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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뚜벅이일수록 얇은 패딩을 입어야 하는 이유

퇴사 후 명품 포장 아르바이트

by 선인장


한여름에도 패딩 주문이 꽤 들어왔다. 누구나 알 법한 몽클레*, 캐나다구*부터 나에겐 아직 생소했던 에*노까지, 명품 소비는 계절을 크게 가리지 않는 듯했다.


패딩 한 벌은 다른 의류 두 세벌을 포장하는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당연한 말이지만 패딩은 다른 의류대비 고가이기에 검수가 배로 오래 걸리고 까다롭다. 포장 역시 아무리 눌러서 압축한다 한들 부피가 커 서너 장의 포장지를 이어 붙여야 하고, 택배 박스 또한 대형 사이즈 두 개를 합쳐야 하는 등 번거로운 부분이 많다. 하여 주문서에 패딩이 많이 올라온 날은 괜스레 짜증 나고 신경이 거슬리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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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두툼하고 묵직한 패딩과 부드럽고 가벼운 패딩을 번갈아 포장하며 그 쓰임새를 생각해 봤다. 혹한기, 혹은 아웃도어 활동용의 큼지막한 패딩과 간절기 레이어드용 경량패딩은 타겟의 라이프스타일이 상이할 것이다. 나 역시 퇴사 후 생활반경과 주요 이동수단이 변하자 필요한 겨울 옷 종류가 확연히 달라졌다.




회사를 다닐 땐 주로 직접 운전을 하거나 택시를 자주 이용했다. 그러다 보니 추위를 많이 타는데도 추위를 느낄 틈이 크게 없었다. 어딜 가든 대부분 지하주차장이 잘 연결되어 있는 터라 살을 에는 칼바람과 대놓고 맞설 겨를 역시 없었다. 그러니 아무리 추운 날도 '따뜻함보단 멋', 하며 코트를 입곤 했다. 하지만 퇴사 후 본격적인 뚜벅이가 된 나는 단연코 '멋보다는 따뜻함'이었다. 그 해 겨울, 나는 가지고 있던 모든 코트를 당근마켓에 처분했다. 그리고 그렇게 마련된 돈으로 다운 500g 이상, 구스 80%, 짱짱한 충전재의 패딩을 구입했다.


회사에서 머리 쓰는 일에 진절머리가 난 내가 단순노동 알바를 선호하게 된 것처럼, 나는 옷을 입을 때조차 요만큼의 고민도 하고 싶지 않았다. 시간을 들여 신경 써서 차려입고 싶지 않았고, 이런 맥락에서 팀쿡의 검은 목폴라 패션에 백 프로 공감했다. 내가 머리 쓰고 싶은 일은 따로 있었으니까. 나는 패션에 조금의 신경도 할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어디든 걸칠 수 있는 무난하고 따뜻한 검정 패딩은 내게 꼭 들어맞는 아이템이었다.


패딩의 거대한 부피감은 어쩔 수 없지만 울코트에 비할 바 없이 가벼웠다. 이너를 몇 겹씩 껴입지 않아도 니트에 패딩 하나만 툭, 걸치면 넘치게 따뜻했다. 나는 그 패딩 덕분에 자차나 택시 없이도 한겨울 외출이 두렵지 않은, 활동적이고 당당한 뚜벅이로 거듭났다.


그런데 웬걸.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코트에 이어 그 든든한 패딩까지 중고마켓에 내놓게 된다. 나는 대체 어떤 옷을 입고 겨울을 나야만 하는 걸까?




그러니까 뚜벅이는 걷는 게 다가 아니라는 사실이 문제였다. 뚜벅이는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니까.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두툼한 이불 같은 내 패딩의 존재감은 생각보다 더 컸다. 그나마 서 있을 때엔 큰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풍성한 공기층으로 비대해진 내 몸뚱아리는 좌석에 앉기엔 너무 민폐인 부피가 되어 있었다. 거의 2인분에 가까운 자리를 차지하게 된 나는 양옆 승객 눈치를 보느라 마음이 편히 앉아있을 수 없었다. 양손으로 내 몸을 끌어안듯 패딩을 눌러도, 어깨를 꾸기듯 모아봐도 탄성감 있게 차오르는 공기주머니를 어찌하나.


대중교통을 필히 이용해야 하는 뚜벅이는 결국 패딩을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를 대신해 보온성은 다소 떨어지지만 적당히 가볍고 적당히 두툼한 비건레더 무스탕을 구매했다.


이렇듯 프리터족으로서의 생활은 마냥 간편하지도, 그리 단순하지도 않았다. 자유로운 만큼 내 나이대 친구들이 누리는 다양한 삶의 방식을 포기해야 했다. 그들이 겪지 않는 다른 결의 고민과 어려움이 끝도 없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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