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명품 포장 아르바이트
"근데 나쁜 사람은 아니더라고. 그래도 알고 보니 착해."
주말 낮. 나는 오랜만에 만난 직장 동료에게 한참 동안 알바썰을 늘어놓고 있었다. 특히 회사 대표들에 대해선 수차례 '막장', '엉망진창' 등 헐뜯는 표현을 변주해 가며 울분을 토했다. 그리고는 구구절절 서문으로 밑밥을 깔았던 나의 옷 포장 실력을 증명이라도 하듯, 대표를 애써 포장하며 이야기를 마무리지으려 했는데... 이율배반적인 내 태도에 피식 웃던 동료가 말했다.
"야... 그냥 나쁘기만 하거나 착하기만 한 사람이 어딨어. 완전히 100프로 나쁘기만 한 사람은 세상에 없어. 사람들 전부 최소 그 정도씩은 착해."
아 나는 대표가 100프로 나쁘기만 한 줄 알았거든...
동료 말이 옳다는걸 잘 안다. 하지만 첫인상이 이토록 구리면 조그만 호의에도 감동을 받는 건 어쩔 수 없는 습성이지 않은가.
한때 "우리 원래 택배 하는 사람들과 말 안 해요"라고 말했던 대표2는 어디 갔을까. 급격히 달라진 대표2의 친절한 모습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뭘 굳이 저렇게까지 하나 싶을 정도로 나를 신경 쓰는 게 느껴졌다. 하여 '마냥 나쁜 사람은 아니구나' 생각하게 됐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씁쓸해졌다.
결국 될 대로 지르는 게 답인 걸까?
왜 좋게 말하면 알아듣질 못 하지. 왜 웃으며 의견을 피력하면 무시하다가, 각 잡고 진지하게 재차 말해도 대충 넘기고, 굳이 인상 쓴 채 험한 말을 할 때 그제야 알아듣는 거지. 왜 갑자기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는 거고.
그런 소위 '강약약강' 태도의 사람들이 왜 이리 판을 치고 있나. 내가 뒤늦게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었네'라고 대표들을 여기기엔, 그저 나만큼 공격적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갑질당했던 수많은 전-아르바이트생들이 억울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새 정이라도 들어버린 걸까. 상냥함에 한없이 약한 나는 자꾸만 그들을 이해하고 싶어지는게 또 문제였다. 이전부터 사과만은 잘했던 모습을 굳이 다시 떠올리며, 대표들의 배려심은 없었던 게 아니고 가려져 있었을 뿐이었다고, 어쩌면 모두 오해였다고 대신 나서서 합리화하고 있었다. 심지어 하루는 주문 목록에 대표 중 한 명이 적은 듯 한 '누나 선물'을 보고 나도 모르게 흐뭇하게 웃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퇴근 전, 혼자 야근하고 있던 대표1은 내게 물었다.
"저희 회사 분위기가 많이 안 좋죠?"
지들도 알긴 아는구나. 대뜸 받은 질문에 당황했지만 나는 굳이 부정하지 않고 대신 질문했다.
"혹시 무슨 일 있나요?.."
딱히 제대로 된 답변을 기대하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는데, 대표1은 기다렸다는 듯 내게 고충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명품업계가 어려워진 지 꽤 됐거든요. 여기 의자랑 책상 보시다시피, 저희도 원래 직원이 세 명 더 있었는데 업계 상황이 안 좋아지면서 전부 그만두게 됐어요. 1년 전만 해도 저희도 원래 웃고 농담하고 그랬어요."
"(상상 안 가는데..) 아... 넵넵."
"뭐 여자 직원은 없었긴 한데. 제가 1년 사이에 15킬로가 빠졌어요."
"(어쩐지 그래서 다리가 내 팔보다 가늘었구나..) 아... 진짜 힘드셨나 봐요."
"네. 그래도 이렇게 물어봐 줘서 고마워요. 진짜 근데 저희가 지금 얘기 엄청 많이 나누는 편이에요. "
"(? 고마워해야 돼?..) 아 그렇군요."
"네. 사실 전임자분은 저희랑 나이도 비슷해 보이고 했는데 말을 거의 두 마디? 그 정도밖에 안 했어요."
"(그런 거 같더라) 네 들었어요 동갑이시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요? 그것도 전 몰랐어요. 하여튼 저도 사정을 얘기 한번 하고 싶었어요. 저희가 분위기가 늘 이렇다 보니 아르바이트생분들이 많이 힘들어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알긴 아는구나... 근데 갑자기 말 많이 거는 것도 싫은데) 아 근데 조용히 포장만 하고 싶은 사람들도 많을 거예요!"
"그럼 다행이고요."
"(제발 많이 말걸지마..) 진짜요. 저도 그래서 나름 힐링하고 있거든요."
"하여튼 맨날 일이 터져요. 저희도 웃으며 일하고 싶은데. 그런 공기 분위기 줘서 미안하고, 어서 퇴근해 보세요."
그리고 나는 허겁지겁 퇴근.
길어질 줄 모르고 어정쩡하게 서서 마음에도 없는 질문을 했는데 뜻하지 않게 굉장히 많은 사연을 들은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조금 당황했지만, 듣다 보니 그의 구구절절한 난항이 진솔하게 느껴졌다. 얼마나 힘들면 몸무게가 저리 빠지지. 대표1이 안쓰럽기도 했다. 물론 그가 포르셰 오너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