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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희 Jun 09. 2020

Eternal sunshine

망각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How happy is the blameless vestal’s lot
The world forgetting, by the world forgot.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Each pray’r accepted, and each wish resign’d”


― Alexander Pope, Eloisa to Abelard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 조엘은 기도한다.

“제발 이 기억만큼은 간직하게 해 주세요.”


화가 난 채 헤어진 클레멘타인과 화해하기 위해 클레멘타인이 일하는 서점으로 찾아가는 조엘.

하지만 조엘이 마주한 건 반갑게 인사하는 자신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의아하게 바라보는 클레멘타인의 멍한 얼굴이었다.

클레멘타인이 자신에 대한 기억을 지우는 시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조엘은 화가 난 채로 괴로운 하루를 보내고, 기억을 지워준다는 회사, “라쿠나”를 찾아간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한다. 클레멘타인의 기억을 지워달라고. 너무나 괴롭다고.

의사는 조엘에게 묻는다. “후회하지 않으시겠어요?”

조엘이 대답한다. “후회 안 해요.”


조엘은 후회한다.

생생하게 재생되는 기억 속 모든 장면에서 반복적으로 삭제되는 클레멘타인의 손을 꼭 붙잡고, 후회한다.

제발, 이 기억만큼은 남게 해 달라고.


어릴 때, 나는 이상한 사람들을 참 많이 만나고 다녔다.

누군들 그렇지 않겠냐만은, 헤어진 연인들은 문제가 참 많은 사람들이었다.

누군가는 술만 마시면 기억을 잃었고, 누군가는 거짓말을 밥 먹듯 했고, 누군가는 죽어버리겠다며 나를 협박했고, 누군가는 참으로 진부하게도, 바람을 피웠다.

친구들은 혀를 내둘렀다. 병신자석이라는 뜻의 ‘병자’라는 별명도 붙었다. 누구는 쓰레기를 만나서 사람 만들어놓고 헤어진다며, ‘마더 테레사’랬다.

이쯤 되면 노벨 평화상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즈음, 나는 지쳤다.

기억이 덕지덕지 붙어 나를 괴롭혔다. 몸이 무거웠다.

되돌아보니 모든 추억이 오염돼있었다.

참 예뻤는데, 하고 추억하다 보면 어디선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악취가 나를 괴롭게 했다.

정말 예뻤어? 그다음엔 어떻게 됐어? 무슨 일이 벌어졌어? 악취는 내게 계속 말을 걸었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예뻤던 기억은 판도라의 상자에 차곡차곡 담겨 일말의 희망도 없이 버려졌다.

언제 다시 열릴 줄 모르고.


사람 보는 눈 없고, 자존감 낮았던 스물초 언저리의 기억은 그래서 슬프다.

마음 놓고 추억할 인간이 없어서

나는 어린 날의 여름밤도 버리고,

겨울 새벽도 버리고,

안개 낀 푸른 창도 버리고,

집으로 돌아오던 버스 밖 풍경도 버렸다.


“이 기억만큼은 간직하게 해 주세요”, 하는 기도가 나에게 다르게 남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몸이 아플 만큼 엉망이었던 추억 때문에, 기억에서 도려내고 싶었던 존재들 때문에, 덜어내고 덜어낸 추억 상자는 휑했다.

못난이 인형을 들고 엉엉 울던 클레멘타인에게 너는 예뻐,라고 말해주던 조엘의 추억이 엉망으로 끝난 것처럼 

나에게 웃어주던 얼굴들도 모두 무서운 얼굴을 하고 떠났다.

어느 날은 슬펐고, 어느 날은 화가 났고, 어느 날은 그저 멍했다.

어느 시인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그래, 내가 사랑한 곳마다 폐허였다.



다시 만난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겁에 질린다.

사랑했었지만 그럼에도 질리고, 그럼에도 끝났다는 사실이 숨 막혀서 클레멘타인은 말한다.

우리는 다시 헤어지게 될 거야, 너는 나에게 지치고, 나는 너에게 질리고, 다시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결국 끝나게 될 거야.

조엘은 클레멘타인에게 대답한다.


“괜찮아.”



조엘의 기도와 나의 기도는 같지만 다르고 우리는 모두 슬프고 아무도 우리가 어디로 흐를지 모른다.

살면서 우리는 수많은 조엘을 만나고, 수많은 날을 클레멘타인이 되기도 한다.

기억을 만들고, 지우고, 또 만들면서. 서로를 그리워하고 미워하고 또 다시 만나고 싶어 하면서.

다시 누군가를 만나기를 겁내고, 그럼에도 다시금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고, 결국은 모든 걸 감수하면서.


그럼에도 괜찮다고 말해버리는 용기 있는 자들만이 사랑을 한다.

후회할지도 모른단 걸 알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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