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베를린플레이크 Feb 09. 2021

수선화의 향기를 아시나요

베를린 다이어리

페니(베를린의  대형 슈퍼마켓) 갔다가 플라스틱 상자에 빼곡히 누워 있는  묶음을 봤습니다. 몇몇 묶음은 이미 피어 있어서 무슨 꽃인지는   있었어요. 노란 수선화. 다른 꽃들처럼 양동이에 꽂혀 있지 않고 오이처럼 상자에 담겨 있으니 당최  같지가 않았습니다. 슬쩍 보고 지나치려다 다시 박스 앞에 섰습니다.   들어있는  묶음이 99센트. 1500원도  하는 가격이었어요.  묶음 살까? 그래서 봉우리를  다물고 있는, 도대체 어떻게 필지 모르는, 생긴      같이 생긴 수선화  묶음을 샀습니다.   

이것은 파인가, 꽃인가

 

하룻밤이 지나니 수선화 한 송이가 그새 피었습니다. 릴리나 장미처럼 뜸 들이지 않고 바로 피었어요. 3일이 지나니 열 송이가 모두 피더군요. 수선화 향기가 말도 못 하게 좋았습니다. 어떤 향수의 향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진하고 싱그럽고, 꿀 향이 나는 냄새였습니다. 은은하다는 표현과는 거리가 먼 향기였죠.


“내 향기를 원해? 그럼 맡아봐”


하고 마치, 두 팔을 들어 겨드랑이 밑을 활짝 내보이는 모습처럼 대담하고 직접적인 향이었어요. 생긴 것과는 달리, 수줍음 따위는 없는 향기였죠. 수선화의 속명이 나르시시즘의 유래인 나르시쿠스(Narcissus)에서 왔단 걸 알면 더욱 끄덕여지는 향이랄까요.


수선화의 향기에 빠진 건 오래전 출장으로 갔던 타이완에서였습니다. 2월이었고, 타이완의 명절인 춘절 때였습니다. 타이베이에서 유명한 미술관에 갔을 때였던 것 같은데, 잔디밭에 수선화가 엄청 많이 피어 있었습니다. 꽃잎은 하얗고, 속은 노오란 수선화들이 매우 선명하게 피어 있었어요. (전체가 노란 유럽의 수선화와는 모양이 좀 다르네요.) 끌리듯 다가가 향기를 맡았는데, 깜짝 놀라고 말았죠. 그렇게 진하고 좋은 향이 날 줄 몰랐거든요. 이후 수선화는 저에게 생김새보다 향기로 먼저 각인된 꽃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예쁜 수선화를 아일랜드 블라니성에 갔을 때도 보았는데, 그때는 일정이 바빠서 보기만 하고 지나쳤어요. 향기는 미처 맡지 못했죠. 그때도 향이 그렇게 아름다웠을까요.


수선화를 보면 생각나는 영화가 있습니다. 더 큰 세상을 살기 위해 마을을 떠난 에드워드가 큰 물고기가 되어 자신의 인생 이야기로 남는 판타지 영화 <빅 피시>입니다. 영화에서 에드워드가 평생 사랑할(그리고 사랑한) 여자를 위해, 그녀가 좋아하는 꽃으로 집 앞을 가득 메우는데 그 꽃이 바로 수선화였죠. 대사 하나하나가 주옥같았던, 언제 봐도 가슴 뭉클한 영화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한 구절을 남깁니다.


때로 운명은 잔인하게 주위를 맴돈단다.
배는 이미 떠나갔고, 오직 바보들만이 멈출 줄을 모르지.
사실 난 늘 바보였단다.

 



작가의 이전글 둥굴레와 다시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