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고 컬트는 2차 대전 당시, 남태평양에 살던 원주민들이 수송기에서 여러 물품을 내리는 것을 보고 비슷한 상황을 연출한 데서 딴 명칭이다. 활주로를 비슷하게 만들고, 안테나 형상을 한 나뭇가지 등을 머리에 쓰고 불을 지펴 수송기가 다시 오길 비는 제사다. 당연히 그런다고 수송기가 오지 않는다(다른 이유로 갈 수는 있어도, 그 때문에 가지는 않을 것이다) 사자성어로 친다면 오비이락과 비슷하다. 까마귀가 날아서 배가 떨어진다고 인과관계를 착각한다. 그리고 배를 먹기 위해 까마귀를 움직일 여러 방식을 연구하는 것이다. 정리하면 헛짓거리고 유사과학이다. 핵심 자체를 잘못 잡았기 때문에 뭔 짓을 해도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없다.
노벨상 수상자인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본인의 에세이집 '파인만 씨 농담도 잘 하시네 1,2 권'을 통해 이 지점을 지적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수 십 편의 에세이 모음에서 대미를 장식하는 에피소드로 카고 컬트 편을 실었다. 핵심은 2가지다. 1. 비판적 사고를 견지하자 2. 직접 해보자. 남들이 A라고 말하는 것을 근거로 A를 상정하고 그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진짜 A 인지 본인이 직접 경험하고 실험하고 분석해야 한다. 모든 에세이의 기저엔 이런 주장이 숨어있다. 미국 수학, 과학 교과서를 지적한 부분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다.'의 접근법이 아닌 '이것은 이런 이런 이유에서 이렇다'의 접근법을 종용한다. 온전히 이해한 지식만이 자신의 것이고 그것이 배움의 본질이다. 시험의 좋은 결과를 위해, 아는 척을 하기 위해 답과 공식만 따른다면 결국 의미가 없는 행위다.
그의 주장에 적극 동의한다. 하지만 동의한다고 나의 행동 양식 또한 그렇다고 할 수 없다. 나는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이야기, 이론, 사상을 그대로 수용하는 경향이 있다. 다수가 그렇다고 해서, 학계가 인정해서, 그가 권위자여서, 직접 분석하기 귀찮아서.. 여러 이유가 쉬운 길로 나를 이끈다.
구체적 예를 통해야 읽는 여러분이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예를 들면, 친구들 사이에 A 양이 왕따를 당한다. 친구들은 A와 놀지 말라고 말한다. 걔는 성격이 별로고 이상한 행동을 한다는 이유다. 나는 친구들의 말만 듣고 A 양을 만나지 않는다. A 양은 내 평생의 반려자일 수 있고, 내 커리어에 도움이 되는 귀인일 수도 있고, 나를 깊게 이해해주는 친구일 수 있다. 친구들의 말을 듣고 직접 경험하지 않아 좋은 사람을 잃게 된다. 물론 A 양이 나와 잘 안 맞을 수도 있다. 내가 잃는 것을 비교하자. 나와 잘 안 맞는 사람인 상황에선 -몇 마디 나눌 때 드는 노동력을 잃는다. 잘 맞는 경우엔 그 사람과 함께 할 모든 시간을 잃는다. 리스크 차이가 너무 크다. 밑져야 본전(까지는 아니지만 본전에 수렴)이다.
일을 예로 든다. 나는 직원에게 어떤 지시를 한다. 직원은 내가 말한 것을 처리한다. 나는 피곤해서 빨리 집에 가고 싶다. 직원의 처리했다는 말을 믿고 확인하지 않고 일터를 떠난다. 왜? 확인하는 것은 귀찮으니까. 나중에 지시한 부분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아 더 큰 귀찮음과 금전적 손해를 마주한다. 직원과 함께 검수하고 잘못된 부분에 대해 왜 잘못됐는지 설명하고 시정했다면 나는 더 우수한 직원과 일하게 되며 추후에 생길 문제를 예방할 수 있다. 나는 검수를 하는 게 올바른 일인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직원의 말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한 셈이다. 아닌 걸 맞다고 여러 이유를 들어 부정해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합리화는 이런 지점에서 카고 컬트와 같다.
미디어의 수용도 카고 컬트에 속한다. 미디어가 만든 사물의 속성을 그대로 수용한다. 사물은 내게 여러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 그러나 미디어의 필터에 맞춰 특정 상황에 특정 행동 양식을 보이게 된다. 다들 그렇게 한다는 관성에 따르는 것이다. 비판적 사고는 귀찮다. 다들 맞는다고 하는 상황에서 굳이 귀찮게 검증을 해야 하나? 편하게 쉬라며 종용한다. 정치판도 마찬가지다. 정치색을 규정한 이후로 정당 지지자들의 말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반대 당의 모든 행위를 부정한다. 왜? 누가 떠먹여 주는 걸 받아먹는 것은 너무나 쉽고, 통쾌하고, 나의 생각이 맞았다는 확인을 받는 것과 같아 만족스럽기 때문이다.
마지막 예는 게임이다. 모바일 게임이나 온라인 게임에 특정 직업을 선택한다고 가정하자. 누가 만들어놓은 스킬 테크트리를 타고, 능력치를 올린다. 나중에 다시 키워야 하는 귀찮음을 면할 수 있다. 다만 내 방식을 따르고 시행착오를 거치면 게임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온라인 게임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이들 중 후자를 발견하게 된다(외쳐 EE). 후자가 새로운 메타를 만들고, 새로운 공략법을 만든다. 누군가의 워너비, 팔로워는 1등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이미 만들어진 덱 구성을 따르고 스킬테크를 따라 한다. 게임은 가끔씩 기분 전환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투자할 노동력이 한정됐다. 비판적 사고는 귀찮고 어렵다. 즐거운 활동에 어울리지 않다)
글에서 나는 카고 컬트를 큰 범주로 설정했다. 무비판적 수용, 수동적 인간상을 말한다. 물론 사회를 살아감에 있어서 완벽한 비판적 수용을 불가능하다. 긍정적 어휘를 사용한다면 '신뢰'는 다소 귀찮음을 면하게 해준다. 여기서 실전에서 사용하기 위해서는 신뢰와 맹신의 경계를 확실히 나눠야 한다. 그 경계를 까다롭게 설정해서 불합리 판단을 받은 항목을 재검토하는 열정 정도는 보여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