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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Sep 19. 2023

매킨타이어와 공동체주의

처음읽는 영미철학

0. 들어가기


자신이 본 받고 싶은 롤모델이 있나요?


자신이 본 받고 싶은 롤모델을 머릿속에 떠올려보자. 그러면 그 떠올린 사람이 내게 했던 일들, 사회에 기여한 바와 매일매일의 습관들이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의 미소가 마음 속을 쓸어 내리면서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흐믓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자신의 롤모델이 있는 사람에게는 인간 자체에 대한 어떤 기준이 생기게 마련이다. 오늘 살펴볼 공도체주의자의 아버지격인 매킨타이어는 이것이 바로 '덕'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이유라고 말한다. 우리가 어떤 최상의 존재를 그려볼 수 있다면 그 최상의 존재는 탁월함을 가지고 있고 그 탁월함이 곧 덕이 된다고 말이다. 최선의 인간과 최후의 인간이 나오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비유 때문이다. 오늘은 공동체주의자로 알려진 매킨타이어가 비판한 자본주의 문명과 그에 대한 대안으로서 공동체의 중요성에 대해서 알아보자.




1. 공동체와 사회의 정의


공동체란 무엇인가?


여러가지 출처를 가지고 올 수 있다. '꼬뮌'이라는 단어로 가져올 수 있고 '공동의 것'이라는 것도 가지고 올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공동체는 2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한가지는 '공유된 정체성'이다. 일명 shared identity! 물론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가 많지만 오늘 알아볼 매킨타이어는 이러한 공동체의 정체성은 '내러티브' 즉, 공동체가 공유하고 있는 이야기에 있다고 말한다. 스토리텔링이 바로 공동체의 정체성을 연결해주는 다리가 되는 것이다. 또 한가지는 '지속적인 관계'이다. 이른바 sustainable relationship이다. 아무리 정체성이 같은 이야기를 공유하고 있더라도 지속적인 관계가 없다면 공동체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멀리있는 친척보다 매일 만나는 이웃이 더욱 공동체라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공동체는 지속적으로 만나면서도 동일한 정체성 즉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면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보면 세대갈등이 사실은 정체성의 갈등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정체성의 갈등은 곧 듣고 있는 이야기가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하물러 몇 번 만나지도 않은 관계라면 그 사람들과는 아예 남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공동체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과는 같은 공동체라고 말할 수 없게 되는 것이며, 더욱이 자유주의자들에게는 공통의 이야기가 필요 없기 때문에 더욱이 공동체라는 것은 '상상력'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이러한 공동체가 아닌 개인들을 모으기 위한 방법이 고안되어야 했다. 따라서 루소와 로크, 홉스와 같은 자유주의의 세례를 받은 계몽주의자들이 만들어낸 개념이 바로 '사회' society라는 개념이다.



사회는 일정한 '목적'을 중심으로 모이는 집단이나 그룹을 말한다. 우리가 회사를 공동체라고 안그러고 사회라고 하는 이유는 바로 '봉금', '이윤추구', '승진'과 같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싫지만 모여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사회는 그래서 일정한 계약이 존재하게 되고 자유주의자들이 일정한 계약에 따라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계약이 파기되면 언제든지 사회는 깨질 수 밖에 없다. 사회는 일반적으로 시민사회도 있지만 군대도 사회이고 직장도 사회가 될 수 있다. 다양한 사회의 범주 안에서 자신이 있는 곳이 '목적'이 없으면 헤쳐없어지는 곳이라면 사회가 되는 것이고 목적이 없더라도 공유된 정체성을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바로 '공동체'가 공동체가 되기 위한 방법을 고민한 것이 공동체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공동체주의자들은 현대의 문명이, 정확하게는 자본주의적인 문명이 사람들 사이의 파편화된 정체성을 가지고 왔으며, 새로운 기술문명이 사람들 간의 관계도 파괴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공동체주의자들에게는 일정한 공통점이 보여지게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파편화'에 대한 대안과 '낯선 인간들'이 어떻게 친근한 관계로 바뀔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대륙마다 조금씩은 다르지만 유럽대륙의 경우 '대화와 토론'을 통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정체성을 나눈다고 본다면 미국대륙의 경우에는 '함께하는 경험'을 통해서 정체성을 곤고히하기도 한다. 그래서 동아리 모임이나 취향을 나누는 모임의 경우가 같은 경험을 하면서 공동체를 만들어가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인공지능의 공동체를 만들고 싶었던 마빈 민스키의 그 유명한 '마음의 사회'



2. 자유주의자와 공동체주의자


공동체에 대한 정의를 하다보면 자유주의자와 공동체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을 살펴보는 작업이 매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래서 현대자유주의자를 대표하는 존 롤스와 현대 공동체주의자를 대표하는 매킨타이어를 비교해보면서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싸움에 대해서 알아보자. 먼저 공동체주의와 자유주의를 가르는 가장 큰 기준점은 바로 '자아'라는 개념이다. self라고 하는 개념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한 논쟁은 역사항 항상 있어왔다. 자유주의자들에게 '자아'는 인간이 원래 가지고 있는 개념이면서 사회는 오히려 이러한 인간의 자아가 자유롭게 성장할 수 있는 여러가지 장애요소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규제'나 '도덕', '약속'과 '계약'같은 것들은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들이 군집해 살면서 그럴수는 없기 때문에 최소한의 기준들로 인간의 자유를 지켜야 한다는 논리가 생긴다.


반면에 공동체주의자들은 인간은 태어난 자체로는 '빈 서판'으로 아무것도 입력되지 않은 상태로 태어났고, 그에 따라서 어떤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어떤 교육을 받는가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보았다. 따라서 처음에 만나는 공동체인 '가정'의 중요성을 인지하면서 점차 공교육에서 받게 되는 '스토리텔링'이 어떤가에 따라서 자신이 그리는 미래상과 현재의 자아를 연결하는 작업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공동체가 가진 '전통'을 익히는 일이며, 이러한 전통이 '교육'을 잘 발현되도록 해야 '전인적인 인간'으로서 인간의 덕과 예의를 갖추면서 공동체에 기여하는 인간으로 살게 된다는 것이다. 공동체주의는 사실 자칫하면 전체주의로 빠질 수 있는 오류가 있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자들의 비판대에 오른다.



자유주의를 이야기할 때 '칸트'를 이야기하는데, 칸트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선험적으로 가지고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바로 오성의 기능인데, 경험을 하지 않아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능력을 말한다. 동양에서는 측은지심과 같은 단어겠지만 서양에서는 인간이 태어나서 12가지의 관점에서 세사을 보도록 셋팅되었다고 믿는다. 칸트가 말하는 '물자체' 즉 사물 자체는 우리가 온전하게 인식할 수 없이 완전히 떨어져 있지만 인간이 가진 오성의 능력으로 그것을 우리의 관념 속에서 '상상'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상상을 우리는 '이성'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12가지의 범주(양, 질, 무게, 부피, 색 등등)로 시시비비를 가려내는 '순수이성'이 있는 반면에, 사물이 어떻게 움직여야 하고, 어디에 있어야 하며, 무엇을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성인 '실천이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구분을 잘 할 수 있는 '판단력'까지 갖추고 태어나기 때문에 인간은 어떠한 연고가 없어도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칸드를 기반으로 자신의 절차적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존롤스의 기반이다.


그에 비해서 공동체주의자들은 한 사회가 지닌 가치나 도덕의 우선성은 항상 그 사회가 가진 맥락과 구별해서 볼 수는 없다고 믿었다. 우리가 18세기에 태어났다면 다 같이 레지스탕스가 되어서 혁명의 나팔을 부르며 '자유'를 외쳤겠지만, 1950년대 미국에서 태어났다면 '인권운동'을 외쳤을 것이다. 또한 1930년대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대한독립'이라는 시대적 가치를 따랐을 것이고 1000년에 태어났다면 중세시대의 가장 큰 가치였던 '거룩'을 외쳤을 것이다. 공동체주의자들은 이렇게 사회적인 맥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공동체가 결정하며 그 공동체가 결정한 중요한 가치가 바로 '공동선'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공동체주의자들은 이러한 공동선을 지키기 위한 교육의 중요성과 공동선이 잉태되는 '전통'의 중요성을 놓치지 않는다.




3. 매킨타이어의 덕윤리


이제 본격적으로 매킨타이어의 덕윤리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매킨타이어가 이야기하는 '덕'은 그 자체로만 존재하지 않고 '덕 윤리' Virture Ethics 를 발생시킨다. 덕은 원래 그리스어로 아레테arete에서 유래했다. 아레테는 탁월함 혹은 훌륭함이라는 영어단어 exellence와 같은 뜻을 가진다. 따라서 매킨타이어의 덕윤리는 탁월하고 훌륭한 수준에 이른 사람을 말한다. 어떤 공동체에서 '최고로 훌륭한 사람'이 있다면 인간의 '최고점'이 그 훌륭한 사람만큼 증명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의 기준점이 '최상의 상태'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기준점을 가지고 비교적으로 사물과 사건을 바라본다. 그런데 문제는 가장 최저점을 가지고 인간을 보느냐 혹은 최선의 상태를 보고 인간을 보는가인가이다.


덕의 최선은 탁월함이다


하나의 씨앗이 인간의 본성에 심긴다고 생각해보면 그 씨앗이 최고로 잘 자라서 완성된 모습으로 자랄 것으로 예상할지 아니면 곧 성장하다가 말라죽는 최악의 상태를 예상할지에 따라서 우리가 생각하는 '탁월함'은 달라진다. 이것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의 공동체가 지향하는 지향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지향점을 잡으면 현재 우리의 상태는 과정으로 바뀐다. 탁월한 성장을 위한  공동체의 목적이 정의가 되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칸트와 롤스의 방식과 다른 접근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은 아무런 규약이나 제약이 없을 때에 자유로운 이성을 통해서 자신의 규범을 만들어낸다고 보는 자유주의전통은 매킨타이어가 볼 때는 한쪽으로 치우친 위험한 생각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성적인 부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다양한 문제와 관계 안에서 이성과 감성이 조화를 이루면서 탁월함을 지향하는 통합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탁월함이 지향점으로 잡히면 그 탁월함을 위한 행동과 사건이 만들어지고 이것이 그 사람의 이야기가 된다. 이 이야기는 그 사람이 지향점을 가기 위한 다양한 감정과 생각, 만났던 사람과 관계를 보여준다. 그래서 매킨타이어는 그 사람이 살아온 모습과 성품, 사회적인 맥락 안에서 만들어진 정체성과 같은 부분을 중심으로 덕 윤리가 발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narrative라는 것은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을 넘어서 존재하는 자유로운 인간이 아니라 현실에 뿌리내려서 매번 '현현'하는 인간의 통합적인 반응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감정에 치우지지도 않으면서 생각으로만 만들어낸 정체성'이 아닌 그 사람 본연의 사회와 연결된 '공동선'이 된다. 이것이 바로 매킨타이어가 말하는 덕윤리이며 공동체는 이러한 덕윤리를 전수하기 위해서 교육에 집중하게 된다.


알래스대어 매킨타이어



4. 매킨타이어와 정감주의Emotivism


공동체주의는 항상 공동체를 중심으로 '정체성'을 획득한다. 정체성은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결정하기 때문에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다는 것은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매킨타이어는 공동체 안에서 만들어지는 정체성이 아닌 자유로운 개인들이 선택하는 세계에서는 개인의 선호가 전부가 된다고 말한다. 우리시대의 가장 많이 듣고 싶어하는 것은 '좋아요'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자신이 판단이 주체이고 그 판단한 것만큼 선택하고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과 선호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 자유주의가 주는 달콤한 유혹은 공동체를 떠나서 자유를 만끽한다는 것이지만, 그 만큼 파편화와 단절감으로 인해서 외로움이라는 병은 죽음에 이르는 수준까지 이르게 된다.


정감주의는 바로 자신의 정서적인 감정이
가장 중요한 선택이 된다는 것이다.


 매킨타이어는 이러한 정감주의가 단지 개인의 선택에만 국한되지 않고 국가의 정첵이나 안보, 정책과 제도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사회의 가치나 공동선의 문제를 논의할 장으로서의 국가가 아니라 자신의 행복을 효율적으로 증진시켜주는 국가는 정감주의의 관점에서 좋아요, 싫어요로 답할 수 있는 수준으로 떨어진다. 그렇게 되면 자유시장경제와 국가운영이 서로 연결되면서 자본주의의 최고의 가치인 '효율성'이 국가운영의 핵심기초가 되면서 사람들의 삶의 가치가 아니라 국가자체의 운영의 효율성만 따지게 된다. 불평등이나 사회적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좋아요!'를 더 많이 누르는 국민들을 만드느라 미래에 대한 기획아나 비전도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 보는것과 같이 좋아요로 대변되는 정감주의적인 국가에서는 개인의 정치참여는 불가능하게 된다. 국가가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주는 '행복국가'라는 미명아래 개인이 가진 권리를 국가에 이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엘리트주의에 따른 관료제국가로 바뀐다. 여기에 경제시스템이 자본주의와 맞물리면서 권위주의적이고 관료적인 국가의 정체성은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서 이양된 권리를 일부 엘리트들이 자연스러운 독재를 해도 괜찮은 방식으로 바뀐다. 다만 '행복하게만 해줄 수 있다'면 말이다. 따라서 이러한 국가관에서는 '탁월함'이나 '훌륭함'이라는 덕성이 중요하지 않고 무엇을 제공하는지에 대한 논의만 진행되기 때문에 국가는 점점 사회문제와 개인화로 인해서 쇠퇴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자유로운 개인의 선택은 정치에서는 물러나고 경제에서는 '효율적 선택'만 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이러한 시기가 30년이 지나가면 이들의 자녀들은 아예 '탁월함'이나 인간의 덕선, 최선의 인간을 그릴 수 있는 능력이나 비전도 사라져버려서 전반적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조차도 사라진다. 좋은 삶과 공공선을 이루기 위한 삶의 방향성이 사라진 현대국가에서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잃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거나 배려하는 것도 큰 의미가 사라져 버린다. 아주 정확하게 한국이 걸어온 지난 70년의 시대가 이러한 매킨타이어의 분석과 딱 드러맞는다. 오직 스펙으로 사람들을 서열지우며,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는 저 뒷전으로 보내버린 우리에게 동물과 인간의 차이라던지, AI보다 내가 더 나은게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매킨타이어는 이러한 현대사회를 상징하는 직업을 3가지로 제시한다. 관리자manager, 심리치료사therapist, 미학자aesthete이다. 이 세직업은 모두 현실과 동떨어져서 제 3자적 입장을 취한다. 다시 말하면 사회적인 맥락을 떠나서 객관적이라는 허울을 가지고 비판적인 평가를 하게 된다. 이것은 공동체 안에서는 사실 각자가 서로를 위해서 해야할 일이지만 이것이 직업으로 잡히면서 좋아요와 감상의 포인트를 해석해주는 역할만 강조되는 것이다. 전문성이라는 미명아래 공동체의 맥락을 떠난 매니져와 심리치료사와 미학자들의 해석에 자신의 정체성을 두고 있는 개인은 결국 순환적으로 다시 맥락에서 제 3자가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매킨타이어의 해답은 명확하다.


공동체를 회복하는 것이다. 사회적이고 역사적이면서 문화적인 특수성이 그대로 녹여 있는 개인의 삶이 중요해지는 이유는 바로 '공동체'안에서 정체성을 만들어 갈 때이다. 구체적인 사회적 맥락속에서 만들어지는 가치를 함께 추구하는 공동체 안에서 인간은 자신의 자리를 잡는다. 도덕적인 자아라는 것은 자신의 자유를 무한으로 끌어 올려서 '좋아요!'를 선택하는 것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좋아요를 넘어서 함께 걸어가는 가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사랑과 배려와 이해를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도덕적 자아를 가진 사람이 공동체에 많아질 수록 공동체 사람들은 탁월한 삶과 최선의 삶을 추구하게 된다.


공동체 안에서 도덕적 자아는 주체성을 찾는다



5. 서사적 통일성과 전통의 중요성


중세의 가을이 저물어가던 시기 철학에서는 존재론적으로 상위에 있는 '신'의 존재를 제거하였다. 스피노자로 부터 시작된 신학정치론은 하나님이라는 절대자를 제외하고 현실을 만들어 가기 위해서 어떤 방식으로 정치학을 만들어 가야하는지를 고민하게 되었으며 신의 자리를 대체하여 존재하는 정체성을 구성하기 위해서 서사인 narrative를 도입한다. narrative는 보통 나레이션이라고도 하고 이야기라고 부르는데, 현대에서는 이야기의 축적을 통해서 정체성이 형성된다고 믿기 때문에 '공동체주의'에서 narrative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매킨타이어는 이러한 narrative를 공유하는 그룹들이 '서사정 통일성'를 갖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이 바로 전통이 쌓이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공동체의 서사적 통일성인 narrative는 앞서 이야기한 '인간의 탁월성이 공동체적으로 입증된 방식'인 전통으로 축적된다. 그래서 어떤 전통이든지 자신들의 이야기가 있고 이야기에는 사건이 있으며 그 사건에 연결된 사람들이 있다. 흔히 말하는 소설의 3요소인 인물, 사건, 배경의 관점에서도 '전통'은 한 공동체가 서사적 통일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칼 융과 같은 독일의 정신분석학자들은 무의식의 가장 심연에 이러한 전통이 만들어낸 '집단무의식'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집단이 공유하는 이야기와 전통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내면에 심겨진 '상징'이 하나의 의미가 되고, 이러한 의미들의 연쇄가 일어나면서 한 사람의 인생에 적절한 정체성과 도덕적인 방향성을 제시해주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이 이이기하는 인간에 대한 이해는 언제나 개별화되고 파편화되었다

전통은 언제나 서사적인 맥락을 가지고 현장에서 도전을 받는다. 계속 존재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그 당시의 사회적인 맥락과 연결해서도 여전히 보존해야할 가치가 있는가이다. 매킨타이어가 '탁월성'이라는 가치를 인간의 가장 최고의 선이라고 보았던 것처럼 공동체의 전통은 언제나 '탁월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전통을 공유하고 가르치고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으로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의 중요성이 공동체주의자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공동체주의와 공동체주의의 싸움은 언제나 이 '교육'의 내용인 '세계관과 이야기'로 점철된다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이다. 연결해서 '정체성 정치'는 그런 면에서 '공동체주의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각자의 전통과 이야기를 가지고 서사적인 통일성을 이루는 가운데 일어나는 전쟁인 것이다.


공동체주의는 그 시대마다 공유하는 '전통과 이야기'를 통해서 도덕적 주체를 탄생시킨다. 따라서 그 시대마다 중요한 가치들이 있고, 그 가치들을 실현시킬 도덕적 주체가 탄생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프랑스혁명시기에는 '자유'라는 가치가 서사적 통일성을 제공했다면 1950년대 미국에서는 '평등' 혹은 '인권'이라는 가치가 그 공동체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제시했다. 이렇듯이 전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매킨타이어는 현대 자본주의 세계에서 '자유주의자'들이 모든 가치를 부정하고 인간에게 공동체가 필요없는양 이야기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인간의 파편화되고 깨어진 관계에서 인간은 그 의미를 잃어 버린다. 공동체를 벗어나서 혼자서는 살 수 없으면서도 공동체의 변형인 '사회'나 '조직'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공동체와 다른 네크워크도 있지만, 정체성을 전해주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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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은 언제나 '서사'를 가지고 있다. 사회적인 맥락 안에서 사라져가는 혹은 소멸되어가는 인간들을 화폭으로 살려내서 그들의 이야기를 현재로 끌어 온다. 그래서 호퍼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화가의 마음을 만나게 되기 때문에 계속해서 더 보고 싶어진다. 푸른밤이라는 아래의 그림에서는 광대가 가장 중심에 흰색옷을 입고 앉아있고 노동자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 거기에 신사들이 와인을 한잔하면서 여인을 바라보고 있다.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푸른밤은 모두에게 각자의 이야기를 제공하고 있다. 어쩌면 매킨타이어가 말한 서사적 통일성은 이러한 사회적 맥락 안에서 한 자리에 한 시간에 모여진 이들에게 부여된 일체감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싸움은 '자본주의'라는 토대 위에서 계속 진행중이다. 무엇이 맞는지 보다는 자본주의와 더 친화적인지를 고민하는 것 같아서 슬픈 일이지만 명확한 것은 언제나 사람들은 전통이 필요하고 정체성이 필요하며 함께 웃고 떠들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공동체주의의 단점이 극대화되는 '전체주의'가 아니라면 자유주의적 공동체주의 혹은 공동체주의적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것은 어떨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오늘은 매킨타이어의 이야기를 통해서 공동체주의의 핵심은 서사적 통일성과 탁월성 그리고 정체성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오늘은 사람들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푸른밤'이 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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