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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Jun 08. 2023

사회를 비판한다고 뭐가 바뀌나?

위르겐하버마스와 프랑크푸르트학파 3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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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철학으로 유명한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매우 흥미롭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자신들의 후대들이 비판하면서 매번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비판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잘게 쪼개서 이해할 수 있는 단위로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그렇게 잘게 쪼개한 것들을 다시 하나로 모으는 작업들이 일어나는데 이게 바로 '창의성'의 핵심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바로 이러한 '새로운 시대'를 열고 이전의 묵혀있던 정신을 새롭게 밝히기 위해서 비판을 시작한다. 그러니 비판으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비판 후에 새로운 대안들이 등장할 수밖에 없다. 오늘은 위르겐하버마스를 중심으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입장을 들어보고 오늘날 우리가 적용해 볼 수 있는 단서가 있을지 찾아보려고 한다.


프랑크푸르트학파를 함께 공부해보았다. 오늘글은 스터디하면서 정리한 주제들이다.



일단 프랑크푸르트학파에 대해서 알아보기 전에 몇 가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헤겔의 '변증법'에 대한 이해가 그것이다. 변증법이란 '정-반-합'의 관계를 통해서 역사와 시대, 물질이 발전한다는 것을 말한다. 좀 더 철학적으로 말하면 '관념과 이론'이 '정'이라면 '현상과 사건'이 '반'이고 이것들이 서로 모순관계를 극복하면서 '합'으로 간다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면,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정'이라면 2017년 촛불혁명이라는 현상과 사건을 경험한 이후에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는 이전의 1987년의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비폭력적이면서 시민 모두가 참여하는 민주주의로 발전했다. 한마디로 변증법적으로 더 민주주의 원리에 접근하게 된 것이다. 이것을 헤겔은 '정신현상학'이라고 부르고, 이 책에서 정신이 현상과 만나서 새로운 정신으로 상승하는 과정을 '상식을 얻어가는 도야'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러한 상식이 계속 쌓일수록 인간의 관념은 점점 '순수이성'으로 발전하다고 주장했다.


헤겔의 이러한 변증법을 이해하면 이것을 여러 가지에 적용해 볼 수 있다. 한 사람의 인생에 적용해 보면 조금씩 실수를 하면서, 성공의 작은 사건들을 만나면서 변증법적으로 성장한다고 볼 수도 있다. 어떤 조직도 마찬가지고 국가도 마찬가지다. 더욱이 이것을 조금 더 긴 시간과 멀리 있는 지역을 포괄하면 역사도 마찬가지로 이런 방식의 '체제'와 '혁명'을 통해서 더 좋은 '체제'로 발전한다는 논리가 나오게 된다. 이른바 '역사적 변증법'이 나오기도 하고 이것을 사물의 발전에 적용하면 '유물론적 변증법'이 나오기도 한다. 이런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을 소위 말하는 '진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니 진보를 위해서는 '사건과 현상'이 필요하고, 다시 이것을 체제로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다.


변증법은 '정반합'이라고 이야기하기보다 '
정신-현상-절대정신'으로 정리하는 것이 이해가 빠르다

마르크스가 나오는 시기에 변증법을 과정에서 '체제'의 우선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헤겔 우파가 되고, 현상으로 향하는 '운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헤겔 좌파가 된다. 그리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운동'을 중요하시하는 헤겔 좌파에 속해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마르크스의 운동은 헤겔의 관점에서는 '사건'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방식으로 작동했고 '체제'의 중심은 국가를 사라져야 하는 원흉으로 생각하게 된다. 헤겔의 도식은 원래 '국가-사회-가족'에서 출발한다. '인륜성'이라고 하는 인간이 가진 기본적인 속성인 사랑을 구하는 공동체는 '가족'이다. 그러나 가족이라는 체제 안에서만 살 수 없기에 만인의 투쟁이 가득한 사회의 영역에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사회는 헤겔의 관점에서는 무질서하고 욕망이 판을 치는 현실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 속에서 가족이 가진 인륜성을 이루는 데 있어서 '체제'로서 국가는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된 것이다.



헤겔의 국가론은 이렇게 가족의 확대이면서도 현실은 사회를 적절히 통제하면서 절대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헤겔좌파의 측면에서 이러한 국가의 시스템을 '사회'의 운동성으로 무너뜨리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반대로 헤겔우파들은 '체제'는 순수한 절대이성의 발현임으로 더욱 정교한 국가를 만드는 노력을 하게 된다. 복지국가의 전제는 바로 이러한 체제의 우수성을 바탕으로 빈곤을 해결하려는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헤겔의 절대이성으로써 국가는 그래서 '법'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이성을 합리적으로 통제하는 수단으로 가지게 된다. 헤겔의 법철학은 자연스럽게 국가운영의 규범이라고 할 수 있고, 헌법을 만들어내는 원리로도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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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학파들이 보는 문제는 바로 이 지점이다. 이성을 '도구'로 사용하게 되면서 문제들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단순히 국가를 운영하는 도구로써 '이성'의 개념을 넘어서 전쟁을 일으키거나, 원자폭탄을 만들거나, 식민지를 더 집요하게 운영하거나, 인간성을 억압해서 최대한 이익을 내게 하는 천민자본주의에도 사용되게 된 것이다. 그 결과는 처참했다.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죽어갔으며, 내일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렸고, 결국 인류애가 사라지면서 '살아남는 것'이 목표가 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나치에 입당하여 자신의 가족들을 지키기 위한 정의로운 전쟁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단 프랑크푸르트의 소장학파들은 일단은 펜을 들고 비판의 글쓰기를 시작한다.


비판학파 1세대의 인문들! 에리히프롬, 마르쿠제,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루카치, 베일, 벤야민까지!


1.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등장


프랑크푸르트학파 Frankfurt School는 1930년대부터 프랑크푸르트암마인 대학교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사회연구소를 기반으로 한다. 현대사회의 문제에 비판을 시작하면서 헤겔과 마르크스에서 시작해서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을 비판하는 1세대가 등장한다. 흔히 1세대를 '계몽의 변증법'으로 불을 놓은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일차원적 인간'의 마르쿠제, 호크크하이머를 예로 든다. 계몽의 변증법을 통해서 1세대 학파들은 가열찬 사회비판을 시작한다. 계몽주의가 가지고 온 도구적 이성의 끝판왕은 자본주의와 산업사회의 문제를 고스란히 드러냈고, 전쟁과 물신주의에 의한 인간의 도구화는 극복하기 위한 비판의 시작점이었다.


도구적 이성이 인간을 일차원적으로 만들었다


인간이 자본주의와 산업사회의 도구화로 인해서 오로지 자신의 이익과 안전만을 생각하게 되는 '일차원적 인간'이 되면서 삶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조금씩 자신을 상품화시키면서 다른 사람도 상품으로 만들어버리는 주술에 빠져버린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원래 문명의 쇠퇴는 이러한 결과를 가져오는가?라고 했을 때 아니었다. 이성을 올바르게 사용한다면 우리는 다른 삶을, 문명을, 인류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에 다르자 아노르노는 부정의 변증법을 통해 인류가 잘못된 변증법의 계단으로 올라갈 것을 다시 뒷걸음질 쳐서 내려온다. 부정변증법은 '정-반-합'의 계단을 다시 내려와서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지점을 찾아내는 방법이었다. 이렇게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수준 높은 문명 비판은 그런대로 사회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독일의 교육철학과 체계도 다시 세팅하는 역할까지 도맡아 하게 된다.


그러나 1세대의 뒤를 이은 2세대 학파의 핵심인물은 위르겐 하버마스는 선배들이 걸었던 길을 반추하면서 비판에 대한 비판을 제시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성'을 도구화시킨 문명을 비판하는 '이성' 자체도 이미 도구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을 여전히 도구로 사용하는 이상 도구화를 벗어나는 것은 힘들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무엇인가를 비판할 때 쓰는 도구적 이성은 그 자체로 다시 무엇인가를 만들 때 사용하는 창조적 이성으로 바뀐다. 이렇게 보면 '실용적인 이성'은 학문을 깊게 만들 수도 있고, 상품을 설계할 수도 있고, 사회를 설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성이 과연 순수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한 말은 했던 말과 다르다'라는 말을 상기해 보면 도구적 이성이 만들어 놓은 길을 걷는 것은 결국 도구적 이성의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2세대 학파의 하버마스는 새로운 이성을 개발하기 시작한다. 이른바 '의사소통합리성'이 그것이다.




2. 의사소통합리성과 도구적 이성


하버마스는 '이성'을 도구화시키지 않기 위해서 새로운 이성의 개발을 꿈꾼다. 원래 '진리'의 위치에 따라서 철학의 방향성이 정해진다. 진리가 인간 정신 내면에 깊이 있게 박혀 있다고 생각하면 정신의 깊숙한 곳까지 따라서 들어가서 진리를 발견해야 한다. 이른바 이게 관념론의 비유이다. 깊이로 들어가든 위로 상승하든 인간 내면에 있는 진리를 발견하는 과정이 '교양'을 쌓는 과정이며 이러한 사유의 기반에는 우열이 당연히 존재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진리가 외부에 있다면 그 진리를 어떻게 자신의 안으로 가져올 것인가?라는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영미철학은 이러한 진리를 '수행성'의 관점에서 내재화시키는 경험을 중요시한다. 경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프로세스와 매뉴얼이 중요하기 때문에 화이트헤드와 같은 '과정철학'이나 언어가 개념이 되어서 진리를 실어 나른다는 '분석철학'이 발전하게 된다.



그렇다면 생철학을 기반으로 하는 프랑스철학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프랑스철학은 어떻게 보면 경계의 철학이다. 경계에서 발생하는 진리가 방금 태어난 아기처럼 따스하고 희망적이면서 변화를 일으키는 진리의 모태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프랑스철학에서는 그리도 타자의 존재가 중요했던 것이다. 진리가 우리 사이에 있다면 진리를 발견하는 방법은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타자를 내가 지워버릴 수 없고 타자를 인정하고 그와 함께 더불어서 이야기하고 걷는 가운데 진리는 드러나는 것이다. 최근의 유명한 알랭 바디우는 이러한 만남의 기회는 '사건'을 통해서 주어지며 사건을 통해서 그 사건에 부르심을 받는 이들이 진리의 용사가 된다고 말한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합리성'은 바로 이러한 느낌이 강하다.


우리의 이성은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지는데, 바로 의사소통을 하는 가운데서 새로운 이성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원래 각자의 개인의 이성이 서로 꽃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이야기와 토론이 상대방에게 거름을 주고 새로운 기후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깐 결국 '토론'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것이다. 혼자서는 발견할 수 없지만, 같이 이야기하면서 발견해 가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서 당연히 '공론장'의 중요성이 등장할 수밖에 없고 하버마스의 관점에서는 '공론장'의 변동이 주는 위험성을 감지할 수밖에 없었다. 도구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이성을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만나서 토론하고 결정하고 합의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대성의 담론이자 새로운 이성의 시작이다. 이런 방식으로 하버마스는 새로운 이성을 제시하고 또한 토론의 중요성을 전 세게에 알린다. 우리나라에서도 공론장 하면 하버마스의 저작을 살펴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3. 생활세계와 체계, 식민지화


하버마스도 역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피를 이어받은 학자이다. 사회를 비판하는 수준이 개인의 행위에도 있을 수 있지만 사회의 구조 자체를 비판하면서 큰 그림을 그리는 학자들이 있다. 바로 프랑크푸트트학파의 학자들이다. 하버마스는 1세대가 그려놓은 부정변증법의 요소들을 가지고 사회를 비판적으로 해석한다. 하버마스가 보기에 사회는 2가지의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가를 기반하는 하는 '체계'라는 시스템과 시민들의 자유로운 모임으로 이루어진 '생활세계'이다. 생활세계는 합리성과 논리적인 이론이 아니라 감상과 이야기 그리고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나름대로 하버마스의 이론을 기반으로 여러 철학자들의 생각까지 담아 보았다.


문제는 체계와 생활세계는 공존하면서도 서로의 자리를 지켜줘야 하는데, 어느덧 생활세계와 모두 체계로 뒤덮여 버린 것이다. 체계는 논리와 합리성이 지배하는 곳이고 정치, 경제, 군사, 외교 등등 국가운영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 그런데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특정한 조직에서, 아이들이 꿈을 꾸는 학교에서, 자유로운 소통과 나눔이 있는 시장에서도 '체계'가 만들어 놓은 합리성은 사람들의 영혼을 빼앗아가고, 서로 간의 희생과 배려를 훔쳐간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하더라도 체계적인 것이 답이라는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 이러한 체계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을수록 더 정교한' 장치가 되어 간다. 그래서 '인치'보다는 '법치'에 기댈 수밖에 없고, 법치는 피도 눈물도 없이 목적에 따라서 결과를 결정해 버리는 시스템이다.


1세대인 호르크하이머는 '1차원적 인간'에서 인간이 더 이상 초월과 이상을 그릴 수 없고, 교환관계로 점철된 일차원적인 인간에만 머무르는 것을 한탄했다면, 하버마스는 이러한 원인이 바로 '체계'가 생활세계를 식민지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따라서 생활세계의 부활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시민사회의 부흥과 대화, 그리고 공론장을 통한 의사소통합리성을 발현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생활세계의 다양한 요소들이 합의와 토론에 의해서 결정되고 또 매번 상황에 따라서 유연하게 바뀌어가는 것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특히 체계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인간관계의 미묘함이 사회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통해서 정리되어 가는 과정에서 서로 더 나은 미래를 그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버마스의 책들은 어렵고 또 그의 강의는 듣기에 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버마스가 말하는 공론장과 생활세계의 식민지화라는 개념은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다. 그래서 어떻게 하지라는 고민은 당연히 뒤따라 오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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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정투쟁에서 사회적 연대로


하버마스를 넘어서는 3세대 학자 악셀호네트는 현재 프랑크푸르트대학 사회연구소의 소장이다. 인쟁투쟁이라는 책으로도 유명하지만 이전의 세대와 다르게 미래에 대한 대안을 내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실 시간개념으로 보자면, 과거의 문제를 해석하는 1세대와 현재의 문제를 분석하는 2세대가 있었다. 그리고 이제 3세대가 되니 미래에 다가올 희망을 그리게 되는 '대안'으로 발전하게 된다. 한 시대에 고유한 철학을 주장하고 사회를 이끌 수 있는 학자들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독일의 현대사는 프랑크푸르트학파들의 행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들은 사회, 정치, 문화, 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하버마스의 제자이면서 하버마스를 뛰어넘는다는 평가를 받는 악셀호네트는 인정투쟁으로 유명한다. 사실 '인정투쟁'은 헤겔에서도 나타나는 개념이다. 누구나 사회 속에서 인정투쟁을 시작하고 이러한 인정투쟁 때문에 사회는 계속된 혼란과 경쟁 그리고 문제들이 들끓는 곳이 된다. 그러나 악셀호테트는 사회학자 허버트 미드의 이론을 빌려와 '사회적인 나'와 '개인적인 나' 다시 말하면 객관적인 나와 주관적인 나 사이의 긴장을 이야기한다. 객관적인 나와 주관적인 나의 불협화음은 언제나 긴장을 탈 수밖에 없고, 주관적인 나가 객관적인 나를 넘어설 때 다른 사람에게 무례하게 되며 이기주의로 빠지게 된다. 반대로 사회적인 나가 너무 깊어지면 사람들의 눈치와 인정에 목숨을 걸게 된다. 요즘시대는 사회적인 나를 부각하는 SNS활동으로 인하여 주관적인 나보다는 누구에게 인정받은가를 '좋아요'로 확인하게 된다.


사회적인 나와 개인적인 나의 긴장 속에서 악셀호네트는 미래에서 답을 찾는다. 마치 스웨덴의 정치가 비그포르스와 비슷한 대안을 내놓는데, 스웨덴의 경우 '사회민주주의'를 마르크스주의의 대안적 가치로 내놓으면서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유토피아는 오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유토피아의 일부분은 지금 여기서 한 가지씩 실천할 수 있다!"라는 잠정적 유토피아를 주장하게 된다. 미래에 이루어질 완전한 모습을 한번에 이룩하는게 아니라 하나하나 지금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악셀호네트는 "우리가 꿈꿀 수 있는 좋은 사회의 비전은 한번에 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좋은 사회의 모습 중에서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오늘 하나씩 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비슷한 맥락이 있으며, 비슷한 효과를 가지고 온다.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것들이 생기는 것이다. 악셀 호네트는 인정투쟁에서 빠져 나와서 사회를 바꾸는 방법을 3가지의 과정으로 설명한다.


첫 번째는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다. 사회학이 놓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관계의 원인이다. 사회 속의 인간관계의 시작이 어디인지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우연성, 아이러니'에 기대는 이상 사회는 분석의 대상이나 설명의 차원에서는 이해될 수 있지만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못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 악셀호네트는 인정투쟁으로 벗어나는 길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위에서 살펴본 허버트미드의 사회적인 나와 개인적인 나의 화해를 이루는 과정에서 자기에 대한 사랑이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발전하는 것을 말한다. 사회적으로 사람들과 인정투쟁을 할 필요가 없이 서로를 인정해주시고 사랑하는 관계에서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전을 볼 수 있게 된다.


두 번째는 권리부여이다. 사회 속에서 어떤 사람이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그 사람의 권리가 보장되는가?의 여부이다. 사회 속에서 '시민권'과 같은 권리는 그 사람이 시민인 이상, 기본적으로 시민이라면 누릴 수 있는 권리와 책임이 부여된다. 사회 속에서 사람들이 서로를 인정한다는 증거는 바로 '권리'를 부여해서 그 사람이 여기에 있든 없든 간에 인정한다는 것을 사회적으로 고정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권리부여를 통해서 사람들은 서로의 존재를 사랑하는 것에 기반하여 존중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지금까지 사회학이 놓치고 있던 부분을 악셀 호네트는 헤겔의 인정투쟁도 넘어서는 급진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악셀호네트의 노력이 최근들이 독일이 난민들을 대하는 태도에도 나타난다. 100만명이 넘는 난민들을 수용하면서도 좋은 자리를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청소년들과 대학생들을 보면 눈물이 나는 것은 나 혼자만일까? 어떻게 저런 인류가 세상에 존재할 수 있지?라는 생각까지 들게 된다. 사회를 구성하는 철학은 그래도 매우 중요하다. 사랑에서 권리부여로 넘어가는 지점에서 우리는 실제적인 사회의 변화를 보게 된다.


세 번째는 비로소 사회적 연대이다. 대부분의 이론들은 처음부터 사회적 연대를 꺼내들기 바쁘다. 사회적 연대의 중요성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것이 어떤 경로로 등장하고, 어떻게 발현되는지에 대해서는 허공에 뜬 이야기들도 많이 있다. 그런데 서로에 대한 인정투쟁이 아닌 사랑으로, 그것이 말뿐만이 아닌 권리부여로 안정화된 상태에서 사회적연대는 이제 미래의 행복한 비전을 지금으로 끌어올 수 있는 실제적인 조직이 된다. 사회적 연대를 앞으로 끄는 힘은 미래의 비전 중에서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고, 뒤에서 밀어주는 일은 사랑이 기반이 된 권리를 가진 주체들이다. 이러한 사회적 연대가 이루어가는 결과들은 사회를 바꾸는 것 뿐 아니라 사람들의 삶과 생각까지 바꾼다. 하버마스가 말했던 '생활세계의 식민지화'를 끊어낼 수 있는 방법으로 악셀호네트는 이러한 과정으로 대답한다.


악셀호네트와 낸시프레이져의 인정투쟁은 유명한 세기의 논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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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가 되면서 독일에서 '신나치운동'이 일어났다. 과거의 강력했던 국가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던 청년들은 신나치운동을 벌이면서 국국주의와 권위주의, 우생학에 근거한 사회를 구성하고자 했다. 이러한 분위기에 위기감을 느낀 아도르노는 독일의 교육체계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하고 '성교육, 인권교육, 민주주의교육'으로 교육시스템을 새롭게 재편한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1990년대에 새로운 교육의 수혜자들은 사회 여러곳에서 리더십을 가지고 등장한다. 정치권에서도 메르켈 총리와 같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권위주의가 불러온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아니라 평등과 이해를 기반으로 하는 촉진하는 역할을 하는 리더의 등장은 같은 눈높이에서 사회를 바라보고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면서도 사람들과 서로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2020년도의 독일의 아이들은 인류 역사상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엄청난 인권의식을 보여준다.


이러한 교육의 시작은 결국 철학이다.


어떤 사회가 '인간-자연-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인간-국가-사회'의 관점에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아이들의 세계관은 달라진다. 자신이 발딛고 있는 세계에서, 자신이 왜 여기에 있으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며,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지를 알아가는 '성숙'의 과정이 있는 사회라면 미래는 조금 더 밝게 그려볼 수 있다. 더욱이, 어른들이 어른답게 '잠정적인 유토피아'와 같은 이룰 수 있지만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자신의 일을 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세계를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살펴본 현대 독일철학의 큰 흐름을 장식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사례만 보더라도 철학을 꾸준히 공부해야함을 보여준다. 언젠가 리더가 되었을 때 탄탄한 철학에 기반해서 사태를 해석하고 미래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전공자의 관점이 아니라서 전문적인 글은 아니지만 나는 나의 일을 이런 방식으로 해 나갈려고 한다.




다음은 사건의 철학자 알랭바디우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아직 화이트헤드까지 가기에는 매우 먼 길임에는 분명하다. 그럼에도 이번 기획은 '독일-프랑스-영미철학'전통을 따라가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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