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뱅크_신학과 사회이론
거의 역사의 시작부터, 인간이 역사라고 부르는 시작부터 인간은 '신'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문명이 시작되던 시기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신'의 자리를 두고 여러가지 논쟁이 있었다. 과연 신은 존재하는가? 신이 존재한다면 신은 어디에 있는가? 시대와 민족, 역사와 세계관에 따라서 신을 이해하는 방식은 모두 달랐다. 여기서 이해란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삶의 해석과 자신 앞에 벌어지는 일을 연결하는 과정을 말한다. 어떤 이는 '언어'로 신을 해석했고, 어떤 이는 '벽화'로 신을 표현했다. 이해와 해석 그리고 표현과 제사와 같은 의식을 통해서 자신들이 받아들인 만큼 자신의 삶 속에서 '신'의 개념을 실현했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이러한 역사를 체계화 시키는데 집중했고, 독일 낭만주의의 선구자였던 헤겔은 이러한 역사에서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이상과 현실이 만나는 진보의 개념을 설정한다. 이러한 이해는 중세시대의 '신'으로부터 해방된 이성이 사회 속으로 나아갈 방향을 찾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른바 변증법이라고 하는 생각의 방법론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신'의 자리를 '사회'속으로 확장시키는 방법이다. 생각이 존재하는 곳, 생각이 닿는 곳이 곧 우리가 존재를 느끼는 '영역'이라면, 우리의 생각이 '신'의 범주만큼 넓어진다면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까지 간 것이다. 그래서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정신의 확장을 변증법의 개념으로 설명하고 이 세상 모든 곳에 존재하는 신의 개념을 정신의 영역으로 탐구하려고 했다.
서양에서 태어났다면 아무런 고민이 없어도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옥시덴탈리즘과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개념이 있다. 오리엔탈리즘은 서구의 관점으로만 세계와 아시아를 판단하는 편견을 이야기한다면 옥시덴탈리즘은 그 반대를 이야기한다. 내가 쓰는 글은 모두 아시아의 동양적 관점에서 쓰는 글이다. 물론 다른 관점들을 배워서 쓴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시간과 장소는 여기 한국의 서울을 떠날수가 없다. 그래서 그런지 처음에는 동경하다가 나중에는 해석하고, 조금 능력이 쌓이면 비판한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만약 내가 서양에서 태어났고, 몇 백년의 전통을 가진 철학과 이론, 개념을 듣고 자랐다면 어떻게 될까? 외부자적 비판이 아니라 내부자가 아주 사골우려내듯이 속속들이 그 맛을 알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해석은 물론 비판의 강도가 얼마나 깊어질까?
그런 의미에서 영국은 아주 오랜시간 대륙과 떨어져서 '성공회'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특성을 보인다. 독일을 비롯해서 프랑스는 매번 전쟁과 침략을 경험하고 종교의 역사에 있어서도 계속된 통합과 분할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신학과 철학은 서로 합쳐지기도 하고, 나누어지기도 하고, 한 종족의 철학이 지배적이 되기도 하면서 제국 로마의 역사를 그대로 로마법대전으로 계수받기도 했다. 그러나 영국은 좀 다르다. 봉건영주들과 중앙의 귀족들간의 싸움이 있었지만 종교의 역사는 아주 깊이 있고 보수적이면서도 전통적인 시각을 유지한다. 그러다보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밀뱅크와 같은 '전체와 부분'을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고, 또 한 분야의 깊이가 다른 분야까지 깊이있게 볼 수 있는 시각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계를 떠나서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항상 주의깊게 들어야 한다. 밀뱅크의 논리는 급진정통주의이기 때문에 오히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과 같은 신플라톤주의를 옹호한다는 것을 생각하고 책을 읽어가야 한다. 플라톤주의가 만들어 놓은 세상이 오히려 더 좋았을까? 이런 생각에서 현대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시대를 비교해 보면 명확한 답을 내리기는 어렵다. 하지만 밀뱅크의 비판은 정통적인 신학에서 벗어난 철학과 사상들이 '사회이론'을 만들고 오히려 반대로 사회이론들이 이제 신학을 호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이런 느낌으로 읽어보면 어떨까?
밀뱅크의 논리는 '자의적'인 사회이론을 가지고 사회를 비판하거나 구성하는 일을 지양하고, 전체를 바라보고 전략과 기획, 구성을 해보자라는 것이다.
서론이 길었다. (이제 서론을 마쳐간다) 그 만큼 밀뱅크를 이해하는 작업은 어렵고 치밀해야 했다. 스터디그룹에 참여하면서 처음 '정치신학'이라는 것을 알고 싶어졌다. 밀뱅크를 통해서 신학과 사회이론의 연결고리를 배워가고, 스피노자를 통해서 드러난 근대의 정치신학과 이전의 정통적 정치신학을 두루 거친다. 결국 현대의 정치신학에서 해결해야할 문제인 '신정론'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런 생각이 이어지기까지 내 생각의 구조를 다시 한번 살펴본다. 그런의미에서 오늘은 해결의 '변증법'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 아울러서 동시의 칸트의 사상도 밀뱅크의 관점에서 비판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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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까지 역사는 '일정한 목적'이 있는 것이 당연했다. 신의 섭리에 따라서 정해진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실현내가는 과정에서 이야기가 완성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었다. 이제 막 사람들이 신의 섭리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무림으로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면서 생각해 낸 것은 '신의 죽음'이었다. 니체가 말했듯이 신이 죽었기 때문에 신의 목적도 사라진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역사에 대한 어떤 생각이 있어야 했다. 헤겔은 이 지점에서 자신이 해야할 일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역사의 목적이 사라졌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절망할 것인가? 아니다. 역사를 만들어내는 논리를 만들고 그 논리로 과거의 역사로 돌아가서 설득력있게 해석하면 되는 것이다.
1. 바로크적 창작이라는 부분에서, 인간의 제작은 단지 도구적이고 임의적인 사안이 아니라 그 자체가 초월자를 향해 열려 있는 경로라는 사상에 대한 부정이다.
2. 창조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부정하면서 이성적 행동을 혼돈에 대한 억제자로 이해하는 고대의 신화로 복귀하는 것이다.
3. 프락시스와 덕성과 현명함을 중심적 개념으로 삼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 정치학을 부정하는 것이다.
p302
밀뱅크의 해석에 의하면 해겔은 이전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전통을 부정하면서 새로운 방법으로 역사를 해석했다. 인간 존재에 대한 전제를 '초월자가 아니라 정신에서 현상을 창조해가는 절대이성을 가진 존재'로 규정한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한계는 영적이고 영원한 것들을 탐구하는 영역을 벗어났기 때문에 '정신'안에 갖히게 된다는 것이다. 정신과 신체의 연결에 있어서도 정신의 우선성을 주장하였기에 인간은 그 어떤것과 연결되지 않고 스스로도 진리를 만들어낼 수 있고, 진리를 확장해서 미래를 그려낼 수도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변증법의 핵심은 정신에서 현상으로, 현상에서 다시 정신으로 돌아오는 것인데 이러한 헤겔의 방법론은 신에 대한 초월성을 닫고 미래를 향해서 끊임없이 생각하는 '코키토, 사고하는 인간'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어디까지 소급해서 들어갈 것인가?
당연히 창조의 순간까지 가야한다. 인간을 만든 하나님이 '보기에 좋았더라'라고 하던 창세기의 전승이 아니라, 절대 정신이 있었고 그 정신이 만들어낸 인간이 '무질서에서 질서'를 만들어내는 유일한 고등동물이 된 것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라서 질서에서 무질서로 가지만 오직 인간의 정신은 무질서에서 질서로 돌아오는 네트로피의 법칙을 보여주는 것이다. 카오스를 통제하여 체계잡힌 국가로 만드는 일은 인간만이 할 수 있었고 이에 대한 인간 존재의 우월성은 곧 인간들 사이에서도 존재하게 되었다. 헤겔의 변증법이 자연스럽게 우열을 가리고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잉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 절대정신에 다가간 인간이 더 칭송받는 시대가 곧 도래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증법의 특징 중에 하나는 '윤리'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니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가나 덕성을 가진 존재로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다라는 말도 무색해진다. 그것은 절대정신 자체가 정의되지 않았기 때문에 무한대로 열려 있고 또 새롭게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중세가 닫아놓은 물을 활짝 열어재낀 계몽주의의 아들인 헤겔의 방법론은 시민적 덕성이나, 하나님의 성품과는 상관없이 구성된다. 이른바 '법철학'에서 법의 이념은 '자유'이고 절대정신은 이러한 자유를 확대하는 노력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자유를 위한 여정으로 변증법은 진행되고, 그것을 유지해주는 것이 법과 제도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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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뱅크의 비판은 사회학이론들이 신학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신학을 대체하는 방식으로 사회를 구성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이론의 존재론은 모든 존재들을 상정한 후에 정리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론들이 제시하는 범주에서만 사회를 그려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론이 얼기설기 갖다 붙이는 꼴이 되어서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구성하지도 못하는 허술한 그림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어귀스트 콩트로 부터 시작된 이론들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작업을 해본다. 그 중에서도 헤겔의 변증법은 사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무엇인지를 밝혀냈으며 앞으로 사회를 구성하는 원리까지도 제공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헤겔에 반대하여 제기할 수 있는 주요 비판점은 변증법이야말로 근대 정치학과 정치경제학의 새로운 변종 new variant의 사고는 자유주의 및 부등발생 heterogenesis의 경제이론을 극복함에 있어 실증주의만큼의 성공도 거두지 못했다고 하겠다. 헤겔의 논리 자체는 단지 또 하나의 정치경제학이며, 따라서 불가피하게 또 하나의 신정론으로 전락한다_p301
후에 이어지는 헤겔과 마르크스의 합작품으로 제시되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경우에도 물질이 '정-반-합'을 거쳐 더 완전한 형태로 발전한다고 제시하지만, 실상은 신이 사라져버린 세상에서 합리성의 근거를 만들기 위해서 역사는 진보한다라는 논리로 만들어낸 것이다. 물론 헤겔에게도 궁극적인 발전의 방향, 진보의 지향성은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자유'이다. 헤겔의 법철학에서 밝히고 있는 법의 이념은 '자유'이다. 헤겔이 변증법을 통해서 다다르고자 했던 영역은 바로 순수이성이 마음껏 활개를 처도 언제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영역이었다. 이 영역으로 나아가기까지 순수이성은 날개가 돋은 것처럼 자유를 향해서 날아가는 것이다.
그러다가 진보의 논리가 여전히 헤결하지 못하는 '악과 고통'의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순수한 자유를 추구하는데 어떻게 악이 등장할 수 있는가? 진화 생물학 혹은 진화 사회학에 의하면 그런 악을 만들어내는 사람은 반드시 도태되어야 하는데, 막상 현실은 반대인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헤겔이 안고 있는 '신정론'을 헤겔하지 못하고 헤겔의 사상을 가지고 오면 언제나 이 지점에서 멈춰선다. 이 세계의 운동은 정반합의 변증법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어째서 고통과 악의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고 심지어 접근할수도 없는 것인가? 인간이 건드릴 수 없는 영역을 아예 정해놓고 시작한 칸트와 다르게 헤겔에게서는 구멍이 슝슝 뚫려 보인다. 밀뱅크의 비판은 동일하게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사회이론으로 발전한 변증법과 마르크스주의까지 싸잡아서 비판한다.
'메타'라는 단어는 무엇인가를 초월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앞에 메타가 붙으면 '전체를 보는'의 의미가 더해진다. 메타인지 같은 경우 인지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인지해서 생각하는 방법이다. 메타연구는 연구한 것들을 다 모아놓고 어떤 특성이 있는지를 연구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메타비판이란 비판점들을 다 보아서 비판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실제의 삶 속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들의 총체를 비판적인 시간에서 분석해보고 구성해보는 작업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의미에서 메타비판은 성경이 가진 '영-혼-육'의 관점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밀뱅크가 하고 싶었던 말은 사실 성경이 보여주는 메타비판의 관점에서 수직적으로 '영-혼-육', 수평적으로는 '과거-현재-미래'의 관점을 모두 포괄하는 인식이 사라진 시대에서 급진적으로 다시 정통으로 돌아가자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변증법을 비롯한 사회이론들은 개별적으로는 하나의 인식툴로서 훌륭하기는 하지만 그 외의 메타비판의 구성요소에 한참 모자라는다는 이야기이다. 그도 그럴것이 중세시대를 빠져 나오면서 전 영역에 있던 신의 은총과 섭리를 '정치-신학'적인 관점에서 먼저 들고 나오고 그 이후에 사회학이 들고 나오는 과정에서 구멍이 슝슝 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변증법은 현재에서 미래로 가는 진보의 방법론이지만 그 자체로 메타적이지는 않고 그것을 관찰하거나 실행하는 사람의 인지적 한계를 오롯이 드러낼 수 밖에 없다. 권위주의 혹은 나치즘이나 전체주의는 변증법이 극단으로 갔을 때 나올 수 있는 인식의 한계를 보여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작업들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고 '파편화되고 분절된'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다 보니 결국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정의내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칸트와 같이 사물 전체를 바라보고 자기자신에 대한 비판과 시간과 공간의 흐름까지 읽어내는 '메타비판'을 비판하면서 헤겔은 역사의 발전과 의미를 제시하는 '진보적인 제안'을 시작한다. 바로 변증법이다.
찰스 테일러를 비롯한 이들은 헤겔의 사상이 칸트 및 칸트 이후 관념론으로의 방향전환과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하만과 헤르더가 수행한 칸트에 대한 '메타비판'과도 관련되어 있음을 지적했다. 칸트와 그의 계승자들이 관심 갖던 주제는 의식의 내적 영역에서 사유의 주체가 자신의 사고에 무엇을 기여하는가 하는 것이었던 반면에, 하만과 헤르더가 관심을 둔 주제는 인간이 '기예'art와 언어를 통해서 사안에 어떠한 외적, 가시적, 청각적 변형을 가하는가 하는 것이었다_p303
사실 하만이나 헤르더 그리고 헤겔과 같은 사람들은 17세기 초기 독일 낭만주의자들이었다. 낭만주의자들은 영어로 Romantic이라는 말처럼 다시 그리스로마 시대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었다. 그러니깐 중세 이전 시대의 그리스철학이나 로마철학은 신이 없어도 플라톤의 이데아라던지,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이라던지 기본적인 철학으로도 충분히 메타비판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한가지의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초기 독일 낭만주의는 '현실과 이상'을 적절히 연결하여 전체를 보려고 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낭만주의 전통은 중기와 후기로 가면서 '이상'적인 부분만 남게 되었기 때문에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음유시인정도로 치부되었지만 말이다.
헤겔의 경우도 역시 정신과 현상을 연결한다는 아이디어는, 이상과 현실을 연결하는 방법을 찾는 것과 같다. 그 과정에서 앞에서 비판한대로 방향이 어디로 뛸지 모르며, 전체가 아닌 변증법의 사다리만을 걸어서 올라가는 격이여서 다른 세계와 인식에 대해서는 배제의 현상이 당연히 수반되지만 말이다. 밀뱅크는 이러한 통찰을 바탕으로 회귀하려고 하는 지점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면서 중세시대의 '메타비판'이 가능하면서도 새로운 세계을 꿈꿀 수 있는 신플라톤주의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명확하게 신플라톤주의를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그렇다는 것이다. 여전히 초월의 영역과 현실의 영역의 괴리가 있고 우리는 '나그네'로서 하나님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 사이에 이중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인식하는 신플라톤주의 말이다.
다소 연결이 안되는 질문이기는 하다. 변증법을 옳다고 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이 의미가 있는가? 그런데 이것을 조금만 풀어보면 이렇게 된다. 진보의 운동에는 옳음이 필요한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이들에게 윤리는 필요한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확장하는 변증법에도 정답과 같은 옳은 방향이 있는가? 이것은 어쩌면 진보세력이 가지고 있는 '이념과 윤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앞으로 나아가는 방향이 헤겔이 말하는 것처럼 자유라면 그 자유를 제한하려고 하는 윤리는 그 자체로 타도의 대상이 되지 않는가? 그렇다고 어떤 기준을 세워서 그 기준을 들이민다고 모두가 따를까? 그래서 헤겔은 생각해 놓은 답이 바로 '법'인 것이다. 법에 기술된대로 행하지 않으면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다.
옳은가?의 질문은 '옳아야 하는가?'의 질문으로 옮겨올 수 있는데 그 다음에는 '그 근거는 무엇인가?'라고 할 때 대답이 쉽지 않은 것이다. 인간의 정신인가, 경험인가? 아니면 의사소통합리성과 같은 새로운 합리성의 개념인가? 혹은 타자에 대한 사랑으로서 상대성인가? 필연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향할 수 밖에 없다. 변증법이 원리로써 작동하지만 윤리로써 작동하지 못하는 지점에서 문제는 일어난다. 어떤 대답도 자의적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자유이기 때문에 자유롭게 말하는 것은 N+1 중에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자신의 +1이 정답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이들이 바로 독재자들이다.
자의적인 독재자들의 세상에서 자유는 무엇인가?
신학과 사회이론을 처음 접할 때만해도 '이건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어느덧 3분의 1을 지나가면서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자신들의 역사에서 문제와 대안을 이렇게 찾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반성과 함께 웅장함도 느낀다. 신학이 사회를 규정하던 시기가 지나가고 사회가 신학을 규정하고 이용하기를 넘어서 더더욱 삶 전체를 설명하기 시작하는 이론들이 등장하는 시기들이 맞닥드린 세계를 곰곰히 살펴본다. 세계대전은 이런 관점에서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 이후에 독단적인 주권을 가진 이들의 경쟁의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이렇게 합시다'가 아니라 '이렇게 인식하고 있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자유를 위한 메타비판을 시작해야 겠다. 다음에는 마르크스로 넘어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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