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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양 Aug 02. 2016

독일에서 디자이너로 살아간다는 것.

달라도 너무 다른 세상에 대한 관찰기

인생에서 한번쯤 어딘가 외국에서 '일해볼' 기회가 있다면 단연 독일이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덜 자본주의적인' 국가의 모습은 어떤지, 노동은 어떤 모습과 의미여야 하는지 보고 듣고 느꼈기 때문이다.

커리어를 이 곳에서 시작하며 직업적 가치관을 갖게 된 것은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디자이너로서 살며 느끼며 겪었던 독일은 정말이지... 그 어떤 곳에서 또 이럴 수 있을까 생각한다.


대한민국에서 내가 느껴온 답답함 중 하나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아는 것'과는 별개로 눈 딱 감고 기어들어가야 하는 일이 너무 잦다는 것이었다.
금수저 공주님 땅콩 봉지 안 까줬다는 이유로 한 조직의 수장이, 평생 일해온 공간에서 추방당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여전히 족벌기업의 신입공채 지원자는 차고 넘친다. 
스물 셋, 갓 시작한 나이에 명퇴를 당했다. 역시나 이름 들으면 모르는 사람 없는 대기업. 그렇지만 핸드폰 제출하고 정신교육을 받으면서라도 한달 일년이라도 더 붙어있어야 한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 당장 목구멍이 포도청이니까. '말만한 자식이 쌀만 축내고 들어앉아' 얻어먹는 눈칫밥에 목이 메이니까. 둥지에서 입 벌리고 아우성치는 자식들, 뭐라도 물어다줘야 하니까.
이러나 저러나 괴롭긴 마찬가지라면 마음만 괴롭기를 선택하는 사람들, 과연 누가 이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 소신과 신념같은 것은 배부르고 나서나 할 수 있는 얘기라는데 말이다.


어제 내가 일하는 회사에서는, all hands 2015 라는 작은 행사를 했다. '올해의 모든 손길들' 이라는 뜻이다. 각 부서의 수장, 프로젝트 매니저들이 각자 자료를 준비했다. 조직의 변화, 올해의 예산과 기획, 성과들을 세밀하게 공개했다. 새로운 직원들과 긴 휴가를 떠나는 직원을 소개했다. 7년간 성실히 일했던 패트릭은 3개월동안 필리핀으로 스쿠버다이빙을 배우러 떠난다고 했다. 함께 했던 직원들을 소개하며, 어떤 프로젝트에서 어떻게 기여했는지 이야기했다. 팀의 리더들이 모두의 앞에 서서 thank YOU라고 인사했다.


심지어 두달밖에 일하지 않은 꼬꼬마 인턴 '다양 리'도 호명되었다. 내가 이 곳에 와서 맡았던 일, 지금 하는 일을 말해 주었다. 잘하고 있다고, 앞으로도 잘 하라고 응원의 등 두드리기를 받았다. 몇 시간이 걸렸지만 지루해 하거나 자리를 뜨는 이는 없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이 불렸을 때, 모두와 눈을 마주치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리고 꼭 자신이 그 프로젝트를 잘 마무리한데는 누구와 누구의 도움이 컸다고, 그들에게 릴레이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프로젝트 매니저들은 내년에도 우리 함께 즐겁게 성장하자고 말했다. 내년에는 우리 모두 조금 더 편하고 즐겁게 일할 수 있도록 더 좋은 환경과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그러니 부디 내년에도 우리 회사에서 여러분의 능력을 발휘해 달라고, 우리 회사를 떠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 간곡한 부탁을 끝으로 행사는 마무리되었다. 이렇게 말하면 그런 것이 가능하다니 작은 스타트업이겠지,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겠지만 그리 작은 회사는 아니었다. 수십억짜리 프로젝트를 하는, 중국과 미국 등지에 여러 개의 브랜치가 있는 디자인 회사다. 본사에만 해도 개발자가 마흔 명. 결코 작은 규모는 아니다.


그러고 보면 이 회사에서 가장 많이 쓰는 인삿말이 enjoy!였다. 작업 파일을 공유할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선물을 줄 때도 enjoy! 했다.


어제 나는 이렇게 인간적이고 따뜻한 회사의 정직원이 될 수 있다면 세상에 더는 소원이 없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눈물 고인 눈으로 박수치고 고마웠다고, 내년에도 잘 부탁한다고, 우리 더 잘해보자고 서로를 와락 껴안고 등을 두드리는 이들이 너무나 부러웠다. 오늘도 크리스마스 휴가(12월 19일부터 1월 3일까지 전원 크리스마스 휴가를 떠나며, 유급휴가다.)를 조금 일찍 떠나는 이들이 다양! 하고 부르더니 양 팔을 벌렸다. 나는 껴안아 주고 귓가에 쪽 소리나게 입맞춤을 해 주는 서양식 인사 문화에 익숙지 못하다. 그들은 엉거주춤 일어난 나를 정말이지 꽉 껴안아주면서 다정하게 인사를 했다.

"다양, 크리스마스랑 새해 잘 맞이하고, 내년에 만나. 한국에는 못 가지? 네가 외롭지 않게 연휴를 잘 즐겼으면 좋겠다. 보고싶을거야. 휴가동안 어떤 경험을 했는지 돌아와서 들려줘. 건강하게 다시 만나자."

동료들의 일장 연설에 마음이 너무 이상했다.


내가 아는 세상에서는 30년간 몸바쳐 일한 회사에 어느날 출근하니 책상이 없어진 상황이 당연했었다. 심지어 이건 '카더라'가 아닌, 내 가족의 이야기였다. 난 이게 당연한 세상에서 평생을 자랐다. 그런데 지구 반대편에선 회사 사장이 모든 직원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한 해를 마무리한다.

내가 아는 세상에서 휴가라는건 '날짜를 받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당일 아침 이메일 통보로 무제한 병가를 받아 다 나을 때까지 마음놓고 푹 쉬는 삶을 산다. 자기의 업무에 지장만 주지 않는다면 전날에 통보하고도 35일의 휴가가 법적으로 보장되는 것이 당연한 상식인 세상에 나는 외계인처럼 우뚝 서 있었다. 회사의 남자 동료와 껴안는 것은 성추행이나 사내 불륜이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던 내가, 남자 동료에게 안겨선 귓가에 속삭이는 다정한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whereabout someone이라는 전체 메일이 하루에도 여러개 온다. 감기 기운이 있어서 집에서 일할게, 혹시 모두에게 옮길까봐 걱정돼. 메일로 연락 줘. 아이 학교에 갔다가 4시부터는 집에서 일 마무리할게. 전화나 메일 연락 가능해. 오늘 오후에 회사 가려고 했는데 안되겠어. 약속이 늦어지고 있어. 내일 보자.


뭐가 문제일까. 나는 평생 한국과 정서가 안맞는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내게 다들 나가보면 한국이 얼마나 좋은지 알게 될거라고, 나가서 고생 좀 해보라고 말했다. 그런데 나와보니 알겠다. 얼마나 좋은지는 나와봐야 안다. 물론 고생한다. 그치만 한국이랑 다르다. 몸도 마음도 훨씬 덜 힘들다.


일단 신뢰의 문제가 큰 것 같다. 꾀병같은 게 없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자부심이 있고, 애착이 있으며, 책임감이 있으니까. 그냥 시켜서 하게 되는 일 같은건 거의 없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게 될지는 프로젝트 매니저와 협의해 결정한다. 일이 생겼는데 이걸 할 수 있는, 또는 하고 싶은 인원이 우리 조직에 없으면 그 분야의 프리랜서를 고용한다. 그게 가장 좋은 결과를 내는 방법이니 말이다. 아프면 최대한 푹 쉬고 빨리 건강을 회복하는데 집중한다. 효율이 가장 좋은 상태에서 업무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컨트롤하는 것이다. 억지로 눈치보면서 아픈데 앉아있어 봐야 소득이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아니까.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다. 그게 상식이니까.


또, 개인의 쉼과 여가, 사생활을 존중한다. 퇴근 후 저녁 시간을 이용해 어학원에 다니겠다는 나를, 내 옆자리의 디자이너는 진지하게 만류했다. 
"다영, 사람이 하루에 발휘할 수 있는 체력과 집중력은 한계가 있어. 너는 매일 아침 열시부터 일하잖아. 늦어도 일곱시에는 여가 시간을 갖거나, 맛있는 것을 먹고 푹 쉬거나, 춤을 추러 가거나 영화를 보러 가거나 했으면 좋겠어. 그렇지 않으면 넌 곧 고갈되고 말거야. 하루가 24시간인 이유가 뭔지 아니? 그건 8시간은 자고, 8시간은 일하고, 8시간은 놀라는 뜻이야. 이 곳에서 인턴을 하는 동안 네가 이 곳에서 일뿐 아니라 삶의 방식도 배워보았으면 좋겠어. 난 네게 충분히 노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일은 이미 충분히 많이 하고 있잖아."


또 다른 디자이너는 이렇게 말했다. 
"네 튜터에게 말하고 주말에 뮌헨 같은 곳에 간 다음, 수요일쯤에 돌아와. (나는 인턴에겐 병가 외의 유급휴가는 없다고 대답했다) 그럼 너는 뮌헨에 너무 가고 싶어서 마음이 아파서 병가를 쓴다고 해. 농담하는게 아니야. 너는 너무 어려. 넌 더 놀고 경험하고 여행하고 쉬고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느껴야해. 그래야 행복하고 건강한 디자인을 할 수 있어. 네 튜터가 안 보내주면 나한테 말해. 넌 일만 하다가 이 도시를 떠나면 안돼."


한 달째 똑같은 옷을 입어도, 화장을 전혀 안하고 회사에 가도, 머리를 삼일째 안감아도 혼자 삼인분을 퍼먹어도 아무도 아무 말도 안 하는 세상에서 잠시 귀퉁이를 빌려 살아가면서 나는 삼일만 같은 옷을 입어도 눈치보이던 삶을 되돌아보았다. "너 어제 집에 안들어갔나봐? 누구랑 있었어?"따위의 희롱은 덤, 지루성 피부염으로 고생할 때조차 온 얼굴을 '커버력 좋은 파운데이션'으로 덮고 감추고 살았던 지난 날의 나. '여자라면...' 으로 시작되는 가정법의 문장에 점점 어깨를 움츠리던 나. 그래, 너무 힘들었다. 


이 곳에서도 물론 힘들 때가 있다. 결코 쉽지 않다. 그렇지만 나는 이곳에서 만만하고 약한 여자가 아닌, 동등한 인간으로 존중받고 인정받으며 사는 삶이 있음을 보고 느끼고 겪었다. 돈 한푼에 무릎꿇고 인격적인 모독과 모멸감 앞에서 개인의 가치관과 윤리의식을 고이 접어 밀어넣지 않고도 행복하게 일할 수 있음을 보았다. 디자이너의 인생에 야근이 없을 수 있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일해보았다. 새벽 한 시의 밤 거리에서도 삼초에 한번씩 뒤돌아보며 겁먹은 발걸음 재촉하지 않고도 집에 안전히 갈 수 있었다. 오늘 아프면 아프다고, 오늘의 컨디션이 별로라 작업이 안 된다고 말해도 된다. 그는 '나도 그거 뭔지 알아. 그럴땐 그냥 쉬어야해.' 라고 말하니까. 예쁘지 않아도 된다. 조신하지 않아도 된다. 허례허식도 없다. 헤이. 하이. 바이. 엔조이. 인턴이 사장님에게 "헤이, 우유 데우는 김에 내 것도 같이 해줘. 너 스팀 잘 하잖아." 할 수 있다. 


부럽다. 부러워서 죽겠다. 이 문화가 이 사회가 내 것이었으면 좋겠다. 이 성숙한 의식과 배려와 상호존중은 어디서 오는 걸까. 심지어 이들은 통일도 했다. 그러고도 유럽 1위의 탄탄한 경제대국이다. 사교육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어도 애들은 잘만 자라고, 저녁이 있는 삶이 일상이다. 존경하는 목사님께서 "지구상에서 하나님 나라와 가장 가까운 나라가 있다면 그것은 독일일 것이다"라고 이야기 해주셨었는데, 진심으로 너무 자주 그렇다는 생각을 한다. 


독일에 오기 전, 나는 이 나라에 대한 아무런 사전 지식도 없었다. 그랬기 때문이겠지, 나는 사소한 것에도 예민하게 차이를 느낀다. 이 모든 사유와 관찰을 이제 조금씩 공유하려고 한다. 디자이너로서 독일에서 일한다는 것은 아직 그리 흔한 경험은 아니다. 게다가 이렇게나 좋은 사람들에게서 '시다바리' 인턴이 아닌, 독일 대학생들의 정규 교육과정인 '프락티쿰'을 그대로 적용한 '교육생'으로 존중받고 인정받으면서 일한다는 것은 더 흔치 않다. 나에게 과분한 기회가 선물처럼 주어져 겪었던 보물같은 경험들을 이제부터 나누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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