 이것을 프로이트와 다르게 '무의식'이라고 했다. 여기까지는 프랑스철학의 '존재와 존재 사이의 진리'를 보여주는 흐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영미철학으로 넘어오면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실재를 합리화하는데 철학의 과제가 있다고 보았다. 다시 분석철학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만물유전의 세게를 어떻게 철학으로 합리화할 수 있을까?
언어는 언제나 실재와 상상의 연결이다. 실재는 보통 자연을 기반으로 해서 인간이 만든 인공물과 인간자체를 포함한다. 그런데 언어는 원래 '기원의 기원'을 찾아가면 그 존재의미를 잃어 버린다. 이렇게 하자고 해서 정해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원이 전통이 되고, 전통이 연속이 되면 사람들은 계속해서 언어를 기반으로 생각하게 되고 언어 바깥으로 나갈 수 없게 된다. 이것이 화이트헤드가 보기에 분석철학이 가진 한계였다. 이 지점에서 리처드 로티는 분석철학 바깥으로 나가고, 화이트헤드는 분석철학 안으로 들어온다. 그러니깐 언어 안에 들어 있는 실재와 상상의 '매칭'관계를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놀이라고 했고 말할 수 없는 것들은 증명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화이트헤드는 오히려 반대로 존재하는데 말할 수 없는 것들은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서 그 존재를 인정해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개념은 장소와 시간의 중간지점에서 매번 새롭게 만들어진다
개념이라는 것은 독일의 역사학자 라인하르트 코젤렉의 의하면 '장소'와 '시간'이 겹치는 지점에서만 나온다. 그러니 장소가 바뀌거나 시간이 바뀌면 개념이 조금씩 이동하거나 완전히 바뀌게 되는 것이다. 언어를 사용하는 장소가 그대로라도 시간은 언제나 흐르기 때문에 과거에 '실재와 상상'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단어'들은 언제나 새로운 표현으로, 새로운 언어로 탄생해야 한다. 그런데 화이트헤드가 보기에는 새로운 실재를 만들어내는 과학의 발전과 산업의 발전에 맞게 우리의 언어는 못 따라가고 있고 그에 따라서 구체적인 맥락을 잃어버린 언어가 사람들을 잘못놓인 구체성의 오류에 빠지게 한다는 것이다.
그 시대에 맞는 언어도 중요하지만 지금까지 모든 언어들은 사실 자연 그대로의 속성을 표현하지 못했고 엉뚱한 추상이 마치 기원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지금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철학은 '신비함'마저도 합리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언어가 자체적으로 가지고 있는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 자유로운 범주들을 새롭게 구성하여 인간의 다양한 경험들을 모두 포함할 수 있는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자 했다. 그래서 화이트헤드의 철학에는 아주 낯설은 표현들이 등장하고 새롭게 규정된 것들이 매번 새롭게 다시 규정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마도 화이트헤드는 지금도 그 언어들은 모두 생성을 담아내기 위한 '과정'에 있는 표현이라고 말할 것이다.
어떤 책을 읽다가 '경험'을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을 만나면 책표지를 둘러본다. 그러면 여지 없이 영국이나 미국학자들이 쓴 책이 대부분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만들어진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어떤 경험을 했는가에 따라서 우리는 다른 존재가 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 존재는 곧 '경험의 산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미철학은 좋은 경험이란 무엇인가에서부터 경험을 우리 내부로 체화하는 과정은 어떤 단계를 밟아야 하는지에 대한 자세한 안내와 설명이 있다. 1단계에서 5단계까지라던지 프로세스 메뉴얼이라던지 실제로 현장에서 해야하는 행동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적어 놓는 것이다. 여기에 놓여있는 전제는 '경험'에 따라서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경영학에서 평가지표로 많이 쓰이는 Key Performance Indicator라던지 흔히 이야기하는 퍼포먼스를 한다라는 표현들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들이다. 페미니즘에서는 남성성과 여성성은 어떤 퍼포먼스를 축적하는가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보고 국제개발학에서는 제도가 만든 경로의존성이 결국 사람들은 원조의 노예로 만들고 식민지제도의 후예로 만든다고 말한다. 그러니깐 어떤 Performance에 따라서 다른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고 퍼포먼스는 성과이고 성과는 곧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피로사회를 쓴 독일의 한국 철학자 한병철은 '성과주체'라고 말한다. 이것은 독일철학의 관점에서 영미철학을 비판하는 지점처럼 들린다.
경험의 종결은 존재의 종결이다
모든 존재자들은 화이트헤드가 보기에 다른 사람과의 경험을 공유해 가면서 자신을 구성해가는 과정적 사건의 결과물이다. 살아 있는 동안 주체는 매번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고 그 경험들이 쌓여서 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구글이나 페이스북 그리고 데이터사이언스를 이끌어가는 미국의 MIT와 같은 곳에서는 이러한 철학에 근거하여 '로그파일'을 만들고 데이터들을 모아서 새로운 존재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AI로 발전하게 되면 결국 마빈 민스키가 이야기하는 내부의 소사이어티가 하나의 거대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을 분석해서 기계에 적용한 것이 AI의 특징이고 이러한 철학의 전재는 결국 화이트헤드와 같이 경험의 총체로써 인간을 가정한 것이다. 여기서 데카트르의 코기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화이트헤드에서는 '나는 경험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되는 것이다.
경험을 하는 그 순간은 '현실적 계기'acutual occasion이다. 우리는 매 순간 현실적인 계기를 만나고 그 안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생성되는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이다. 현실적 계기는 언제나 연속적이면서 모두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현실적 존재는 이러한 현실적 계기 안에서 매번 생성과 소멸을 경험한다. 그리고 이전까지의 현실적 존재들은 새로운 현실적 계기를 맞이하여 새로운 현실적 존재들이 되기 때문에 이는 곳 바로 직전까지의 존재들을 뒤로하고 지금현재 만들어지는 존재로 다시 옷을 입는다. 이것이 바로 지금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인터넷에도 들어 있다. 이렇게 글을 쓰고 저장을 누르면 글은 가장 최신화된 업데이트가 기록으로 남는다. 저장을 누루기 전까지는 다양한 글들이 쓰여지다가 저장을 누르는 순간 이제는 쓴 글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현실적 계기는 항상 열려져 있고 그 안에서 현실적 존재들은 생성하고 소멸을 반복한다. 그러니깐 현실적 존재는 언제나 '과정' 속에 있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현실적 존재들의 자기구성이 단지 물질의 구성에만 그치지 않고 인식의 구성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깐 존재의 생성과 소멸은 다시 인식의 생성과 소멸에도 영햠을 미치는 것이다. 물질 자체만 만물유전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 역시도 만물유전하는 것이다. 모든 철학자들이 원하는 꿈이긴 하지만 하나의 '이론'이나 '원리'로 세상을 설명하려고 하는 의도를 화이트헤드 역시 '현실적 계기'와 '현실적 존재'라는 틀 안에서 '경험으로 만들어진 존재와 생각'으로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접근은 이전까지 이성을 중심으로 이어져온 서양철학 전면을 뒤집은 것이다. 새로운 주체가 등장하는 것은 이미 주체의 모형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고 하는 플라톤주의와 정초주의를 뒤집고 과정 안에서 자기동일성 없이 매번 생성되고 사라지고 다시 만들어지는 존재를 가정하는 것이다. 하나하나 생성과 소멸의 사건은 소우주적인 과정이며 이러한 소우주들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대 우주의 사건은 바로 지구를 넘어서 태양계, 그리고 안드로메다를 넘어선 거대한 우주의 운영원리이기도 했다. 공간적인 생성과 시간적인 생성이 서로 연결되고 연속되는 가운데 만들어지는 '과정' 안에서 존재는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소우주로써 서로 연결되어 있고 또 서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유기체'철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 어느것 하나 연결되지 않은 것들이 없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철학의 흐름을 어느정도 이해했다면 이제 화이트헤드 스스로 만들었기 때문에 난해하면서도 창의적인 개념들을 하나하나 알아보자. 창조성은 존재를 존재로 만들어주는 가능태이면서 앞으로 추동하는 작용인이라고 할 수 있고 영원한 객체는 이러한 창조성과 만나서 자신의 주체성을 만들어가는 제작인이다. 그리고 이 창조성과 영원한 객체가 만날 수 있도록 중간에 매개하는 것이 바로 신이다. 신은 그 자체로 보이지 않고 작용하지 않지만 이 두가지가 만날 때 현실적 계기 안에서 새로운 객체가 창조성을 입고 탄생하게 된다. 사실 모든 만물이 이런 방식으로 약동하고 생동하고 정동하게 된다. 따라서 신은 그 자체로 어떤 형성으로 대표되지 않고 이런 만물의 생동과 함께 계속해서 변화를 받아들이면서 새롭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로 화이트헤드의 철학이 빛을 발한다. 이러한 전제가 깔리면 우리가 바라보는 자연, 사람, 우주는 모두 생동하면서 동시에 과거가 되고 또 미래를 불러오는 현실적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세계관을 탑재하면 '할 수 있다!'라던지 '야망을 가져라'라던지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라는 전제를 자연스럽게 자신의 철학으로 만든다. 영미철학이 '경험'과 '도전'을 중요시하면서 새로운 계기를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개척정신의 핵심에는 바로 이러한 철학이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형성적 요소
창조성 creativity : 현실적 세계에 새로움을 부여하는 제한이 없고 규정이 없는 힘.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으로 보면 작용인. 창조성은 이접적 방식으로 주어지는 다자의 우주를 연접적 방식으로 구현되는 우주인 하나의 현실적 계기를 만드는 궁긍적인 원리. 궁극적인 사태를 특정짓는 보편자들의 보편자. 그러나 직접 객체로 활동하지 않고 사물에 내재되어 있는 가능태로써 영원한 기체substatum이라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를 뒤집어서 현실적인 존재는 작인이면서 창조서는 의존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따라서 창조성은 작용인인것 같지만 사실은 수용자receptacle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일 질료'prime matter라고 할 수 있다.
영원한 객체 eternal objects : 창조성이 가진 힘을 일정한 방식 및 방향으로 한정짓는 역할. 제작인. 가능태로서 창조성과 결합하여 특정한 현실적 존재의 정체성을 구성하면서 현실화가 된다. 이를 '실재적 가능태'real potentiality라고 하며 생성을 마감한 과거의 현실세계와 구별하여 '순수 가능태'pure potentiality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로 치면 형상, 본질, 보편자, 속성이라는 개념과 비슷하며 순수하다는 것은 것은 일정한 형태가 있는게 아니라 다양한 형태로 구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 Unmoved Mover : 창조성과 영원한 객체를 매개하는 존재. 목적인. 창조성과 영원한 객체는 그 자체로 작용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둘을 매개하는 존재가 필요하다. 신은 영원한 객체들을 자기화하면서 언데 되는 성격을 '원초적 본능'primordial nature라고 부르며 이는 현실세계를 초월한다고 본다. 그러나 또한 신은 시간적인 세계 속에서도 완결되는 모든 현실적 존재들을 남김없이 경험하는 가운데 자신을 구성하기 때문에 '결과적 본성'consequent nature라고 한다. 결과적으로 신은 현실세계에 내제하면서도 초월하기 때문에 원초적 본성과 결과적 본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화이트헤드에 대한 접근은 여러번 시도했었지만 사실 쉽지 않은 과제이기는 하다. 앞으로 그렇다면 현실적 계기 안에서 창조성과 영원한 객체가 어떤 방식으로 생성되는지와 상호 연결된 세계 속에서 각자의 프로세스는 어떤 방식으로 만나는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한국 사회에서는 이러한 철학의 결과로 사회가 대부분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느낀다. 우리가 사용하는 인터넷 안에서 사용자 규칙이나 객체지향 프로그램, 실제 삶에서 신호등 체계나 신용카드 사용방식 등등 모든 것이 영미식의 라이프스타일로 덮여져 있다. 심지어 키오스크의 원리도 영원한 객체들이 창조성을 수용하여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한 '유혹'적인 서비스가 제공되고 있다. 만나면 달라지고 달라지면 다른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자연스러워하는 것들이 나에게 자연스럽지 않게 될 때 비로소 철학은 시작된다. 태어나면서도 부터 각종 전자기기와 갖춰진 시스템에서 어떤 의문도 갖지 않은 사람에게는 철학이란 한낱 부질없은 신선놀음일 뿐이다. 그러사 속지 않고 방황하는 자들에게는 화이트헤드의 말처럼 다른 창조성이 다른 객체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격게 될 것이다. 그러는 한에서만 영미철학을 바라보기로 하고 그것을 추앙하거나 신격화하는 것은 멈추기로 했다. 영미철학이나 중세철학, 독일철학이나 프랑스 철학 등등을 다 둘러보고 오면 다시 한국에서는 어떤 철학으로 지금까지 살고 또 유지하고 있나라는 생각이 들고, 과연 우리에게는 철학이 있었는가?를 고민하게 된다. 다음 시간에서는 현실적 계기 안에서 화이트헤드의 파악, 느낌, 판단을 알아보고 이를 통해서 영원한 객체가 현실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