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다이어리
버려진 폐공항을 그대로, 템펠호프 공원
“어라? 이곳이 공원이라고?”
별다른 정보 없이 템펠호프 공원에 도착한다면 이런 말을 먼저 하게 될 것이다. 베를린에서 가장 공원 같지 않은 공원, 어쩌면 가장 아름답지 않은 공원에 꼽힐 이곳은 그러나 베를린 시민들이 힘을 합쳐 지켜낸, 가장 베를린스러운 공원이기도 하다.
템펠호프는 2008년까지 군용 공항으로 쓰이다가 2010년 시민들의 공원으로 개방됐다. 공원이 되기 전, 베를린 시에서는 이 폐공항을 대규모 주택단지로 만들려는 계획이 있었다. 하지만 저렴한 주택을 공급하겠다는 정부 정책과 달리 실제 계획안에는 서민을 위한 적정 주택이 터무니없이 적었고, 책정된 임대료도 평균보다 훨씬 높았다. 일반 주택보다 고급주택과 비싼 임대주택으로 탈바꿈될 소지가 많아지자 시민들은 적극적인 투표와 토론으로 정부의 주택 개발 계획을 무산시켰다. 그리고 모두를 위한 공원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공원이 되었다고 해서 크게 고치거나 새로 만든 것도 없었다. 활주로도 기존 공항의 것 그대로이고, 관제탑 같은 건물도 그대로 남았다. 많은 부분이 원래 공항의 거친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낮은 지평선을 따라 펼쳐진 아스팔트 활주로에 서면 파란 하늘이 꽉 차게 눈에 들어온다. 360도로 탁 트인 사방에는 높은 건물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빌딩 숲으로 둘러싸인 서울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광경이라 낯설다. 그리고 광활하다. 시민들은 이 활주로에서 조깅도 하고, 자전거도 타고, 카이트 서핑도 한다. 아스팔트 밖의 풀은 아무렇게나 자라 들숲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 풀숲에 들어가 그냥 멍하니 앉아있거나 낮잠을 잔다. 명상도 한다.
이 못 생긴 공원이 특별한 건 뽐낼 만한 건축적 시도나 디자인 없이도 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공원으로서의 역할을 온전히 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개발하지 않고 남겨둔 곳, 템펠호프는 결국 세상 어디에도 없는 가장 특별한 공원이 되었다.
템펠호프를 처음 갔을 때 친구와 연속 점프샷을 찍었다. 주변에 걸리는 것이 없으니 나는 하늘을 날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친구가 아스팔트 바닥에 거의 드러눕다시피 하고 찍어준 덕분이기도 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한껏 날아오르고 있는 이 사진은 4년 뒤(2020년) 나온 내 책 <동미>의 표지가 되었다. 모비딕 출판사에서 내 이름을 제목으로 정하면서 고른 컷이었다. 대단한 작가도 아닌 내가 내 이름을 책 제목으로 넣는 걸 찬성했을 리 없다. 나는 펄쩍 뛰었다. 이 무슨 근거 없는 자신감인가, 사람들이 흉을 볼까 봐 겁이 났다.
<출간 전 책 제목을 놓고 나눈 출판사 선배와의 대화>
출판사 선배: 내가 요즘 며칠 제목 때문에 자꾸 고민하다가 ‘동미’라는 실명을 제목에 넣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거든. 사실 몇 달 전에도 ‘동미’를 제목에 넣을까 생각했어. 실명을 제목에 넣는다는 게 가볍지 않은 의미가 있지. 이건 동미의 이야기잖아. 나는 동미가 이번 책으로 작가로 성큼 성장했으면 해. 작가가 된다는 건 결국 자기 얘기를 하는 거거든. 두렵겠지만, 두려움 없이 세상에 자기를 내보이는 거.
나: 선배, 제 이야기에 제 이름을 넣는 건 아무래도 너무 자만스러워 보일 것 같아요..
출판사 선배: 자만이 아니라 커밍아웃. 그리고 이건 출판사가 붙인 이름.
나: 제가 아직 준비가 안됐어요. 커밍아웃할 준비가…
출판사 선배: 지금 아님 언제 하려고?
나: 지금만 아니면 됨… ㅠㅠ
출판사 선배: 우리가 동미로 세상에 포지셔닝해줄게. 동미야, 용기를 내. 이 책은 동미가 세상에 작가로 커밍아웃하는 책이 될 거야. 그럴 만한 가치가 있어. 동미는 대한민국에서 사는 여성들 가운데 여러 의미에서 대표성을 갖는 듯해. 그런 리얼 동미가 자신의 얘기, 그것도 15년 만의 로맨스로 책을 쓰는 거잖아. 나는 이 리얼 스토리가 엄청난 잠재력이 있다고 봐. 그리고 겨울 편에서는 더 깊숙이 들어간 글로 세상과 만나는 거지.
나: 선배, 선배의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정말 큰 힘이 돼요. 저도 ‘잘해 볼게요!’ 하고 씩씩하게 말하고 싶은데,,, 넘 두려운 마음이 있어요. 사람들이 별 거 없네 비난할까 봐. 너무 걱정이 돼요. 저도 선배한테 힘 드리는 말을 해드리고 싶은데,, 그건 진짜 제 속마음이 아니니까요.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아요.
출판사 선배: 동미가 몇 년간 너무 자존감 상실해서 산 거야. 이 책은 그런 동미를 떨쳐내는 책이고.
나: 솔직한 이야기 하나로 무기가 될까요?
출판사 선배: 가장 강력하지. 그리고 두 번째 책은 지금보다 100배 더 솔직해야 함.
출판사 대표이자 존경하는 선배는 내가 자신감을 잃고 주저앉으려 할 때마다 힘이 되는 말을 아낌없이 해주었다. 사람들이 왜 그 선배를 좋아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선배에게는 사람의 심장을 쿵 하게 만드는 어떤 것이 있었다.
<동미>로 당당하게 일어서라는 선배의 응원으로 작년 가을 책이 나왔고, 감사하게도 기대 이상의 좋은 반응을 많이 받았다.
<동미>는 베를린에 여행 책을 쓰러 왔다가 다 늦게, 갑자기, 한 남자를 만나 예정에도 없던 로맨스를 쓰게 된 에세이입니다. 원래 쓰려던 여행기를 접고, 부끄럽지만 소소한 사랑이야기를 썼습니다. 뒤늦게 만난 중년의 이야기가 뭐 대단한 게 있을까마는, 뻔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오랫동안 싱글로 살던 한 여자의 또 다른 삶의 여정으로, 한 남자가 아니라 한 사람과 깊이 교감하며 배운 사랑과 불안, 관계, 삶의 이야기로 쓰고자 했습니다.
책에 관한 정보는 요기로
http://www.yes24.com/Product/Goods/91894363?OzSrank=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