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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철학일기

마오쩌둥은 어떤 철학으로 중국을 만들었을까?

처음읽는 중국 현대철학_마오쩌둥과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

by 낭만민네이션

벌써 10년전이다. 처음읽는 현대철학 시리지를 접하고 영미철학, 프랑스철학, 독일철학을 스터디하고 중국철학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된게. 그렇게 캉유웨이와 슝스리, 탕쥔이를 넘어서 마오쩌둥의 철학까지 배우고 나니 중국을 움직이는 힘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논문을 쓰려고 하는 사람들과 일요일 아침마다 중국철학 스터디를 하고 있다. 물론 내가 발제도 하고 강의도 한다. 그러다 보니 이런 글들을 준비하고 있고, 더 많은 고민이 생긴다. 오늘은 마오쩌둥이다. 기존에 소개하는 글들보다 더 깊게 들어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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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의 혁셩사와 마오쩌둥

2. 실천론과 모순론

3. 신민주주의론

4. 군중노선

5. 주관적 능동성과 인민 역량에 대한 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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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 마오쩌둥(1893~1976)은 20세기 세계사에서 가장 논쟁적이고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 중 한 명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의 일생은 단순한 개인의 영광을 넘어, 외세의 침탈과 봉건적 질서에 시달리던 중국이 치열한 투쟁을 거쳐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현대 국가로 재탄생하는 격동의 과정 그 자체였다. 그는 서구의 마르크스주의를 중국의 특수한 현실, 즉 농촌과 농민이라는 거대한 토양에 깊숙이 이식하여 자신의 독창적인 혁명 노선을 구축했으며, 이는 냉전 시대 제3세계 민족 해방 운동의 정신적 지침(마오이즘)이 되기도 했다. 이처럼 마오쩌둥 사상은 중국 혁명의 성공 비결이자, 동시에 이후 중국이 겪어야 했던 역사적 비극의 근원이 되었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오쩌둥의 유산은 영웅적인 승리와 참혹한 비극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면모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4,000만명을 학살한 독재자가 되기도하고, 민족을 구원해 낸 해방자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철학자 마오와 혁명가 마오를 함께 보아야 한다. 혁명가로서 그는 군사력의 절대적 열세를 인민대중의 역량으로 극복하고 국민당을 물리쳤으며, 중국인들에게 민족적 독립과 해방이라는 희망을 선물했다. 그러나 집권 후기에 접어들면서 그는 자신의 주관적 능동성에 대한 과신에 빠져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이라는 초유의 극단적 정책들을 강행했다. 이에 대한 결과는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끔찍한 재앙을 초래하며 국가 시스템을 파괴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따라서 마오쩌둥을 이해하는 작업은 현대 중국의 정치적 유전자와 사회 구조를 해독하는 첫걸음이며, 그의 사상과 실천의 총체적인 빛과 그림자를 균형 있게 분석하는 것은 필수적인 역사적 과제로 남아있다.


한국전쟁 참전_항미원조(1950년 ~ 1953년)

마오쩌둥 집권 초기에 발생한 이 사건은 신생 중국의 대외 정책과 군사력을 국제 무대에 각인시킨 사건이다.

미국을 위시한 유엔군이 북한 지역을 넘어 압록강 근처까지 진격하자, 마오쩌둥은 중국의 안보 위협과 동북아시아에서의 영향력 유지를 위해 참전을 결정했다. 중국은 이를 **항미원조(抗美援朝, 미국에 대항하여 조선을 지원함)라고 명명했다.

시기: 1950년 10월부터 1953년 휴전까지.

결과 및 영향: 중국 인민지원군의 참전은 전세를 재역전시켜 전쟁을 장기화하고 결국 휴전으로 이끌었다. 이 참전은 중국 인민의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시켰으나, 동시에 수십만 명의 인명 손실을 가져왔다. 대외적으로는 서방 세계와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고 소련과의 동맹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약진운동 (1958년 ~ 1961년)

이 사건은 마오쩌둥의 주관적 능동성과 경제 법칙 무시가 낳은 최악의 정책 실패이자 인재(人災)였다.

마오쩌둥은 생산력 발전이라는 객관적 현실을 무시하고, 몇 년 안에 영국 등 서구 선진국을 따라잡아 조기에 공산주의를 실현하겠다는 비현실적인 목표를 설정했다.

농촌의 모든 자원을 인민공사로 통합하고, 집집마다 토법제철이라는 재래식 용광로를 만들어 철강 생산량을 늘리려 했다. "많고, 빠르고, 좋고, 절약하게"라는 구호 아래 비과학적 생산 목표가 강요되었다.

농업과 공업의 비효율적 결합과 과도한 수탈은 농민들의 생산 동기를 완전히 파괴했다. 이로 인해 대규모 흉년과 겹쳐 수천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대기근을 초래했으며, 이는 중국 공산당의 통치 능력에 대한 당내 비판을 촉발했다.


문화대혁명(1966년 ~ 1976년)

마오쩌둥이 자신의 권위와 이념적 노선을 재확립하고 반대파를 숙청하기 위해 인민군중을 동원한 극단적인 정치 투쟁이었다.

대약진운동 실패 후 류사오치, 덩샤오핑 등 실용 노선 지도자들이 당의 주도권을 잡자, 마오쩌둥은 이를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실권파'의 준동으로 규정했다. 계속혁명론을 내세워 당내 비판 세력을 제거하고 자신의 개인 숭배를 강화하려 했다.

홍위병(紅衛兵)이라 불리는 청년 학생들을 동원하여 기존의 당 및 정부 기관, 지식인들을 공격하고 숙청하도록 부추겼다. "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풍속, 낡은 습관"을 타파한다는 명분으로 전국의 문화유산과 교육 시스템이 파괴되었다.

약 10년간의 광풍 속에서 중국 사회 전체가 극심한 혼란에 빠졌고, 수많은 정치적 숙청과 폭력이 난무했다. 국가 시스템과 교육 체계가 마비되어 경제 성장이 정체되었으며, 마오쩌둥의 사망(1976년) 이후에야 종식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큰 정치적 비극으로 평가된다.




1. 중국의 혁명사와 마오쩌둥


마오쩌둥은 1893년 후난성 샹탄의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부르주아로 태어났지만 그를 혁명가로 이끈 것은 서구의 근대적 지식과 중국의 현실에 대한 깊은 성찰이었다. 그는 1913년 창사사범학교 시절 스승 양창지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현실의 문제와 민족적 대안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게 된다. 이후 베이징대학 도서관 사서 보조로 일하며 당시 혁명적 사상가였던 리다자오를 만나 마르크스주의를 자신의 핵심 사상으로 받아들였다. 1921년 7월, 상하이에서 비밀리에 소집된 중국공산당 제1차 당대회에 후난성 대표로 참여하며 공식적인 혁명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당내 대부분이 도시 노동자 계급에 집중할 때, 중국 인구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 계급이 혁명의 핵심 동력이 될 수 있음을 간파했다. 1926년 중앙 농민운동위원회 서기를 맡아 농민 운동을 조직화하며, 마르크스주의 교과서적 해석에서 벗어난 '농민 혁명론'이라는 독창적인 노선을 확립하는 데 주력했다.


마오쩌둥 사상의 초기 저작

마오쩌둥의 초기 저작은 중국 혁명의 주체와 적(敵)을 명확히 규정하며 농촌 중심 노선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집중했다.

'중국 사회의 각 계층 분석'(1925년):중국 사회의 계급을 5가지 범주로 나누고, 지주/매판 계급을 타도의 적으로 규정했다.가난한 농민(반프롤레타리아)을 도시 노동자보다 혁명에 가장 적극적인 동력으로 규정하며, 농민 혁명론의 사상적 출발점이 되었다.

'징강산의 투쟁' (1928년):국민당의 포위를 피해 징강산에 근거지를 구축하는 과정과, 유격전의 원칙을 처음으로 체계화했다. "정권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무장투쟁론을 강조하며 군사 전략의 기초를 다졌다.

주요사건

징강산 근거지 구축 (1927년): 농촌 중심 혁명 노선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쭌이회의 (1935년): 마오쩌둥이 당과 군대의 실질적 지도권을 장악하고 독자 노선을 확립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1949년): 농민 혁명론과 통일전선 전략의 최종적인 승리를 선포했다.


사상적 기초 형성의 주요 흐름

유신파의 개혁사상 (입헌군주제 & 서방 학문 수용): 1910년 서양식 학교에 입학하며 접했다. 캉유웨이, 량치차오 등의 사상으로, 청일전쟁 패배 후 일본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삼아 입헌군주제를 통해 청나라를 구하고 서방의 과학과 학설을 도입하려 했다. 이는 근대적 사유와 개혁의 필요성을 일깨웠을 것이다.

쑨원(孫文)의 혁명사상 (공화정 & 봉건제 타파): 1911년 창사상향중학 입학 후 감화받았다. 수천 년 이어온 황제 중심의 봉건제도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서구식 정치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공화정을 실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마오쩌둥에게 봉건 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과 혁명이라는 방법을 가르쳤다.

마르크스주의 수용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론): 창사사범학교 졸업 전 신민학회 활동과 베이징대학 도서관 사서 보조 시절 리다자오와의 교류가 결정적이었다. 특히 리다자오의 '볼셰비즘의 승리' 논문은 마오쩌둥이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로써 그는 혁명의 과학적 이론과 계급 투쟁이라는 거대한 틀을 갖추게 된 것이다.


1927년 장제스의 반공 쿠데타로 공산당의 도시 조직이 궤멸되자, 마오쩌둥의 독자적인 농촌 혁명 노선은 생존을 위한 유일한 대안이 되었다. 그는 "정권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무장투쟁론을 주창하며 패잔병을 이끌고 후난-장시성 접경의 징강산으로 들어가 최초의 농촌 혁명 근거지(소비에트)를 구축했다. 마오쩌둥은 이곳에서 절대적인 군사력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적이 진격하면 우리는 후퇴하고, 적이 머무르면 우리는 괴롭히고, 적이 지치면 우리는 공격하고, 적이 후퇴하면 우리는 추격한다"는 유명한 유격전 전술을 창안하여 홍군(붉은 군대)의 기본 전술로 확립했다. 1934년에 시작된 혹독한 대장정은 공산당에게 생사의 갈림길이었지만, 1935년 쭌이회의를 통해 마오쩌둥이 당내 교조주의자들을 누르고 당권과 군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정치적 분수령이 되었다. 이 회의는 코민테른(제3인터네셔널)의 영향에서 벗어나 마오쩌둥 중심의 독자적인 노선이 확립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사건이었다.


쭌이회의 이후 마오쩌둥은 옌안 소비에트를 중심으로 세력을 재정비하고, '신민주주의론'과 '모순론' 등의 철학적 저작을 통해 자신의 혁명 노선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했다. 1937년 일본과의 항일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국민당과 제2차 국공합작을 통해 민족 모순을 주요 모순으로 설정하는 유연한 전략을 구사하며 세력을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일본 패망 후 1946년에 재개된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토지 개혁을 통해 농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고, 군중노선을 바탕으로 인민군중의 역량을 혁명의 동력으로 전환했다. 그는 병력과 장비에서 우위를 점하던 국민당 군대를 게릴라전과 기동전을 혼합한 뛰어난 군사 전략으로 격파하며 전세를 역전시켰다. 마침내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을 전 세계에 선포하며, 20세기 중국 혁명의 대장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중국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준의회의

쭌이회의(遵義會議, Zunyi Conference)는 1935년 1월,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이 대장정(大長征) 도중 구이저우성(貴州省) 쭌이에서 개최한 확대회의로, 마오쩌둥이 당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중국 혁명의 방향을 완전히 바꾼 결정적인 사건이다.

마오쩌둥은 제5차 토벌전(1933~1934) 패배의 원인을 당시 당과 군을 지도하던 보구(博古)와 리더(李德) 등 소련 유학파('28인의 볼셰비키' 그룹)의 교조적이고 기계적인 군사 전략 때문이라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마오쩌둥은 패배의 원인을 당시 당 지도부가 마르크스주의의 원칙과 소련의 경험을 중국의 현실에 기계적으로 적용하려 한 데서 찾았다. 즉, 도시 중심의 혁명론과 정규전 중심의 군사 노선을 비판한 것이다.

마오쩌둥이 제시한 유격전(게릴라전) 전략과 농촌을 근거지로 하는 혁명 노선이 승인되었다. 이는 중국의 특수한 조건에 맞는 실사구시(實事求是) 원칙의 승리였으며, 이후 장기간의 대장정 생존과 혁명 승리의 전략적 기반이 되었다.

당시 당 지도부를 맡았던 보구와 리더는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는 인물들이었다. 이들이 군사 지도권을 상실한 것은 곧 중국공산당 내에서 코민테른의 직접적인 지시와 통제가 약화되었음이 명확하다.

이 회의를 기점으로 중국공산당은 소련 공산당과 코민테른의 지시를 따르는 지부가 아니라,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한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정당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는 중국 혁명이 외세의 영향을 최소화하고 독자적인 경로를 걷게 된 역사적 분수령이 되었다.


건국 직후 마오쩌둥은 신민주주의 단계를 조기에 종결하고 사회주의 개조를 서둘러 추진하며 급진적인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1950년대 중반 이후 그는 인민대중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바탕으로 대약진운동이라는 비현실적인 경제 정책을 강행하며 중국 경제와 사회를 파탄으로 몰아넣었. 이 정책의 실패로 인해 당내에서 권력과 노선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마오쩌둥은 자신의 사상적 근거인 계속혁명론을 앞세워 반대 세력을 숙청하는 데 집중했다. 1966년에 발동된 문화대혁명은 바로 이러한 권력 투쟁과 이념적 순수성에 대한 강박이 결합된 극단적인 형태로, 인민군중을 동원하여 당과 국가 시스템을 마비시키는 10년간의 광풍을 일으켰다. 그의 통치 말기는 혁명적 영광의 시대가 아닌, 만년의 오류와 참혹한 인명 피해로 얼룩진 암흑기로 기록되었다.


마오쩌둥의 신중국 이후 역사적 단계 요약

제1단계 신민주주의 단계 (1949년 ~ 1957년) : 이 단계는 사회주의로의 과도기이자 준비 단계로 설정되었다. 프롤레타리아트(공산당)의 영도 아래, 자본주의적 요소와 사회주의적 요소가 공존하도록 허용되었다. 주요 목표는 토지 개혁을 완료하여 봉건제를 타파하고, 민족 부르주아의 경제 활동을 제한적으로 허용하여 국가 자본주의 발전을 촉진하는 것이었다. 특히 제1차 5개년 계획을 통해 중공업 기반을 다지며 사회주의 개조의 기초를 마련했다.

제2단계 사회주의 단계 (1958년 이후) : 이 단계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강화하고 공산주의로의 최종 이행을 목표로 하는 단계이다. 마오쩌둥은 1957년에 이미 신민주주의 단계가 완료되었다고 선언하며 이행을 서둘렀다. 그 결과, 1958년 대약진운동을 통해 인민공사를 설치하고 급진적인 경제 시도를 했으나, 객관적 현실을 무시하여 재앙적인 실패를 초래했다. 이후 계속혁명론을 내세워 사회주의 사회 내의 계급투쟁을 정당화하고, 문화대혁명을 발동하는 근거로 삼았다.


리다자오의 '볼셰비즘의 승리'

승리 해석: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의 종식을 연합군의 군사적 승리가 아닌, 볼셰비즘이 대변하는 인도주의, 평화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라는 시대정신의 승리로 해석했다.

시대 변화: 볼셰비즘을 "인류의 새로운 문명이 탄생하는 첫 징표"이자 "세계에 다가올 가을을 알리는 첫 낙엽"으로 비유하며, 그 승리의 필연성을 역설했다.

민족 해방: 이 사상이 서구 제국주의에 시달리던 약소민족과 피압박 민족에게 해방의 메시지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강력한 희망을 제시했다.

주체성 중시: 리다자오는 마르크스주의의 경제 결정론을 넘어, 혁명이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의식적이고 자발적인 행동과 능동적인 의지의 폭발을 통해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의지주의적 해석은 훗날 마오쩌둥이 경제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농민 대중의 정신력을 통해 혁명을 성공시키려 했던 마오이즘의 사상적 근거 중 하나가 되었다.

이론적 토대: 이 글은 중국 지식인 사회에 마르크스주의를 전파하는 가장 중요한 초기 문헌이 되었으며, 이후 천두슈와 함께 중국 공산당(CCP)을 창립하는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당시 베이징 대학 도서관에서 일하던 마오쩌둥에게 리다자오는 직접적인 사상적 스승 역할을 했으며, 볼셰비즘 사상을 전수하는 구심점 역할을 수행했다.



2. 실천론과 모순론


마오쩌둥의 철학적 저작인 '실천론'과 '모순론'은 마오쩌둥이 정치적 리더만이 아니라 철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1937년 옌안 시기에 공산단과 홍군 간부들은 인재양성의 필요성을 느끼고 항일군정대학을 세웠다. 여기서 마오쩌둥은 중국공산당 간부들을 위한 변증법적 유물론 강의 교재로 집필되었다. 여기서 마오쩌둥의 실천론과 모순론이 집필되었고 두 저작은 '양론'으로 불리며 마오쩌둥 사상의 핵심을 이룬다. 이 저작들의 주된 목적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소련의 경험에 따라 기계적으로 해석하려 했던 당내 교조주의자들을 비판하고, 중국의 구체적인 현실에 기반한 마오쩌둥의 독자적인 혁명 노선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있었다. 마오쩌둥은 책상에 앉아 외국 서적만 탐독하는 관념론적 오류를 경계하며, 이론은 오직 현실의 실천을 통해서만 검증되고 발전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이 양론은 "중국 혁명에 필요한 마르크스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시대적 질문에 대한 마오쩌둥의 명확한 답변이었다.


'실천론'은 인식과 실천의 관계를 다룬다. 부제가 '지'와 '행'의 관계를 논함'인 걸 보면 중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을 둘러싸고 다양한 의견들이 있었다. 선지후행, 선행후지, 지행합일과 같은 주장들이 있었지만, 마오쩌둥은 그 논점의 중심에 실천을 위치시킨다. 헤겔의 변증법을 가지고 와서 '지는 정이고 곧 인식'이며, '행은 반이고 곧 실천'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식과 실천을 계속 왔다가 갔다가 하면서 변증법적으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가는 것이다. 마오쩌둥은 생산 활동과 계급투쟁을 포함한 사회적 실천만이 외부 세계의 진리 표준을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근원이며, 인식을 발전시키는 궁극적인 동력이라고 단언했다. 실천은 인식의 근원이자 인식의 발전을 추동하는 동력이다. 따라서 실천은 인식의 목적이고 무산계급이 세계를 인식하는 목적은 바로 세계를 개조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한다.


인식 발전의 과정은 실천→감성인식(감각으로 실천의 결과를 익힘)→이성인식(첫 번째 비약)→새로운 사회적 실천(두 번째 비약)으로 이어지는 끊임없는 변증법적 순환을 거친다. 특히, 이성인식을 바탕으로 세계를 능동적으로 개조하는 '재실천' 단계는 혁명의 궁극적 목표와 직결된다는 점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이러한 실천 중시 인식론은 "조사 없이는 발언권도 없다"는 마오쩌둥의 유명한 원칙을 확립하는 기초가 되었으며, 당 간부들이 현장을 중시하도록 만드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 사회주의 사회 이후에도 여전히 계급투쟁을 일으켜야 한다라는 계속혁명론은 이러한 실천이 완벽할 수 없고 진리의 한 형태만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지속된다고 주장한다. 사람은 전체 발전단계를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단계적으로만 인식하게 되고 결국 상대적으로만 진리성을 갖는다. 이 모든 것의 총화가 절대적 진리이지만 이것은 영원히 완결되지 않고 끊임없이 반복된다. 그러나 혁명도 계속해서 반복되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영원히 모순을 안고 살아간다.
절대적인 진리는 영원히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혁명을 계속 이어나가야 한다.
모순을 제거하면서.

마오쩌둥은 실천론보다 모순론에 더 집중한다. '모순론'은 '대립물 통일의 법칙'을 변증법의 핵심으로 설명한다. 사물 내부의 모순이야말로 발전의 내적 원동력임을 명시한다. 모순론은 보편성과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 보편성은 모든 사물이 변화발전하는 과정 중에 있다는 것이고, 사물의 발전 과정 중에서는 시종일관 모순운동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보편성보다 모순의 특수성을 더 강조했다. 보편성은 어디서나 모순을 찾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공성'이라고 불렀고, 특수성은 특정한 장소와 시간에만 드러나기 때문에 '개성'이라고 불렀다. 마오쩌둥은 마르크스주의의 일반적인 원리가 개별 사회의 구체적인 조건과 환경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어야 함을 역설했고, 이런 논리라면 공성도 중요하지만 개성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마오쩌둥은 이러한 모순의 논리를 통해 중국 혁명이 도시 프롤레타리아 중심이 아닌 농촌 중심의 유격전 노선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던 당위성을 철학적으로 확보했다. 또한 그는 모순의 여러 측면 중에서 가장 본질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주요 모순과 그 외의 차요 모순을 구분하고, 이들이 상황 변화에 따라 상호 전환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주요모순과 차요모순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설정했기 때문에 다양한 역사적 사건 속에서 위치를 정할 수 있었다. 이러한 유연한 모순 분석은 항일 전쟁 시기 민족 모순을 주요 모순으로 설정하였기 때문에, 자신들을 숙청했던 원수 국민당과도 협력하는 통일전선 전략을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이후 다시 국민당과의 주요모순이 설정되면서 계급모순이 주요 모순이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모순론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부분은 적대적 모순과 비적대적 모순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적대적 모순은 대립하는 양쪽 중에서 한 쪽이 사라져야만 해소되는 모순이다.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탈리아트 간의 계급모순은 어느 한쪽이 소멸되어야 하는 적대적 모순이다. 그러나 노동자와 농민의 경우에는 모순관계에 있지만 서로 적대적이지 않고 서로 모순을 해결해 가면서 혁명을 이루어가야 하는 관계이다. 이렇듯이 모순의 보편성과 특수성, 주요모순과 차요모순, 적대적 모순과 비적대적 모순 등 모순론을 통해서 중국 사회의 대중들을 사로잡고 이후에 등장하는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에서 빛을 발한다. 귀에 걸명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이고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와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침대사이즈를 늘려서 방문객의 발을 짜르는 프로크루테스의 침대가 아닐까?


어째든 이러한 모순론과 실천론, 즉 양론은 마오쩌둥이 단순한 정치인이 아니라 독자적인 철학 체계를 구축한 사상가였음을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이다. '실천론'에서 제시된 인식이 완결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실천으로 나아간다는 사상은 훗날 사회주의 사회 내에서도 혁명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계속혁명론'의 철학적 기반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마오쩌둥 사후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추진할 때 가장 먼저 내세운 구호 역시 '마오쩌둥 사상의 기본점은 바로 실사구시이다'라는 것이었다. 덩샤오핑은 '사실에 입각하여 진리를 탐구한다'는 실사구시의 원칙을 마오쩌둥 사상의 정수로 규정하고, 이 원칙에 근거하여 '낙후된 생산력'이라는 새로운 중국의 현실을 인식하는 개혁개방 노선의 정당성을 확보했다. 이처럼 양론은 마오쩌둥의 만년의 오류와는 별개로, 중국공산당의 지도 이념으로서 사상적 연속성을 유지하는 핵심 고리가 되었다.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 인간학적 전복

주객 전도 비판: 그는 기독교의 명제인 "신이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을 뒤집어 "인간이 자신의 형상대로 신을 창조했다"고 주장했다.

신(神)의 정체: 포이에르바하에게 신이란 인간이 자신의 본질(이성, 사랑, 의지 등)이 지닌 이상적이고 긍정적인 특성을 추상화하고 외화(疎外, Alienation)하여 절대적인 존재로 투영(투영)한 것에 불과하다. 인간은 자신의 본질을 신에게 투영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상실(자기소외)하게 된다.

철학의 전환: 따라서 신에 대한 논의는 더 이상 신학이나 사변적인 철학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인간학(Anthropology)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신학의 비밀은 인간학에 있다"고 선언했다.

감각의 중요성: 그는 추상적 사유에 만족하지 않고 감각(Sensibility)을 직접적인 지식의 비밀이자 출발점으로 삼았다. 인간은 살이 있고 피가 흐르는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존재이며, 이 존재의 경험적 현실에서부터 철학적 사유가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식의 물질적 기초: 인간의 의식, 사고, 감정, 심지어 사랑과 같은 문화적 현상들까지도 모두 물질적, 생리적 조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사랑이라는 감정 역시 내면의 화학적 반응과 구체적인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해석했다.

주객 전도 지적: 헤겔은 절대정신(이념)을 세계 발전의 근원으로 삼고, 자연과 인간을 이 절대정신의 한 순간으로 간주했다. 포이에르바하는 이를 주객이 전도된 사변적 체계로 규정하며, 세계 발전의 근원은 자연(물질)이며, 인간의 의식과 사유는 자연으로부터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미래 철학의 방향: 그는 헤겔 철학이 논리의 겉치레를 한 신학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미래 철학은 추상적인 절대정신 대신 살아있는 현실적 인간을 중심에 두어야 하며, 경험적 현실에서 출발하는 사고체계, 즉 자신의 인간학적 유물론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변증법적 유물론 (Dialectical Materialism)

변증법적 유물론은 유물론을 세계관의 기초로 삼는다. 이는 포이에르바하의 인간학적 유물론을 계승하면서도, 단순한 관조적 유물론의 한계를 넘어선다.

물질의 근본성: 세계의 근원은 물질(자연, 존재)이며, 의식(정신, 사유)은 물질의 최고의 산물이자 물질을 반영하는 것에 불과하다.

객관적 존재: 물질은 인간의 의식과 독립적으로 객관적으로 존재하며, 의식은 이 객관적 세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본다.

결정론: "존재(사회적 존재)가 의식(사회적 의식)을 결정한다"는 명제는 이 유물론적 세계관을 가장 명확하게 요약한다. 사회의 경제적 구조(존재)가 법, 정치, 문화 등 상부구조(의식)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변화와 운동: 세계의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운동한다. 변화의 근원은 외부가 아니라 사물 내부의 모순이다.

양질 전화의 법칙: 양(量)의 점진적인 축적이 임계점에 도달하면 질(質)이 급격하게 변하는 비약적인 발전이 일어난다. (예: 물의 온도가 100°C에 도달하면 증기로 변함)

대립물 통일 및 투쟁의 법칙 (모순의 법칙): 모든 사물과 현상에는 대립하는 두 측면(모순)이 존재하며, 이들의 투쟁이 발전의 근본 원동력이다. 이 투쟁은 대립의 해소와 새로운 질의 탄생을 낳는다.

부정의 부정의 법칙: 발전은 단순히 순환하는 것이 아니라, 나선을 그리며 전진하는 과정이다. 이전 단계의 것을 부정(파괴)하고, 다시 그 부정을 재부정(재건)함으로써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간다.

자연: 자연계의 현상(화학 반응, 생명 진화 등)을 물질의 내부적 모순과 양적 변화의 질적 전화 과정으로 설명한다.

사회 (역사적 유물론): 변증법적 유물론을 사회 역사에 적용한 것이 역사적 유물론이다. 이는 사회의 발전을 생산력과 생산관계라는 물질적 조건의 모순과 투쟁(계급투쟁)을 통해 설명한다.

인식: 진리란 감각적 경험(실천)을 통해 물질세계를 반영하고, 이 반영된 내용이 다시 실천을 통해 검증되는 변증법적 과정으로 파악된다.





3. 신민주주의론


'신민주주의론'은 1940년 마오쩌둥이 발표한 저작으로, 당시 중국 혁명의 전략적 목표와 노선을 명확히 제시한 이정표였다. 마오쩌둥은 중국 사회를 '반식민지·반봉건 사회'라는 이중적 모순이 존재하는 특수한 상태로 규정했다. 즉, 외세(제국주의)에 의해 국권이 위협받는 동시에(반식민지), 농촌에는 여전히 지주 계급의 수탈이 지배하는 봉건적 생산 관계가 잔존한다는(반봉건) 것이 그의 분석이었다. 이러한 특수성 때문에 마르크스주의 원론대로 도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곧바로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마오쩌둥은 중국 혁명이 필연적으로 반제와 반봉건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했기에, 신민주주의 혁명 단계와 사회주의 혁명 단계라는 두 단계를 거치는 전략이 필요함을 주장했다.


마오쩌둥은 서구의 낡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구별되는 새로운 유형의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이를 신민주주의라 명명했다. 신민주주의 혁명은 형식적으로는 토지 소유 개혁과 민주주의적 권리 획득을 목표로 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격을 띠지만, 그 영도권은 반드시 프롤레타리아트(공산당)가 쥐어야 한다는 점이 핵심이었다. 이 단계의 목표는 외세와 봉건 세력을 타도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공산당은 혁명의 주체를 노동자 계급에만 한정하지 않고 광범위한 계층을 포괄하는 포용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는 혁명의 대오에 노동자, 농민뿐만 아니라, 민족 부르주아 계층까지 포괄하는 인민민주통일전선을 구축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며, 중국 혁명의 동력을 극대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신민주주의론

1940년에 발표된 '민주주의론'은 중국 혁명의 전략적 청사진이자 인민민주통일전선 구축의 이론적 설계도였다.

중국 혁명을 신민주주의 단계와 사회주의 단계의 두 단계로 명확히 구분했다. 이는 서구식 사회주의 혁명을 곧바로 수행할 수 없는 중국의 객관적 현실을 반영했다.

통일전선: 형식적으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과제를 수행하지만, 영도권은 반드시 프롤레타리아트(공산당)가 쥐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민족 부르주아까지 포괄하는 광범위한 인민민주통일전선을 결성하여 적을 최소화하고 아군을 최대화하는 전략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했다.


'신민주주의론'은 공산당이 '적은 줄이고 아군은 늘리는' 전략을 펼치는 데 있어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혁명 단계별로 주요 모순을 유연하게 전환함으로써, 공산당은 항일 전쟁 시기에는 국민당과 협력하고, 국공내전 시기에는 국민당이 대변하는 지주-관료자본가 계층을 타도의 대상으로 삼아 인민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 전략을 통해 공산당은 노동자-농민 동맹을 중심으로 민족 부르주아, 지식인 등 모든 반제국주의·반봉건 세력을 결집하여 인민민주통일전선을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 통일전선은 단순한 정치적 연합을 넘어, 인민의 강력한 물질적, 인적 지원을 기반으로 하는 거대한 혁명 역량으로 작동했다. 결국, 1949년의 승리는 마오쩌둥이 제시한 이 신민주주의 혁명 전략의 최종적인 성공을 의미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립 후, 마오쩌둥은 약속대로 이 기간을 신민주주의 단계로 규정하고, 사회주의로의 평화로운 이행기를 설정했다. 이 이행기(1949년~1957년) 동안에는 민족 자본가들의 경제 활동이 제한적으로 허용되었으며, 토지 개혁과 주요 산업의 국유화가 점진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이 이행기가 길어지는 것을 경계했고,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공산주의 유토피아 건설을 서둘러 실현하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결국 그는 1957년 이후 사회주의 개조가 완료되었다고 선언하고, 곧바로 계급투쟁을 격화시키는 반우파 투쟁을 단행했다. 이는 곧이어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화 운동으로 이어지며, 마오쩌둥이 신민주주의 단계를 조기에 종결하고 객관적인 조건을 무시한 채 최종 단계로 비약하려 했던 성급한 시도였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4. 군중노선


군중노선은 마오쩌둥 사상을 관통하는 핵심 원리이자, 중국공산당의 혁명 성공을 가능하게 한 가장 중요한 조직 전략이었다. 이 원칙은 "일체의 정확한 사상과 행동은 반드시 인민군중으로부터 나와야 하며, 인민군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로 요약된다. 마오쩌둥은 중국의 혁명적 역량이 도시의 소수 프롤레타리아가 아닌,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을 포함한 인민대중에게 있음을 분명히 인식했다. 군중노선은 당이 인민의 의견을 청취하고(군중으로부터), 그것을 마르크스주의 이론으로 승화시켜 정책을 만든 뒤, 다시 인민에게 되돌려주어 실천하게 하는 변증법적 순환 과정을 의미했다. 이 노선은 공산당이 장기간에 걸친 혁명 전쟁을 수행하며 인민의 절대적인 지지와 협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기둥이었다.


군중노선은 중국공산당과 그 산하의 인민군대(홍군, 팔로군, 신사군)의 존립 이유이자 윤리적 행동 규범이었다. 마오쩌둥은 당과 군대가 인민 위에 군림하는 지배자가 아닌 봉사자임을 강조하며, "온 마음과 온 뜻을 가지고 인민을 위해 봉사하자"라는 구호를 제시했다. 이는 당원들의 모든 행동이 인민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엄격한 도덕적 표준을 설정했다. 예를 들어, 인민해방군은 민간인에게 피해를 주거나 약탈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지하는 '삼대기율 팔항주의'와 같은 군율을 철저히 준수함으로써 국민당 군대와의 차별성을 확보했다. 이러한 봉사 정신과 윤리적 규율은 공산당이 점령하는 지역마다 인민들의 자발적인 식량, 정보, 병력 지원을 얻어내어, 절대적인 군사력 열세를 뒤집는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군중노선

군중노선은 마오쩌둥 사상의 조직적 행동 원칙이자, 공산당이 농민의 지지를 얻어 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던 도덕적 정당성의 근거이다.

"일체의 정확한 사상과 행동은 반드시 인민군중으로부터 나와야 하며, 인민군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원칙으로 요약된다. 이는 당의 모든 정책 결정이 인민의 의견을 수렴하고, 이를 다시 인민에게 되돌려 실천하게 하는 변증법적 순환 과정이다.

봉사 정신: "온 마음과 온 뜻을 가지고 인민을 위해 봉사하자"는 구호를 통해 당과 군대가 인민의 지배자가 아닌 봉사자임을 강조했다. 이를 통해 국민당 군대와 차별화하며 인민의 절대적인 신뢰와 지원을 확보했다.


군중노선은 인민대중의 능동성과 창의성을 극대화하여 혁명의 동력을 형성하는 데 주력했다. 마오쩌둥은 인민대중을 단순히 수동적인 통치 대상이 아닌, 역사를 창조하는 능동적인 주체로 인식했다. 혁명 단계별로 인민대중의 범위(노동자, 농민, 민족 부르주아, 지식인)를 유연하게 설정하고, 이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책(토지 개혁)을 통해 인민민주통일전선을 결성했다. 이 노선은 당이 인민의 의견을 반영하는 과정에서 관료주의와 포퓰리즘이라는 양극단의 오류를 모두 경계할 것을 요구했다. 즉, 당은 인민 위에 군림해서도 안 되고, 인민의 낙후된 의견에 무비판적으로 영합해서도 안 되며, 인민을 계몽하고 이끌어 나가는 능동적이고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군중노선은 마오쩌둥 사상의 핵심 유산으로서 그의 사후에도 중국공산당의 통치 정당성을 지지하는 주요 원칙으로 남아있다. 개혁개방 시기를 거치며 당의 노선은 경제 발전으로 전환되었지만, '인민을 위한 봉사'와 '인민대중과의 긴밀한 연결'이라는 군중노선의 기본 정신은 중국공산당이 거대한 인구와 복잡한 사회를 통치하는 핵심 원칙으로 지속적으로 강조되고 있다. 특히 경제 성장의 부작용으로 빈부 격차와 관료 부패가 심화될 때마다, 중국 지도부는 마오쩌둥 시대의 청렴함과 인민 친화적 이미지를 상징하는 군중노선을 재강조하며 당의 도덕적 정당성을 회복하려 시도한다. 이는 군중노선이 단순한 혁명 전략을 넘어, 거대 정당이 인민의 신뢰를 유지하고 사회를 통합하는 데 필요한 정치적 자산으로서 여전히 유효함을 보여준다.




5. 주관적 능동성과 인민 역량에 대한 과신


마오쩌둥이 강조한 주관적 능동성은 인간이 객관세계의 본질과 규율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 인식을 바탕으로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세계를 능동적으로 개조하는 능력을 의미했다. 그는 이를 통해 유심론과 기계적 유물론의 오류를 극복한 변증법적 유물론의 우위를 주장했다. 마오쩌둥은 이 능동성이 사상(정확한 인식)과 행동(계획적 개조) 두 방면을 모두 포괄한다고 보았으며, 특히 군사 저작에서도 이를 강조했다. 문제는 바로 그의 성공 경험이었다. 군사력의 절대적 열세라는 객관적 조건을 위대한 중화인민군중의 자각적 능동성과 희생으로 극복하고 혁명을 승리했다는 경험은 마오쩌둥에게 인민 역량에 대한 맹목적이고 과도한 믿음을 심어주었다. 이는 곧 객관적인 생산력 수준이나 경제 법칙마저도 인민의 열정만 있다면 뛰어넘을 수 있다는 위험한 오판으로 발전했다.


인민의 주관적 능동성에 대한 과신은 1957년 이후 마오쩌둥이 강행한 극좌적 정책인 대약진운동(1958~1961)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는 '많고, 빠르고, 좋고, 절약하게'라는 구호 아래, 단 몇 년 안에 서구 선진국(영국)의 경제력을 따라잡겠다는 비현실적인 목표를 설정했다. 이 운동의 상징인 토법제철은 제대로 된 생산 인프라 없이 마을마다 흙으로 만든 재래식 용광로를 만들어 철강 생산량을 폭발적으로 늘리려 한 무모한 시도였다. 이처럼 객관적인 과학 기술 수준과 경제 합리성을 완전히 무시한 채 오직 군중 동원의 열정만으로 낙후된 생산력을 뛰어넘으려 한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농촌의 노동력과 자원이 비효율적인 공업 생산에 집중되면서 농업 생산량은 급감했고, 생산된 철강은 쓸모없는 폐기물에 불과했다.


주관적 능동성과 인민 역량에 대한 과신

마오쩌둥의 사상은 만년에 '객관적 현실'을 무시하고 '주관적 의지'만을 내세우는 오류로 변질되며, 대규모의 비극을 초래했다.

주관적 능동성 과신: 혁명 성공의 경험(인민의 힘으로 군사적 열세 극복)이 인민의 열정만 있다면 경제 법칙마저 뛰어넘을 수 있다는 맹신으로 발전했다.

대약진운동 (1958년): 이 과신이 토법제철과 인민공사화를 강행한 대약진운동을 낳았고, 이는 수천만 명의 아사자를 발생시킨 인재(人災)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계속혁명론: 대약진운동 실패 후, 그는 자신의 권위와 이념적 노선을 지키기 위해 사회주의 사회 내에서도 계급 모순이 존재한다는 계속혁명론을 주창했다.

문화대혁명 (1966년): 이 계속혁명론을 바탕으로 류사오치 등 반대파를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실권파'로 규정하고, 홍위병을 동원한 문화대혁명을 발동하는 근거를 마련했다.


대약진운동과 함께 추진된 인민공사화 운동은 마오쩌둥이 꿈꾸던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당장 실현하려 했던 가장 극단적인 사회 실험이었다. 인민공사는 농업, 공업, 교육, 국방을 모두 통합하고, 모든 사적인 소유와 분배를 공동화하여 직업, 성, 연령의 차이가 근본적으로 없는 사회를 건설하려는 것이 목표였다. 마오쩌둥은 이러한 집단주의적 유토피아가 인민의 자발적인 헌신을 통해 객관적 경제 발전 단계를 뛰어넘어 공산주의에 조기에 도달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는 농민들의 사적 소유권과 생산 동기를 치명적으로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비합리적인 생산 계획과 인민의 동기 상실, 그리고 이 시기에 겹친 대기근으로 인해 중국의 경제 시스템은 파탄에 이르렀고, 수천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인재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대약진운동이 참혹하게 실패하고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한 실용적 수정주의 노선이 당의 주도권을 잡자, 마오쩌둥은 자신의 사상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며 권력 투쟁을 시작했다. 그는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계급모순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자신의 계속혁명론을 내세워, 당내의 실용 노선 지도자들을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실권파(주자파)'로 규정하고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했지. 1966년에 발동된 문화대혁명은 바로 이러한 주관적 의지와 이념적 순수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폭발한 결과였다. 마오쩌둥은 홍위병이라는 청년 군중을 동원하여 당과 국가 시스템을 공격하도록 부추겼고, 이는 중국 전역을 계급투쟁의 광풍과 폭력의 혼란 속에 몰아넣었다. 결국 마오쩌둥의 주관적 능동성에 대한 과신은 혁명 승리의 원동력이었으나, 국가 건설 단계에서는 역사적 비극을 초래한 근본적인 오류가 되었다.




6. 실사구시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건설이론


실사구시(實事求是)는 "사실에서 진리를 찾는다"는 마오쩌둥 사상의 본래 원칙이었으나, 덩샤오핑 시대에 만년의 오류를 극복하는 철학적 무기로 부활했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이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시기에 중국의 객관적인 사실(낙후된 생산력)을 무시하고 주관적인 의지만을 앞세워 실사구시 원칙을 배반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고양이든 검은색이든 흰색이든 쥐를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라는 실용주의적 구호를 통해, 이념적 논쟁을 무력화하고 경제 발전이라는 실제적인 결과를 최우선 목표로 삼을 것을 요구하는 새로운 실천의 기준을 제시했다.


실사구시의 원칙을 적용하여 탄생한 것이 바로 '중국특색 사회주의 건설 이론'이다. 이 이론의 핵심은 중국이 사회주의의 완성 단계가 아닌 "사회주의 초급 단계(社會主義初級階段)"에 머물러 있다는 선언에 있다. 이 '초급 단계론'은 중국의 객관적 현실, 즉 극도로 낙후된 생산력을 인정하는 유물론적 기초 위에서 세워졌다. 따라서 사회주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시장 경제라는 자본주의적 수단을 도입하여 생산력을 폭발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정당한 사회주의 발전 경로임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덩샤오핑의 흑묘백묘 이론을 비록한 일시적인 개방을 통한 자본주의의 수용이 일어난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은 이 실사구시 원칙의 가장 직접적인 실천이었다. "경제 발전"과 "인민 생활 수준 향상"이라는 실질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모든 수단은 허용되어야 했기 때문에, 계획 경제를 벗어나 시장 경제 시스템과 외자 유치가 대대적으로 허용되었다. 또한, '선부론(先富論)'을 통해 일시적인 지역 및 계층 간의 불평등까지도 생산력 발전이라는 대의 아래 정당화했다. 이처럼 실사구시는 마오쩌둥의 만년의 오류를 극복하고 중국을 경제 강국으로 이끈 가장 근본적인 철학적 엔진이었다.



0. 나오기


마오쩌둥은 중국 혁명을 승리로 이끈 위대한 영웅이었으나, 그의 만년의 통치는 주관적 이상과 객관적 현실의 괴리가 얼마나 큰 재앙을 불러올 수 있는지 보여주는 역사적 경고로 남아있다. 그의 사상적 유산인 '실사구시(사실에 입각하여 진리를 탐구함)'와 '군중노선'은 중국공산당의 정통성과 조직력을 상징하는 핵심 원칙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그의 만년 오류는 '개인 숭배'와 '권력 집중'이 낳을 수 있는 위험성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마오쩌둥의 사망 후, 중국은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개혁개방 노선이라는 새로운 길을 선택했지만, 덩샤오핑 역시 마오쩌둥 사상의 핵심인 실사구시를 계승하여 생산력 발전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객관적 현실'에 부합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러한 사상적 연속성과 현실적 변용은 중국공산당이 거대한 역사적 변동 속에서도 권력의 정통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현재 마오쩌둥은 단순히 과거의 지도자를 넘어, 중국이라는 거대 국가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핵심적인 상징으로 존재한다. 인민폐 도안에 그의 초상이 일괄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흩어진 인민을 '마오쩌둥'이라는 구심점으로 재결집하고 국가 통합을 이루려는 중국공산당의 의도를 보여준다. 그의 사상과 삶은 독일의 마르크스주의가 2천 년 유교 문화와 봉건적 잔재를 가진 중국이라는 특수한 토양에 이식되고 변용되는 고난의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마오쩌둥의 공과 과에 대한 냉철하고 균형 잡힌 분석은 중국 현대사를 이해하는 필수적인 통찰이며, 그의 유산은 앞으로도 중국의 정치적 방향과 사회적 가치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칠 것이다.


과연 빈부격차와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에 대해서
어떤 대안을 만들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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