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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희 Sep 28. 2019

그 날 무슨 생각을 했냐면

그 날 무슨 생각을 했냐면,

달이 참 예쁘다는 생각을 했어. 참 동그랗고 예쁜 달이구나. 밝고 환하고 예쁜 달이다. 나는 대화 내내 달을 올려다봤고, 너는 나를 보다가 달을 보다가 했던 거 같아. 내 얼굴 보는 거 느껴졌는데 모른 척했어. 그냥 그러고 싶어서. 그 날 무슨 생각을 했냐면, 연애가 참 어렵다는 생각. 나에게는, 그리고 어쩌면 우리에게는 어린 날의 연애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 그게 슬퍼서 그런 표정을 지었었나 봐. 내 슬픔을 알아채 주어서 고마웠어. 정말이야.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어. 이게 연애가 아니라면 대체 무언가, 그러니까 이건 어쩌면 우리의 연애겠구나. 남들이 뭐라고 하든 이건 연애일지도 모르겠다. 만일 이게 연애라면 스물몇 언저리에 있었던 작고 예뻤던 기억들이 어쩌면 모두 연애였겠구나. 그렇지만 말이야, 그렇지만 나조차도 이게 뭔지 정확히 말할 수 없다면 그건 정말 연애일까? 나는 한 번도 그들을 애인이라고 불러본 적 없는데, 그럼 너는 대체 누구야? 가끔 그렇게 묻고 싶어져. 너는 누군지, 그럼 나는 너에게 누구인지. 아마 백 퍼센트의 확률로, 너는 아직 애인이 없겠지만 그 말이 듣고 싶지 않아서 나는 오늘도 네게 묻지 않아. 터져 나오는 마음을 자꾸 혀 밑에 묻고 어색하게 웃지. 의젓하고 언제든 전혀 서운하지 않은 어른이 돼. 어느 순간부터 나는 조금도 자라지 못했는데 말이야.


어른의 연애는 뭘까. 곰곰이 생각해봤어. 어른은 뭘까. 나는 뭘까. 그 날 내가 했던 말 기억나? ‘어릴 땐 나의 열렬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어른이 되는 줄 알았는데, 커보니까 더 이상 열렬할 수 없는 사람만 어른이 되는 것 같다’는 말. 나는 그 말이 참 슬프더라고. 어릴 때 나는 늘 열렬했는데, 그래서 참 많이도 다치고 참 많이도 슬펐지만 그래도 나의 열렬함을 사랑했는데. 요즘은 나의 열렬함을 견디기가 어려워서 자꾸만 사랑한단 말의 발음을 뭉개고 포옹을 줄이고 입술을 닫게 돼. 어른이 된 거야. 어른들은 겁쟁이니까. 나는 무뎌진 척을 잘하고 도망을 잘 가는 사람이 됐어. 어른의 연애는 그런 걸지도 몰라. 아닌 척을 잘하는 연애. 적당히 좋아하고 적당히 만나고 적당한 마음을 주고 적당한 때 헤어져 적당히 슬퍼하다가 또 그렇게 적당히 다시 모른 척 살아가는 그런 관계. 그런 게 어른이라면 절대로 되고 싶지 않았는데 나는 네버랜드에 가보지도 못하고 몸만 쭉쭉 자라서 글쎄, 어른이 돼버린 거 있지. 당신도 그래? 하긴, 당신은 나보다 키가 훨씬 크니까. 커피도 마시고 일도 하는 어른이니까. 그래서 도망도 훨씬 잘 갈지 모르겠다. 어른들은 도망을 잘 가잖아. 다시 돌아오지도 않고. 열 밤 자면 온다는 약속이 거짓인 거 사실 나는 다 알고 있거든.


우리의 연애는 (만일 이게 연애라면, 연애라고 친다면.) 언제가 처음이었을까? 첫 입맞춤이나 첫 키스를 했을 때, 그때는 연애였을까? 처음 밤새 통화했을 땐? 처음으로 함께 걸었을 땐? 내가 당신 앞에서 처음으로 울었을 때는? 그때는 연애였을까? 그 모든 질문의 답이 ‘아니’라면 그럼 그때 우리는 뭐였을까. 촌스럽고 유치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런 게 궁금해. 혹은 이게 연애가 아니라서 나중에 정말 우리가 연애를 하게 된다면, 그럼 우리의 그 모든 처음은 다 어디로 사라지는 건지. 많은 게 처음이 아닌 우리가 처음처럼 연애할 수 있을지. 그게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지. 나는 아직도 멍청하게 그런 게 궁금해. 의미, 그놈의 의미. 그게 뭐라고.


그러니까 그 날, 그런 생각을 했어.

달이 참 예쁘다는 생각. 당신이랑 여기를 걸어서 참 좋다는 생각. 바람이 적당히 선선해서 산책하기 좋다는 생각. 손을 잡고 싶다는 생각. 너는 무슨 마음일까 하는 생각. 우리는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 조금 슬프다는 생각. 행복하고 싶다는 생각. 어른의 연애가 조금은 더 미래의 일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나는 아직 덜 컸구나 하는 생각. 영영 어른이 되지 못해도 좋으니 나의 열렬을 감당하고 싶다는 생각. 그러나 더 이상 아프고 싶지 않다는 생각. 그러면 도망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 모든 게 이미 너무 늦었다는 생각. 안 좋아하기도 너무 늦었고, 아닌 척 하기도 너무 늦었고, 도망가기도 이미 너무 늦었다는 생각. 그런 생각을 했어.


당신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른이 되어서 좋다고 했던 당신은. 그 날 나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묻던 당신은. 조용해진 나를 따라 아무 말도 않던 당신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꾸 그런 게 알고 싶더라고. 언젠가 당신이 나를 아주 아프게 할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당신은 알까. 당신은 정말 나를 아프게 할까. 우리가 행복할 수 있을까.


그 날 무슨 생각을 했냐면, 그런 생각을 했어.

달이 참 예쁘고, 네가 좋아서 슬프고, 이게 연애가 아니어도, 영영 아니어도 어쩔 수 없겠다는 생각.


그 날 그런 생각을 했어. 같이 걷던 다리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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