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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Oct 28. 2017

낭만과 현실

3강 프리드리히 슐레겔_낭만주의 철학_이병옥

20171028_철학아카데미

낭만주의 철학_이병옥 교수

3강 프리드리히 슐레겔


낭만주의 철학 강의 중, 나의 생각의 대부분의 흐름이 비슷했다.


들어가기


이 강좌는 독일 낭만주의를 철학의 시각에서 이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낭만주의는 계몽주의와 마찬가지시대현상이니 만큼 다양한 인물과 철학적 주제가 있다. 낭만주의가 주장하는 철학의 근본적인 입장과 낭만주의의 발전가능성에 대해서 동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시각에서 볼 수 있다. 주로 해석학적인 입장에서 접근이 가능하다.


낭만주의 철학, 강의 시간표


01강 낭만주의철학의 핵심 쟁점 상기하기-여름학기 강의내용(교재 1~5장) 정리

02강낭만주의의 문화 개념(교재 6장)

03강프리드리히 슐레겔: 신비로운 낭만주의자(교재 7장)

04강슐레겔의 반토대주의 인식론과 낭만적 아이러니(교재 7장)

05강낭만주의와 형이상학(교재 8장)

06강칸트와 낭만주의(교재 9장)

07강초기 낭만주의의 종교철학(교재 10장)

08강초기 낭만주의의 정치철학(교재 10장)


토대주의, 낭만주의


낭만주의는 근본적으로 토대주의foundationalism과 반대의 위치에 있다. 토대주의는 인식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가 있다고 상정을 하고 바로 그러한 '의식'의 확실성에서 시작하는 철학이다. 토대주의는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를 시작으로 칸트 - 라인홀트 - 피이테까지 발전하게 된다. 토대주의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의식의 확실한 토대를 끌어내는 방법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의식의 토대에서 처음으로 출현하는 것은 절대적인 자아'의 개념이다. 계몽주의의 입장에서 볼 때도 '확실한 자아'가 탄생하는 것을 기본으로 모든 사물의 법칙을 인간중의, 의식의 발전 중심으로 재구성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낭만주의는 이러한 토대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한다. 그것은 바로 슐레겔Schlegel에서 부터이다.


슐레겔, 낭만주의


슐레겔은 사실 해석학자였다. 슐레이허마흐와 같은 해석학자였으나 사실은 슐레이허마흐와 완전히 다른 해석학이다. 슐레이허마흐의 해석학은 '저자' 중심의 해석학이였다면, 슐레겔의 해석학은 '텍스트' 중심의 해석학이다.저자의 의도와 방향, 배경을 파악하는 것이 슐레이허마흐의 해석학의 중심이라면, 슐레겔은 텍스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생명력과 확장 가능성을 가지고 낭만주의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확대시킨다. 이러한 '텍스트' 중심의 해석학은 후에 데리다의 철학과도 맞닿아 있다. 낭만주의는 하나의 시대정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심지어 니체까지도 낭만주의를 비판했지만, 낭만주의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했다. 낭만주의의 시작은 '프랑스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프랑스 사회주의와 같은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낭만주의의 태동은 1770년부터였으며, 1880년대까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휄더린, 헤겔과 같은 튀빙겐 낭만주의자들은 초기 낭만주의에 속한다.



피히테, 슐레겔


슐레겔은 처음에는 피히테의 토대주의를 신봉할 정도로 좋아하고 연구했다.그러나 1776년 피히테와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서 노발리스와 함께 새로운 길인 낭만주의로 전향하게 된다. 피히테의 철학은 슐레겔이 보기에는 역사주의에 기초한 현실의 반영이 거의 없었다.따라서 아무런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피히테의 철학은 말그대로 '토대'에만 집중하는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았다. 구체적인 경험이 사라진 토대주의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결국 인간의 삶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지는 지점에서 슐레겔은 낭만주의로 떠나게 된다. 노발리스의 경우 광산에서 서기로 일하면서 광산학, 물리학과 경제학 등 실제 문제에 대해서 매우 관심이 많았다. 슐레겔은 노발리스와 함께 연구하면서 이러한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들루클루아의 작품, 낭만주의 사조는 철학과 미술에서 두드러진 영향력을 보였다.



낭만주의, 경제적 사조 영향


슐레겔과 함께 노발리스의 업적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일단 낭만주의는 근본적인 토대, 혹은 구조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고 보면 이러한 생각의 프레임을 따르는 철학자들이 많게 된다. 경제적으로는 노발리스의 경제적인 낭만주의 성향을 가지고 아담스미스가 이어 받았고, 마르크스와 엥겔스까지 이어받게 된다. 더 나아가면 게으르그 짐멜과 좀바르트와 같은 철학자들에게서 '속물' 개념도 탄생하게 된다. 물론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격렬하게 행하는 들뢰즈도 어떻게 보면 낭만주의 사조 혹은 낭만주의 프레임을 사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노발리스가 말하는 경제는 '아름다운 자유로운 경제는 어떻게 가능할까?'라는 그의 저술에서 볼 수 있다. 돈이 필요는 하지만 돈이 정신세계까지 장악해버리지 않게 아름답지만 자유롭게 교양을 가진 경제가 가능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낭만주의, 자유


'자유'라는 개념은 물론 시작은 프랑스혁명에서 왔고, 피히테에서도 '토대로서의 자유'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계속 이어져 온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슐레겔에 와서 '자유'라는 개념은 토대를 넘어서는 현실의 자유로 발전하게 되고, 낭만주의의 중요한 주제가 된다.


제롬의 낭만주의를 표현한 작품, '사자'


자아, 순환


토대주의가 가지고 있는 특징은 '원리에 의한 자아의 탄생'인데, 이러한 자아의 확실성이 모든 것으 근본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식'은 순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낭만주의'의 원리이다. 인식이 순환되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인식은 계속해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기 때문에 자명한 자아의 개념은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에도 물론 자아개념에 자유의 방법론이 사용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사실 고대의 회의주의자들의 전통에서 부터 스토아학파의의 쾌락주의로까지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민네이션, 낭만


낭만주의에 들어셨다. 나는 낭만민네이션인데, 내가 사용하는 '낭만'이라는 개념은 오늘의 슐레겔의 접근과 비슷한다. 현실주의가 너무 현실의 접착되어 있어서 꿈을 꿀 수 없고, 숨을 쉴 수 없을 때 희망'과 사랑'이라는 개념에서 낭만을 생각한 것이다. 사실은 '대학은 낭만을 배우는 곳이야'라는 선배의 한마디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그 때 그 선배는 언론학을 전공하던 선배인데, 아무래도 낭만주의적인 성향이 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데카르트와 칸트의 토대주의를 넘어서서 토대를 흔들어버리는 낭만주의 철학은 플라톤의 '에로스' 개념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에로스의 종말'을 쓴 한병철 선생님도 어떻게 보면 모든 철학자들의 사유를 붕괴시킨다는 의미에서 낭만주의 프레임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낭만주의는 현실을 낭만화시킴으로써 새로운 상상력을 불어 넣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의 대한 대안은 제시하지 못하고 도피'한다는 비난을 들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낭만은 에로스와 연결되고, 삶의 근본적인 문제로 연결된다. 인간이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라는 질문에는 먼저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고민이 시작되어야만 가능하다.인간이 '낭만을 추구하고 새로움을 갈망하는 존재'로 규정되면 인간이 그렇게 되지 못하는 순간에 낭만주의가 탄생하게 된다.



민네이션, 낭만주의


인식론의 싸움이다. 인식론의 기준을 어디에다 둘 것인가에 따라서 토대주의가 되기도 하고 낭만주의가 되기도 한다. 흐름으로 볼 것인가 정해진 지점으로 볼 것인가라는 인식의 방향에 따라서 주체 개념도 달라지고, 인간의 개념도 달라진다. 낭만주의의 자유가 확대되면 포스트모던으로 돌아가면서 모든 것의 토대가 날라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낭만주의에서도 주체를 파악할 때 무의식도 집중하게 된다. 무의식 속에 들어 있는 신성과 인간의 고유성을 개성으로 잡기도 한다.


철학과 문학의 계보들


참고 1. 낭만주의_위키피디아


18 ~ 19세기 계몽주의와 신고전주의에 반대하여 나타난 낭만주의는 로맨티시즘(Romanticism)이라는 단어의 기원에서 알 수 있듯이 비현실적인, 지나치게 환상적이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으며 이성과 합리, 절대적인 것에 대해 거부한 사조였다. 낭만주의의 첫 주자는 계몽주의 시대에 독일의 루소라고 불리던 헤르더이다. 헤르더는 감정과 감성, 민족역사를 강조하였으며, 그의 저서 "인류 역사의 철학적 고찰"은 후에 러셀과 헤겔로 이어지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느낌과 감정을 강조하였으며, 계몽주의들이 설파 했던 이성에 대해 강한 회의를 품었지만, 낭만주의자들은 결코 이성이라는 것을 무시하거나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과거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의미로 파악 되었던 이성을 역사적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것으로 수정하여 고려하였다. 또한 이 낭만주의는 개성을 강조하고, 사회를 과거와 달리 하나의 “유기체”로 보았다. 탄생과 성장, 쇠퇴와 소멸을 겪는 것은 사회의 한 특징이라 말하였으며, 이것은 후에 《문명 형태학》(아놀드 토인비)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워지는 독일의 슐라이에마허에게 큰 영향을 주어서 자신의 신학방법으로 감정(Gefühl, feeling)을 기독교 종교의 본질로 보았다.19세기 중엽에 성립된 로맨티시즘은 산업 혁명으로 인한 사회 변화를 따르기 보다는 과거의 중세 봉건사회나 이국적인 것에서 이상을 찾고자 했다. 그 주요한 동기는 사회의 분열과 이기주의의 만연을 부정하고, 중세에서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던 공동체를 다시 일으키고 싶다는 원망(願望)이다. 때로는 중세에서 전인격적(全人格的)인 완성이 가능했었다고 해서 그것을 다시 일으키려고 한다. 후자는 개인을 절대화하는 것에 의해 현실적으로는 니힐리즘으로 발전해 간다. 이에 대해 전자로부터는 사회를 개인보다 우월한 것으로 만드는 이데올로기가 전개되는 것이다. 19세기 중엽에 그것은 사회유기체론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사상은 사회를 절대화하려는 내셔널리즘으로 그 맥락이 이어지게 된다.



참고 2. 피히테_나무위키

피히테는 토대주의를 집대성했다.


Johann Gottlieb Fichte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1762년 05월 19일 ~ 1814년 01월 27일


칸트로부터 촉발되어 발전해나간 근대 독일 관념론의 대표적인 철학자들 중 한 명으로 그의 사상의 정수는 주관적 관념론(주관속에서 모든 것이 가능)이다. 그의 이어 쉘링은 객관적 관념론(객관속에서 모든 것이 가능)을 내세웠고, 헤겔은 피히테와 쉘링의 철학을 교통정리하여 절대적 관념론을 내세워 근대철학의 하나의 완결된 형태의 것을 창출해내었다.


피히테는 칸트의 오성과 이성에 대한 개념 구분이 애매하다고 생각했고 필연성의 세계를 다루는 순수이성과 자유의 세계를 다루는 실천이성이 모순적인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피히테의 철학은 그것을 해결하려는 데서 출발하게 되는데, 그는 이성이 윤리의 세계뿐만 아니라 필연성에 관계하는 학문의 영역에 적극적으로 관계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피히테에게 있어 경험은 대상에 대한 경험이 아니라 앎(Wissen)에 대한 경험인데, 이에 따라 그는 앎을 대상으로 하는 철학인 지식학(Wissenschaftslehre)을 정초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자아는 앎의 출발점인데 이는 더이상의 전제를 가지지 않는, 모든 앎이 이끌려나올 수 있는 원칙으로서, 데카르트의 것과 유사한 면모가 있다. 자아는 단순히 사유하는 주관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자아아며, 자아는 절대적으로 독자적으로 활동하며, 자아의 활동은 무한한 것이다. 자아는 결코 외부의 어떤 것에 의하여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끊임없는 활동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다.


피히테의 자아의 본질은 하나의 고착화된 사실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역동적인 작용인데, 이를 사행(Tathandlung)이라 한다. 사실이라는 것은 이러한 자아의 적극적인 행위, 즉 사행의 결과이며, 자아는 자기의식(Selbstbewußtsein)으로 표현된다. 사행은 판단, 추리하는 이론적인 힘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정립하는 실천적인 힘이다.


사행을 근본적인 존재특성으로 가지는 자아엔 지식학을 가능케 하는 근본적인 도구로서의 세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로, 자아는 스스로를 정립한다.(동일률의 근거) 이것은 범주의 하나로서 실제성을 유도한다. 둘째로, 자아에 대하여 비아가 정립된다.(모순율의 근거) 이것은 범주로서 부정성(Negation)을 유도한다. 셋째로, 자아는 나눌 수 있는 자아에게 나눌 수 있는 비아를 정립한다.(근거율의 근거) 이것은 자아에게나 비아에게만 머무르는 정립이 아니라 양자를 모두 포괄하는 정립으로 제한(Limitation)의 범주를 유도한다.


자아(Ich)는 자신을 정립하면서 세계와 관계하고, 자아의 정립하는 활동에 거스르는 비아(Nicht-ich)가 다가오는데, 비아는 자아에 속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사행을 통한 자아의 자기정립에 거슬러 자아에 대해 반정립한다. 비아의 반정립은 이미 자아의 정립을 전제로 하기에 첫번째 원칙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자아와 비아는 갈등관계이다.


피히테의 철학을 종합하자면, 자아의 정립과 비아의 반정립이 대립하는 구도에서 절대적 자아가 그 대립을 지양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비아가 자아를 제한 또는 규정하는 것은 이론적인 것이며 이론적 학문을 성립시키고, 자아가 비아를 규정하는 것은 실천적인 것이며, 자아의 정립을 통해 대상인 비아를 규정하고 제한하는 실천적 학문을 정립시킨다. 그런데 이 구분은 자아가 비아와 관계하는 방식을 통해 구분되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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