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할 때 사소하게 거슬린다. 휴대용 맥북 얘기다. 초경량, 초슬림을 지향한 12인치 맥북(속칭 뉴맥북)이다. 2015년 즈음 판매된 제품이다. 성능 업그레이드를 한 번 하고 단종됐다. 배터리도 오래가고, 휴대도 편하다. 다만 성능이 아쉽다. 유튜브에서 4K 영상은 물론 HD 영상의 60 프레임도 시청할 수 없다. 내장 그래픽 카드가 품을 수 없는 고화질이다. 그럼에도 일반 유튜브 영상 시청, 웹서핑, 글쓰기 등의 기본 활동엔 제약이 없다. 심지어 파워포인트나 엑셀 작업도 가능하다. 장거리 여행을 떠날 때 뉴맥북 만한 게 없다.
뉴맥북은 시드니 방문의 동반자다. 미니멀 여행을 지향했다. 17일 일정의 여행이다. 포터 탱커 백팩에 모든 짐을 넣고도 공간이 1/3이나 남는다. 옷은 입은 옷 한 벌과 여분 한 벌이 전부다. 속옷도 3일 치 여분을 챙겼다. 뉴맥북은 미니멀 여행에 큰 도움이 됐다. 컴퓨터 작업이 필요한 나로선 랩탑을 필히 챙겨야 한다. 랩탑이 3개 있는데, 윈도우 프로그램 구동 및 터프한 작업용 게이밍 랩탑, 휴대가 가능하지만 비교적 무겁고 큰 M1 맥북, 휴대성에 올-인한 뉴맥북이 그 3개다. 미니멀 여행이라면 뉴맥북이 최선이다.
뉴맥북의 휴대성은 상당한 만족을 준다. 아이패드보다 가벼운데, 랩탑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한다. 배터리도 오래가서 1회 충전하면 하루 종일 사용할 수 있다. 만듦새도 좋아서 쉽게 고장 나지 않고, 웹서핑 등의 기본 사무 작업에선 렉도 없다. 이렇게 훌륭한 기능을 탑재했음에도 이 사이즈에 이 무게라고? 새삼 놀란다. 900g의 기쁨이다.
이런 만족을 주는데, 사소한 문제쯤이야 눙칠 수 있다. 뉴맥북에게 많은 기능을 요구하는 것은 김태희에게 전도연의 연기력을 요구하는 것과 같다. 김태희가 시대의 미녀, 서울대 출신, 부자인 것과 같이, 뉴맥북도 긴 배터리 수명과 준수한 성능을 보여준다. 다만 전도연의 연기력을 지닐 순 없다. 김태희에게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바라는 이는 없다. 이미 그대로 충분하다. 이처럼 뉴맥북이 약간 아쉬운 모습을 보여도 '그럴 수 있지'란 말이 나온다. 지금으로 충분하다.
그럴 수 있는 사소한 거슬림 중 하나가 맞지 않는 해상도다. 단종된 지 10년이다. 애플이 더 이상 지원하지 않는다. 상위 기종으로 업그레이드하는 사람이 많아 뉴맥북 사용자는 날로 줄어든다. 그 결과 여러 브라우저에서 뉴맥북의 해상도를 지원하지 않게 됐다. 컴퓨터를 켜면 꼭 하는 작업은 네이버 접속이다. 네이버 메인 화면을 통해 메일을 확인하고, 블로그 새로운 글을 보고 글쓰기 창을 켠다. 뉴맥북과 규격이 맞지 않아 우측에 있는 메뉴를 클릭하기 위해 화면을 우측으로 살짝 이동해야 한다. 13인치용으로 만든 웹페이지여서 나머지 1인치 공간을 포함하지 않는다. 숨겨진 1인치를 찾기 위해 터치 패드에 손가락 두 개를 올린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란 말이 있다. 어떤 일에 감사할 때 사소한 불편이 도움이 된다. 약간의 불편이 그 존재를 돌아보게 만든다. "아, 이런 사소한 불편이 있네. 하긴 당연한 일이지. 이 정도 해주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 아닌가? 이런저런 작업을 해주잖아. 와, 정말 감사한 물건이네?" 1보 후퇴는 당연한 것이지. 감사하는 마음이 2보 전진하잖아. 사소한 불편은 럭키비키잖아?
거슬림은 이걸 보라는 손짓이다. 행동경제학이 말하는 것과 같다. 행동경제학의 큰 개념 중 하나는 두 가지 뇌 시스템이다. 자동화 뇌와 연산하는 뇌다. '생각에 관한 생각'의 저자이자 세계적 행동경제학자인 데니얼 카너먼은 이를 시스템 1, 시스템 2로 표현한다. 시스템 1은 자동적이고 빠르게 작동하는 '자동화 뇌'다. 우리가 매일 걷는 길을 생각 없이 걸을 수 있는 이유다. 반면 시스템 2는 '연산하는 뇌'로, 깊게 생각하고 분석할 때 작동한다. 이 두 시스템은 최소한의 에너지로 최대한의 효율을 추구하도록 뇌를 최적화한다.
그러나 우리가 익숙해진 일상에서 벗어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서는 시스템 2를 활성화할 자극이 필요하다. 도보를 공사해서 우회하게 하거나, 매번 보던 가게에 '그동안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현수막을 걸고 폐점을 통보하는 것처럼. 이런 변화는 우리가 평소 무심코 지나치던 것들이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돌아보게 만든다. 행동경제학의 관점에서 보면, 12인치 뉴맥북의 가려진 1인치가 그 손짓이다. 익숙했던 화면을 다르게 보게 만드는 작은 변화다.
뉴맥북의 사소한 불편함은 단순한 기능적 한계를 넘어선다. 작은 거슬림이 당연하게 느껴지던 것들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행동경제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불편은 일상의 자동화를 깨고 새로운 시선을 유도하는 장치다. 모든 물건은 쓸모가 있다. 네이버 메인 화면의 가려진 1인치는 익숙함에 가려진 물건의 쓸모에게 바치는 축사다. 완벽할 필요는 없다. 부족함이 다른 장점을 빛나게 한다. 매끄럽지 않은 부분에서 의미를 찾는다. 어쩌면 모든 아름다움의 출처는 모자람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