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말로 시리즈를 세 편 읽었다. 읽은 순서는 기나긴 이별, 빅 슬립, 안녕 내 사랑이다. 연대순으로는 빅 슬립, 안녕 내 사랑, 그리고 기나긴 이별이다. 여운은 연대 역순으로 오래 남는다. 30대의 날선 말로와 50대의 지친 말로 사이를 오가며 챈들러가 창조한 인물에게 서서히 빠져들었다.
챈들러의 필립 말로는 하드보일드 문체의 정수다. 문장이 짧다. 단어는 힘 있고, 군더더기가 없다. 문장 그 자체는 초등학생도 쉽게 읽을 정도다. 다만 의미는 그보다 깊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 "Dead men are heavier than broken hearts." 문장은 상심한 여인이 쏜 총을 맞고 무고하게 죽은 사나이를 가리킨다. 필립 말로는 짧고 단순한 문장을 통해 우물 깊숙이서 썩어가는 남성의 시체를 위로한다. 챈들러는 말로의 직설적인 성격을 한 치의 낭비 없이 담아낸다. "I'm not Sherlock Holmes. I don't have that big a brain. I just try to keep my eyes open and my mouth shut." 홈즈에 비교해 몸으로 부딪치는 말로의 성격을 완숙계란처럼 드라이하게 표현한다. 말로가 상처투성이로 돌아와도, 독자는 그가 진심으로 사람을 위한다는 것을 안다.
말로의 싸움의 방식은 달콤하지 않다. 언제나 피가 튄다. 하지만 죽음이 문 앞까지 왔을 때도 그는 농담한다. 던지는 농담 속에서 삶에 대한 여유를 느낄 수 있다. 그의 유머는 여유의 상징이다. 죽음의 고비에서 농담을 건넨다는 것은 죽음을 향한 수긍이다. 언제고 죽음은 그의 곁을 맴돈다. 그는 다가올 죽음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단 자세를 견지한다. 필립 말로는 아무리 맞고 쓰러져도, 그 자리를 미소로 버틴다. 독자들은 그 고된 하루 속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그를 멋지다고 느낀다.
그러나 필립 말로는 시대착오적인 인물이다. 고지식한 마초이자 남자다움의 전형이다. 남자라면 친구를 위해 싸워야 하고, 믿음을 위해 주먹을 휘두를 줄 알아야 한다는 식이다. 빅 슬립에서 스턴우드 장군과 리건의 우정을 지키기 위해 그는 타협하지 않는다. 안녕 내 사랑에서 무스 맬로이의 순정을 위해 총을 피하고, 기나긴 이별에서는 테리 레녹스의 명예를 위해 무너진다. 시대는 그와 함께 늙어가지만, 그는 굴복하지 않는다. 사랑을 원하면서도 여자를 쉽게 믿지 못하는 그 성격은 과거와 현재를 초월한, 묵직한 고독의 매력으로 남는다.
그는 세속적인 것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세상에 휘둘리지 않는다. 불완전한 인간이면서도 그의 신념은 굳건하다. 재력, 권력, 미모가 눈앞에 있어도 결국 자신의 원칙에 머문다. 챈들러는 필립 말로의 인간적인 결점을 오히려 그의 매력으로 만들어낸다. 마치 부족한 사람이 완벽을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듯, 그의 불완전함은 우리를 끌어당긴다. 말로는 완벽하지 않기에 독자들에게 한층 더 깊게 다가온다. 챈들러는 이 점에서 필립 말로를 무척 인간적이고, 동시에 경외감이 드는 인물로 만들었다.
시리즈마다 필립 말로의 핵심은 통한다. 시리즈마다 필립 말로는 남성의 수호자로 등장한다. 빅 슬립에선 남성의 우정을, 안녕 내 사랑에선 남성의 순정을, 기나긴 이별에선 남성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위험 속으로 뛰어든다. 각기 다른 색을 띠지만, 그 속에는 변함없는 주제 의식이 있다. 삶과 죽음, 믿음과 배신, 고독과 우정이 챈들러의 문체에 스며든다. 필립 말로는 결국 독자에게 인생이란 원칙을 지키며 살아가는, 씁쓸하지만 가치 있는 싸움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레이먼드 챈들러는 말로라는 인물을 통해 세속을 이기는 삶의 방식을 보여준다. 필립 말로는 현대의 잃어버린 덕목들을 상기시키는 인물이다. 챈들러는 말로가 걸어온 길을 통해 우리에게 묵직한 위로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