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베를린플레이크 Jun 02. 2021

무엇이든 '만들어' 보세요

베를린 다이어리

보일러가 고장 났다. 남자 친구는 공구 통에서 펜치를 꺼내 익숙하게 보일러 관의 한 밸브를 열고 물을 빼냈다. 흘러나오는 물을 통에 담아 버리기를 여러 번, 닳고 닳은 밸브 나사를 (영혼이 털릴 때까지) 조여 다시 연결시키니 온수가 나온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사람을 불러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더니 헛웃음을 지었다. 고치는 사람이 하루 만에 오지도 않을뿐더러 부르는 비용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또 마음대로 부를 수도 없다. 집에 문제가 생기면 집주인에게 상황을 먼저 알리고 정해진 하우스 마이스터가 체크를 하러 오거나 고친다. 우리 집 하우스 마이스터는 지방 일정 때문에 2주 후에나 올 수 있다고 했다. “2주라고??” 서울 같으면 2시간 후를 잘못 들었나 하겠지만, 베를린에서는 누구나 그러려니 한다. (다시 온수가 끊기지 않기만을 바라며 기다리는 수밖에) 


보일러뿐만이 아니다. 물이 새는 변기, 천장에 드러난 전선도 모두 각자 뜯고 고친다. 집집마다 있는 드릴 공구와 사다리는 혼수품만큼 중요하다. 고치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독일 사람들은 만들 수 있다면, 만들어 쓴다. DIY 가 유독 발달한 이유다. 남자 친구는 하나밖에 없는 우리만의 조명을 만들자며 미술용품 전문점인 모둘러에서 기름종이를 사다가 반투명한 사각 오리가미 조명 갓을 만들었다. 각각의 면과 길이를 재고 계산하느라 몇 날 며칠이 걸렸다. 이케아 조명 하나 사서 달면 될 것을 왜 굳이 저러고 있나, 처음엔 이해가 안 갔다. (그러다 어느새 나도 같이 오리가미를 접고 있었지만.) 


우리가 만들어 쓰고 있는 것 중 최고봉은 테라스에 만든 나무 데크다. 주택 자재 전문 마트인 오비 마크트(OBI Markt)에서 마음에 드는 색상과 무늬의 나무 판(3미터짜리 여러 개)을 골라  마트 한쪽에 있는 커팅룸에 가져가 길이에 맞게 잘라 달라고 한 다음, 집으로 실어왔다. 잘라온 나무판 하나하나에 먼저 방수 코팅 오일을 세 번씩 바르고 며칠을 말렸다. 전동 드릴로 나무 판 사방을 박고, 끼워서 데크를 완성하기까지 일주일 넘게 걸렸다. (발코니 벽을 하얀색으로 칠하는 건 이제 일 축에도 못 낀다.) 고생 고생해서 만든 나무 데크는 특히 록다운 기간 동안 아주 요긴하고 살가운 공간이었다.


서울에서는 꿈도 안 꿀 일을 ‘삶의 도전’처럼 하고 산다. 시간이 없어서, 할 줄 몰라서 혹은 귀찮아서 해본 적 없는 많은 일을 여기서는 당황하다 하게 되고, 체념하다 하고, 나중엔 ‘오기’로도 한다. 사람들은 그렇게 선반을 만들고, 타일을 바꾸고, 천장에 매달린 전선을 갈라 전구를 달며 자칭 ‘기술자’가 된다. 독일에 사는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첫 경험이자 도전일 것이다. 


이곳에서 살다 보면 ‘뭐 이런 것까지 해야 돼’하며 짜증 내던 마인드가 어느 순간 “내가 하고 말지”가 되다가 나중엔 “이것도 해볼까?”로 바뀐다. 인건비가 비싸고 뭐든 오래 걸리는 독일살이 속에서 자의 반 타의 반 하게 되는 것이지만, 만들어보는 것이 많아질수록 소소하게 만족감도 늘어난다. 예전엔 알지 못했던 재미도 느끼게 되고, 만드는 동안 집중하면서 잡념도 잊는다. 발코니 벽을 칠하고, 나무 데크를 만들고, 칵테일도 만들어 먹고, 조명 전구까지 다 만든다. 


게다가 베를린은 무엇이든 만들어보라고 부추기는 곳이 많다. 대형 문구점이나 DIY를 위한 건축자재 매장에는 만들어보려는 거의 모든 유형의 재료들을 팔고 종류도 어마어마하게 많다. 세세한 부품들을 고르고 조립해서 만들어 쓰는 재미를 알게 된다. 팔뚝에 힘을 주고 열심히 전동 드릴을 박는 사이, 서투른 기술자로 거듭나고 있다. 그 변신이 코로나 19 록다운 기간엔 특히 더 요긴했다.  



작가의 이전글 독일에서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맞은 후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