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밀뱅크_신학과 사회학_5장 숭고함에 대한 감찰
중세시대를 지나가면, 근대의 신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일명 신에게서 도피는 그전에 신과 연결된 모든 개념들을 분리해야함을 뜻했다. 처음에는 정치와 경제가, 그 다음에는 사회학이 만들어지고,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종교도 사회학의 관점을 힘입어 종교사회학이 만들어진다. 그 나름대로의 논리로 이론을 만들고 사회의 현상을 설명해가는 사회학은 그 자체로 '현상'을 구체화하고 구조화해서 설명하는 '논리'적인 기능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이에 대해서 '사회'라는 영역이 원래 성경에 기초한다거나, 인간보다 선험적으로 존재하고 있던 구조라고 주장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콩트'로부터 시작된 사회학은 '창조'에 가까운 이론의 영역이었다. 이러한 흐름은 자연스럽게 기존의 종교를 대치시켜서 '신학-사회학'의 관점이 아니라 '사회학-신학'의 구조로 바꾼다. 그러니깐 사회학이 가지고 있는 기반을 가지고 종교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스럽게 종교는 하나의 방법론이 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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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성스럽고 숭고하다고 믿어져 왔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순수하게 가치를 지키는 숭고함을, 거룩함을 종교의 영역으로 놓았다. 그런데 이 영역이 달라진게 아니라 '숭고'의 의미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17세기 이전까지는 자연과 하나님의 대해서 숭고하다는 표현이 자주 사용되었다면, 계몽주의 이후에는 인간에 대해서, 인간이 만든 작업물에 대해서 숭고하다는 표현을 쓰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기존의 종교가 가진 숭고함이 퇴색된다는 것과 함께, 이제 종교는 애매한 시기에 여기저기 가져다 쓸 수 있는 도깨비 방망이가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숭고함이 확산되고, 인간이 지은 거대한 건축물에서 숭고함을 따지는 시기에 하나님은 더더욱 설 자리가 없게 된다. 서로은 이정도로 하고 밀뱅크의 '신학과 사회이론' 5장 '숭고함에 대한 감찰로서 종교사회학 비판'을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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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존밀뱅크의 책 5장까지 왔다. 읽어본 책들 중에서 가장?어려운 책에 속하는 이 책은 기존의 철학과 사회학의 이론을 포함해서 신학적인 정통까지도 올라간다. 지금까지 배운 모든 것을 모두 총동원헤서 말 그대로 '메타'적인 이해를 요한다. 그래서 재미있는 과정이기도 하면서 어려운 작업이기도 하다. 이 책의 12장까지 가야 밀뱅크의 이야기가 명확해질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많은 것들을 깨달았다. 오늘도 5장의 내용을 이해한 만큼 정리해본 결과이다. 더 근본적인 고민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드는 건, 역사의 큰 흐름을 이해하면 할 수록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들의 출처를 더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서 아래와 같이 '처음읽는 중세철학'과 같은 책들을 곁들여서 읽어보고 있다.
현대인들의 주류가 된 생각중에 하나는 '무엇이든 구분과 분할이 가능하다'라는 생각이다. 생체조직에서부터 시작해서 생각과 조직까지 모두 구분과 분할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이 사회학에서는 '기능주의'적인 접근이 된다. 기능적인 접근은 함수로 이루어진다. X축과 Y축의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만들어서 어떤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다. 실용주의는 이러한 관점에서 실험주의와 연결되면서 실험해보니깐 되더라라고 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경로를 만든다. 마찬가지로 종교와 사회의 관계로 각각 원인과 결과로 볼 수 있게 된다. 지금까지 논의는 '종교'적인 원형이 '사회'라는 형식으로 구현된다라고 보았지만, 이제부터는 반대의 경향이 만들어진다. 사회가 종교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시대가 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심신이원론'을 주장하면서 마음과 몸이 서로 분리되어 있으며, 특히 마음의 구조는 자신을 스스로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사유하는 자아를 전제로 한다. 이렇게 분리된 '패턴'은 점점 자신을 이해하는 것 뿐 아니라, 전반적인 사회의 구성요소들을 나누기 시작한다. 데카르트의 세례를 받은 스피노자에게서 시작된 신학정치론은 신학에서 '하나님'을 제거하면서도 '정치학'에서도 하나님을 배제한다. 그렇게 되면서 신학은 그 자체로 '종교'의 일정한 방법을 탐구하는 학문으로 전락하고, 정치학은 '세속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배분하는 정도로 폄하되기 시작한다. 현대라고 하는 modern은 '과거와는 다른 현재'라는 뜻으로 사실 중세시대에도 '고대와는 다른 현재'라는 의미로 쓰였다. 그러니 '중세와는 다른 현재'라는 뜻으로 쓰이면 중세시대의 신과 종교를 분리하고, 정치와 하나님을 분리하면서 '스스로 증명하여 만든 개념'들이 천국이 된다.
칸트는 총 12개의 구분값을 인간이 애초에 가지고 태어난다고 생각했다. 일명 '선험적인 12범주'를 말하는데 위의 그림과 같이 '양, 질, 관계, 양태'라는 큰 4가지의 그룹에서 각각 3가지의 속성들이 붙어 있는 것이다. 세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세상을 이런 방식으로 이해한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사물 자체는 전체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이 이해한다는 것은, 인지한다는 것은 오직 이러한 기본적인 방식을 통해서 한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보통 '특이점'을 singularity라고 부른다. 이 특이점이 오면 이전에 생각하던 방식으로는 다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요즘시대야 특이점은 AI나 메타버스이지만, 중세를 지나가는 시점에서는 칸트와 같은 '신을 떠나서 우리 스스로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으로서의 구분값은 특이점이었다. 이러한 신으로부터 도피는 자신이 처한 '장소'와 '시간'에 따라서 각양각생의 '개념'을 만들게 되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분리되면 비판할 수 있다. 사회학이 종교로부터 분리되어 나와서 자신의 '개념'을 정립하면서 부터 그 개념으로 종교를 비판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예를 들면, '종교의 사회적 구성'과 같은 개념은 사회를 구성하는 '사회구성체 논쟁'에서 '종교'를 구성체의 핵심에 놓아 보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러면서 전치현상이 발생한다. 종교의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보던 시대에서, 사회학의 관점에서 종교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마치 축구에서 한번에 역습을 당한 것처럼 종교는 이제 사회학의 날카로운 과학적 방법론으로 해부되기 시작한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당연히 '분리'가 먼저 일어나야 한다. 모든 것들은 조작적 정의일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분리'는 우리의 생각속에서는 가능하지만 실상 우리의 삶은 어느것 하나 분리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 미국의 사회학자 피터버거는 '사회학'은 이제 종교에 대한 과학적, 인문학적 비판을 가리키는 명칭이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현대신학이라면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불타는 강물에 비유한다. 그리고 다수 신학자들도 적어도 종교적 신념에 속하는 몇 가지 특징에 대해서 사회적 설명을 가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수용해 왔다...그들은 사회학의 관점에서 종교를 환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일견 타당하다고 인정하면서도 종교 내지 신학의 영역에는 결코 다른 무엇으로 환원될 수 없는 차원이 존재함을 천명함으로써 이러한 사회학적 비판의 영역을 제한하고자 한다_p222
사회학이 우선이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사회학은 학문으로서 명확하게 사회의 구성요소와 발생, 주체들이 발생하고 연결되고 사라지는 것들을 '원인-결과'의 관점에서 기술한다. 그러나 그 원인과 결과는 일종의 이론을 기반으로 방향성을 잡게 된다. 그 이론은 다양한 사례들에서 나타나는 '패턴'을 종합한 것이다. 그러니 다른 패턴이 나오면 더 추가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채택되지 않는다. 이런 방식으로 사회학이 구조화되고면서 '일반체계이론'이나 '액체근대', '기능주의 이론', '거버넌스'와 같은 이론들이 원인과 결과를 설명하는데 전제가 된다. 이렇게 되면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 이미 정해진 것에서 출발하게 된다.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되어진 일로 다음을 추리하게 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회학에서 정립한 '이론적 틀거리'를 가지고 역사를 다시 재단해보고, 성경속의 인물의 사회학적 구성을 살펴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기독교는 어떻게 사회를 부흥시켰나?'라는 질문에 대해서 사회학적 관점에서 '발전주의 모델'을 가지고 오면 로드니스타크 같은 기독교의 기본적인 이념이 발생을 넘어 발전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기본적인 전제였다고 주장하게 된다. 로드니 스타크가 지은 '기독교의 발흥'은 역사의 발전은 기독교가 주도했다라고 하는 주장인데 이것은 다분히 사회학적인 관점과 이론으로 역사와 신학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읽다보면 기독교인이라면 매우 고무적으로 자신감을 갖게 되지만, 사회학의 관점에서 '경우의 수'정도로 치부되는 것도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존경스러운 '막스베버'에게서도 동일한 관점을 볼 수 있다. 자본주의의 정당성을 성경의 실천에서 나오는 근면과 성실, 평등과 헌신으로 보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똑 들어 맞는 비판점을 가지고 있다. 자본주의 발전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해보고, 그것을 이루는 기본적인 요소는 '철학과 신학'이라는 근본적인 시작점을 잡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막스베버는 사회를 설명하는 기독교적 관점을 제시했다고 하지만 반대로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문제와 근본적인 '교환가능성의 한계'를 묻어버리는 결과를 가지고 오게 되었다. 그러니깐 '청렴한 부자'나 '정당성을 가진 돈을 사랑하는 기독교인'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마지막으로 프랑스의 현존하는 최고의 지성이라고 불리우는 '알랭바디우'는 신앙이 있지만 않지만 사회학적 관점에서 '사도바울'을 분석한다. 그의 책 '사도바울'은 사도바울이 어떻게 진리를 경험하고 진리의 투사가 되는지를 보여준다. 사도바울은 그 당신의 사회적 맥락에서보면 헬라인으로서는 최고의 지성을 가진 가말리아 학파의 수장에세 사사를 받았고, 히브리인으로는 그 자체로 선택받은 민족이면서도 그 안에서 지배계급에 속하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는 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유의 투사가 되었다고 분석한다. 읽다가 보면 그 당시의 사회상이나 사도바울의 선택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합리적인지를 따지게 되어 있다.
이렇게 분석을 하다가 보면 앞에서 제기한 문제가 다시 떠오른다. 사회의 구성원인 인간이라는 존재들로만 이 일들이 가능한 것인가? 사회학적 관점에서 '종교'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개입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세상을 보고 잇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되면 앞으로 우리의 미래에 어떤 새로운, 놀랄만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기대보다는 '원인-결과'에 따라서 오늘 심은 것들이 내일 난다라고 하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어 있다. 이것이 단순히 신앙을 종교의 한 경우의 수로 만들어 버리는 결과를 가지고 온다. 물론 이러한 논리의 기본 맥락은 존밀뱅크가 주장하는 '급진 정통주의'이 관점에서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많은 부분 동의가 되는 부분이 있다. 인간을 분할할 수 없다는 것과 인간이 영적이라고 인정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논리의 영역을 넘어간다는 것들이다.
예수가 이스라엘의 비전을 급진화한 것은 율법의 요구에 앞서서 자신을 내어주시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재사유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사회적 변화를 위한 예수의 수정된 비전revisions은 그가 종교와 상징체계에 대해 품고 있던 변화의 비전과 정확히 보조를 같이한다. 더 나아가 예수가 자신의 선교활동과 현재나 장래에 도래하게될 묵시록적 인자 간에 모종의 연결관계를 상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심할 이유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자기이해 및 예수 사후에 그의 메시지와 이방인을 향한 대탈주 사건에 대한 재사유간의 연속성이 있다고 볼 만한 이유가 충분하다고 하겠다_p250
존밀뱅크는 어거스틴의 신국론을 기반으로 플란톤주의 혹은 신플라톤주의를 추구한다. 플라톤주의는 한마디로 '이데아'가 존재하고 우리가 사는 현실은 그 이데아를 모방한 세계라는 것이다. 어거스틴에 와서 이러한 플라톤주의는 '신플라톤주의'로 부활하는데 그것은 어거스틴의 저서들에서 '하나님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이라는 개념으로 등장한다. 하나님의 도성이 이데아의 본질이라면 지상의 도성은 그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서 조금씩 다가가는 존재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전까지는 우리는 '이미와 아직'사이에서 '타락과 종말'사이에서 결국은 새로운 세상으로 변화될 구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 된다.
성서비평과 그리스도교의 기원에 관한 역사서술을 기능론의 입장에서 설명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으로 살펴보았는데, 이는 사회학이 그와 같은 주제를 설명하기에 역부족임과 아울러 인간사의 제반 원인을 규명하는 일도 단지 재정의하고 사태를 재서술하는 것에 달린 사안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전체사'란 도달불가능한 영역이고 역사는 신비화전략을 통해서 공시적 구조의 차원을 내세울 수 있다는 주장을 건재하는 한, 사회학이 계속해서 특권을 누릴 수 밖에 없다고 말한 폴 벤느의 일반적인 견해를 뒷받침해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기능론적 종교사회학이라는 특정 학문분야일 것이다_p261
급진정통주의는 종교를 사회를 구성하고 설명하는 기능론으로 보는 것을 비판하고 '근대라는 멋진 신세계'보다 오히려 과거의 중세시대가 더 인간에게 좋았던 시절이었지 않냐고 주장한다. 오히려 어거스틴이나 토마스 아퀴나스, 쿠자누스와 오컴과 같은 학자들이 살았던 시절이 더 중요한 시기가 아니었을까?라는 고민을 던진다. 그리고 그러한 시대를 우리도 살아갈 수 있고 그것은 점진적이기 보다 한번에 급진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다시 '정통'이라고 하는 신학의 흐름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이다. 누구나 시작점이 있고 실수를 하거나 길을 잃으면 북극성을 찾는 것처럼 자신에게 꾸준히 힘을 주는 존재를 찾게 된다. 밀뱅크에게는 현대사회가 그 자체로는 구원받기 힘들고 오히려 어거스틴이 활동했던 시기의 깊은 지혜와 인생의 빛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교의 기원에 관한 사회학자들의 논제들 중에서 보다 효과적인 것은 사회학적 접근이 아니라 역사적 접근임을 알 수 있다. 이 말은 결코 사회적 위상과 종교적 충성 간에 선택적 친화성elective affinity이 존재할 수 있음을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사회적 위상 자체는 도덕적, 의례적, 종교적 관례에 의해, 또는 이것들의 퇴락한 잔재에 의해 형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_p257
모든 현상을 종교의 관점에서 보던 시기가 지나가면 모든 현상의 공백을 종교로 메우기 시작한다.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들 때, 위기의 순간에, 이해되지 않는 사고가 발생하거나, 자신이 설명할 수 없는 애매모호함에서 종교가 등장하는 것이다. 그러면 굳이 이미 종교라는 굴레는 '기능'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며,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이여도 된다는 '성스러움'개념을 갖다가 쓰고 있기 때문에 삶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된다. 물론 이것이 맞는지는 다양한 비판이 가능하지만 말이다. 밀맹크는 이 책에서 아래와 같이 종교가 기능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정리해 놓았다.
경계성 이론 : 새로운 역할을 맞거나 취직을 해야하는데 잘 안되거나, 이루어져야 하는 통일이 너무 늦거나, 재난과 재해의 가운데 희망을 발견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기다리게 하는 힘으로 작용하는 종교의 기능
희생 이론 : 국가가 유지되기 위해서 누군가가 희생을 감내해야하는록 유도하는 기능
신정론 이론 : 악에 대해서 설명하고, 악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기능
이러한 3가지의 이로는 사회학이 설명 이상의 기능을 필요로 할 때 종교를 가지고 와서 해소하는 방식이다. 어떤 사회든지 무엇인가를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미래를 기다리는 이들에게 '지금의 현상이 이렇게 되어 있어'라고 하는 말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미래의 어떤 것들이 된다는 소망을 갖는 것은 단순히 팩트체크나 정보전달에서 만족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학은 사회이론으 껍데기를 가지고 종교를 기능을 갈취한다. 그래서 누군가 아쉽게 혹은 안타깝게, 애석하게 죽었거나 다쳤다면 이를 기리는 희생제사의 방식으로 '추도'하게 된다. 이러한 추모와 추도 그리고 애도로 이어지는 과정은 사회학은 설명할 수는 있지만, 그 자체로 왜 그렇게 되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 영역은 '심리학'의 영역으로 밀어 놓는다. 마찬가지로 전쟁에 대한 의미 혹은 원인을 파악할 때 '악'에 대한 종교의 관점을 취한다.
탤컷 파슨스와 클리포드 기어츠는 베버의 노선을 따라서 종교를 신은 정의롭다는 생각과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종교가 사회와 교차되는 지점은 일차적으로 이러한 관점에서 이행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종교를 철저히 규명하고자 하는 또 다른 방식을 보게 된다. 즉 종교는 사회적 담론의 현장에 나중에 진입하는 것이며, 그 기능은 사회 내지 이데올로기의 체계에 의해 야기된 불가피한 공백lacunae을 다루는 것이다. 이러한 공백을 메우는 방식은 '경계성 이론, 희생이론, 신정론'이다_p262
이런식으로 종교는 사회이론이 만들어 놓은 그물의 엉성한 부분을 메워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것이 밀뱅크가 이 책의 제목을 '신학과 사회이론'으로 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분석에서 빠져 있는 것은 '인간의 조건'이 과연 노동, 작업, 행위로만 점철될 수 있냐는 것이다. 인간의 조건을 이야기한 한나아렌트는 사회학적 관점에서 조건을 든 것은 아니고 현재에 우리의 삶을 압도하는 조건들을 생각해 본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종교의 본질은 빠져 있다. 인간을 영혼과 육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사이에서 지성과 영성, 감성이 하나로 연결된 유기체로 보는 것은 사회학적으로 너무 많은 변수들의 조합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 중에서 하나를 떼어서 가져오는 격이다.
어귀스트 콩트로 부터 시작된 150년정도의 사회학의 역사는 그 나름대로 사회의 조건과 형성을 소개하고 설명하면서 사람들이 왜 이런 행동을 하고, 어떻게 사회가 흘러가는지를 보여주는 작업이었다. 조금 지난 이야기이지만 '비판사회학 대회'를 다녀온 적이 있었다. 사회학을 비판의 도구로 해서 사회의 문제들을 파헤치는 학파였다. 여기서 나오는 개념중에 하나는 '멀티 트랜스포메이션'이었다. 장소와 시간에 따라서 개념이 형성되는데 장소와 시간이 관측자에 따라서 모두 다르기 때문에 개념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흘러간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의 기준'으로 보편성을 찾는 것은 힘들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기준들이 아니라 몇개의 기준들로 '위험사회'라던가 '피로사회'라던가 '투명사회'라던가 하는 개념의 설명은 밀뱅크가 볼 때 충분하지 않다는 결론에 다다르는 것이다. 앞으로 이 책에서 마르크스주의와 공동체주의, 정치학, 사회과학을 다룰 것이다. 기본적인 논지는 다르지 않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그동안의 이론들을 넘어서 새로운 사회를 상상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가능하다 충분히. 사회학을 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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