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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20대 아르바이트와 30대 아르바이트의 차이

퇴사 후 명품 포장 아르바이트

by 선인장




대표2의 오른팔 위 수놓아진 용을 보며 생각했다. 대표2는 지금 이 의류사업을 시작하기 전, 동대문에서 오래 일했다고 했었지. 아마 높은 확률로 대표2는 밀레오레나 두타에서 중학생 시절 나에게 강매하던 언니오빠들 중 하나였을 것 같다.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조무래기들을 겁주며 현금인출을 강요하던 무서운 사장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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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갓 성인이 되자마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물론 갖고 싶은 것, 기왕이면 내 돈으로 사고 싶은 것이 넘치게 많았기 때문도 있다. 하지만 그보단 공부 하나만 허락되던 생활에서 벗어나 소정의 경제활동이라도 하는 어른 흉내를 내보고 싶었다. 꽤 수입이 어른스런 중고등학생 과외부터, 귀여운 아기자기한 시급의 음식점 홀서빙, 행사장 스태프, 전시장 스태프, 학원 인포데스크, 사진 촬영, 전단지 배부까지. 아르바이트면 가리지 않았다.


당시 나는 열두 시간 넘게 높은 구두를 신고 서 있어도 크게 힘들지 않았고, 오히려 즐거웠다. 활기와 패기가 넘쳤다. 그리고 그 열정은 나를 뽑아준 사장님들을 대하는 태도에도 묻어났다. 내가 아르바이트를 했던 곳의 대표, 혹은 사장님들은 더 이상 지나가는 ‘동네아저씨 1’이 아니었다. 나와 20년 이상 차이 나는 사회생활 대선배였기에 편히 대할 수 없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30대가 되고 나서 하는 아르바이트는 전혀 달랐다. 냉혹한 현실로 인해 닳고 닳은 나는 더 이상 햇병아리 사회초년생이 아니었다. 내게 ‘아르바이트’란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최소한의 생계를 위한 최소한의 노동이 되었다. 물론 적성에 딱 맞는 포장 알바를 구한 덕에 그나마 자의적인 활동으로 느껴지긴 하지만,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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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밀리오레 오빠들을 연상케 하는 대표1과 대표2는 내가 20대 때 떠올릴 법한 ‘건실하고 위엄 있는 사장님’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르바이트생에게 이런 건방진 생각이 깔려 있으니, 나와 대표들의 관계는 완전한 수직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범접할 수 없던 대표들의 동대문 시절에는 그 험악한 인상에 잔뜩 쫄았을지언정, 이제는 대표건 아니건 우리 모두 다 같이 닳고 닳은 일꾼이 아닌가. 나이 차이가 몇이나 난다고.


30대 아르바이트생의 열정과 패기는 옅어지다 못해 가뭇해져 버렸다. 하지만 대표2의 용문신 또한 세월에 바래고 옅어져, 진작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수다쟁이가 된 대표2에 비해 여전히 말수가 없는 대표1과도 어느 정도 가까워졌다. 박스테이프를 칼로 뜯다 손가락에 조그만 상처를 입었던 날, 대표1은 맺힌 피를 슬쩍 보더니 무뚝뚝한 말투로 말했다.


- 이쯤 하고 가요.


하루 두 시간 업무 시간 중 겨우 반을 채운 시점이었다. 나는 ‘그럴 수는 없다’며, '그 대신 산재되냐’고 물었고, 대표1은 헛웃음을 치고는 고개를 저었다. 대표1과는 딱 그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 실없는 농담을 이제야 진담이 아닌 농담으로 알아듣고, 작게나마 웃기도. 아르바이트 초기를 생각하면 꽤나 큰 발전이었다. 여전히 대표1이 사무실에 있을 땐 플레이리스트 신청은 엄두도 못 내지만.


반면, 꽤 친해진 대표2에겐 적정선을 그을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계속되는 업무 후 카톡, 식사 제안은 가볍게 넘겼지만 내가 카톡 답장을 잘 안 한다며 온몸으로 삐진 티를 낼 때는 곤란했다. 나는 "대표님 원래 업무시간 끝나면 상사가 알바한테 연락하는 거 아니죠"라고, 자연스럽게 웃으며 우리의 사이를 한 번 더 명확히 했지만, 알아듣지 못했는지 퇴근 후 대표2의 카톡은 계속됐다.


명절 선물이라며 보내온 비타민 기프티콘은 그리 과하지 않았다. 다른 아르바이트를 할 때에도 소박한 명절 선물은 곧잘 받곤 했으니까. 그냥, 그게 과한 거다. “별 뜻은 아니고 그냥 아르바이트생에게 이런 거 준 게 처음이라 대표1에게는 비밀로 하라”는 말.


사무실을 나서자마자 [두고 간 게 있다]며 알려준 카톡은 그리 과하지 않았다. 발걸음을 돌리려던 찰나 그가 덧붙인 [저 두고 가셨던데]. 그게 과한 거다.


나는 생각했다. 더 이상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에서 일할 필요는 없다. 20대 시절에 그랬듯 딱딱한 수직관계를 구축하자. 그렇지 못한다면... 이 꿀알바의 끝도 머지않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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