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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수다쟁이가 된 대표님, 말수가 줄어든 알바생

퇴사 후 명품 포장 아르바이트

by 선인장

수다쟁이가 된 대표님, 말수가 줄어든 알바생


시계를 보니 오후 8시 언저리. 작은 사무실 안에는 대표2와 나 둘 뿐이었다. 보다 원활한 대화 스킬과 사회성을 지닌 대표1은 일찍부터 거래처 미팅을 위해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그날따라 주문량이 유독 많았기에 대표2는 결국 박스테이프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내 옆에 서성거리며 포장일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대표1이 틀어놓던 음악까지 들리지 않으니, 사부작 포장하는 소리와 투두둑 테이프 붙이는 소리만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대표2와 함께 있는 시끄러운 정적이 유독 길게 느껴졌다. 결국 나는 로고가 떡칠되어 있는 남성 구찌 가디건을 포장하며 말문을 트기로 했다. 우선 한숨을 쉬며 자연스러움을 가장했다.


- 어휴, 남자들은 왜 모를까요... 이런 로고플레이 가디건 여자들이 싫어하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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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개취다. 대수롭지 않은 아이스브레이킹이었다. 하지만 뭐, 솔직한 심정이기도 했다. 그런데 대표2는 답이 없다. 내가 들고 있는 가디건을 슬쩍 보고 있다가, 머뭇거리며 대답하는데 하필...


- 저 그거 흰색으로 있는데.


아씨.... 망했네...


- 아, 아니에요... 그냥 어색해서 아무 말이나 던진 거였습니다...


대표2는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 그래서 제가 어렸을 때부터 인기가 없었나 봐요...


...제가 죄송합니다. 닥치고 포장만 열나게 할것을. 어색하게 웃으며 무마하려는데 대표2가 구구절절 말을 덧붙였다.


- 근데 저 그 가디건 두 번밖에 안 입었어요..


이쯤이면 다시한 번 손사래를 칠 타이밍이다.


- 아, 네네! 그런 거 설명 안 해주셔도 돼요... 그냥 한 말이었어요...


- 네...


나는 대표2의 눈치를 살피곤 급히 화제를 돌렸다.


-.... 아... 그나저나 대표님 오늘 입고 계신 니트 색이 예쁘네요...!


대표2가 입고 있던 회색 니트는 썩 취향에 맞아서라기 보단 민망함을 경감하는 용도였을 뿐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답이 돌아왔다. 머쓱한 미소와 함께.


- 이거 비싸요.


?... 가격까진 안 물어봤는데... 그래도 짐짓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아 보였으니 되었다. 나는 금세 마음이 놓였다. 기분이다, 하는 마음에 평소같으면 궁금하지 않았을 질문을 이어서 던졌다.


- 아 그래요? 얼만데요?


- 비싸요.


-...? 얼마나 비싸길래요?


- ? 좀 많이 비싼데요.


잠시의 정적. 대표2는 매출이고 임대료고 뽐내듯 술술 읊던 모습과는 다르게 말을 아끼는 모습이었다. 문득 '알바생인 내가 꿈도 못 꿀 가격이라 말을 아끼나' 싶은 억하심정이 들던 찰나, 대표2가 입을 열었다.


- 얼마라고 해야 하지... 사실 이게 난제예요. 주변에서, 특히 친구들이 제가 입고 있는 옷들 가격을 물어보면 구매가로 말해야 할지, 판매가로 말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대표2는 본격적으로 자세를 고쳐앉더니 고충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나는 또 다른 휘황찬란한 로고플레이-큼지막한 루이비통 로고- 옷을 포장하며 경청하는 시늉을 했다.


- 이게 진짜요. 가끔 곤란하기도 하고, 사실 되게 귀찮아요. 맨날 깎아달라고 하고...


- 아 네...


- 저희 하루 주문 목록 보면, 대충 계산해 보셨을 거 아녜요. 매출액이 워낙 크잖아요?


- (? 당장 하나하나 포장하기 바빠서 그런거 계산해 본 적 없는데...)


- 근데 실제로 가져가는 건 얼마 없거든요?


- (이미 포르셰오너인 거 아는데...) 예에...


- 요즘 명품시장이 워낙 어렵기도 하고 업체들이 너무 많아져서 가격 경쟁이 치열해요. 서로 가격 내리다 보면 진짜 끝도 없이 내려가요. 그걸 모르고 밖에서 보는 친구 입장에선 제가 턱턱 이런 비싼 옷 사입고 다니는 줄 아는데, 금액 비교하면서 일일이 설명해줄 수 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게 한참 동안 대표2는 속풀이를 이어갔다. 그의 박스테이프 포장에도 속도가 붙었다. 가볍고 날랜 동작으로 척척척, 중간중간 구성진 콧노래도 잊지 않으면서.





사실 대표2와의 사담은 지인에게 알려주기 곤란한 명품 가격의 애로사항에 그치진 않았다. 서로 다른 일을 도맡은 대표들 사이에서의 긴장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쌓인 세월에서 오는 애틋함, 구조조정으로 떠나보낸 직원들에 대한 부채감, 그리고 아픈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이자 장남으로서의 책임감까지.


대표2에 대한 나의 시각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나이 차이도 꽤 나고, 객관적 지표에서의 성취는 곱절로 차이 나는 그에게 나는 '젊은 꼰대' 라는 평면적인 캐릭터성을 부여했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의 근자감에는 근거가 있었지만, 일개 알바에게 그가 세월에 따라 자연스레 체득한 거만함은 거북할 뿐이었다. 하물며 명품업을 하는, 용문신이 있는, 투박한 말투의 40대 남자라니, 달리 설명을 덧붙일 필요 없는 '불량한 허세남'의 클리셰가 아닌가.


하지만 그의 어리광 섞인 토로는 꼰대의 자세와 거리가 멀었고, 내밀하게 듣게 된 고충에는 조금의 허세도 없었다. 몇 겹을 덧씌운 색안경의 농도가 점차 옅어졌다. 조금더 또렷이 그가 보이기 시작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박스가 벽면 가득 세워졌다. 혼자일 때와는 다르게, 함께 포장할 때는 대표2가 힘쓰는 일을 도맡아 해 준다. 알바 첫날, 상당한 부피의 짐을 고개로 슥 가리키곤, "오시면 매일 저런 것도 다 치우셔야 됩니다." 냉정히 말했던 대표2는 어디 가고. 땀까지 뻘뻘 흘려가며 마무리 작업을 돕는다.


그러면 나는 옆에서 괜히 더 바삐 움직인다. 고맙고 민망한 마음에 뭐라도 더 힘쓸 일을 찾아낸다. 알바 첫날, '공고에 분명 힘쓰는 일 아니랬는데...' 불만을 가졌던 나는 또 어디 가고. 팔근육이 당겨오면 오히려 운동돼서 좋지 뭐, 하고 만다.



고생하셨어요, 대표님도요, 대충 땀을 닦으며 마무리 인사를 하고 있는데 마침 대표1이 사무실에 들어왔다. 목이 말라죽겠는 타이밍에 맞춰, 얼음이 꽉 채워진 새파란색 음료수 세 잔을 들고.


뜻밖에 호의에 나도 모르게 열광적으로 반응했다. 하지만 아직 이럴 사이까진 아니었는지, 대표1에게선 어색한 고개 인사만 돌아왔다. 영롱한 색깔을 보며 음료수의 정체를 묻자 대표1은 '사이다랑 박카스를 섞은...'이라며 말 끝을 흐렸다. 나는 다시 각 잡고 예의를 갖춰 감사인사를 하곤, 사무실을 나섰다.


투박하지만 서슴없이 속얘기를 하는 대표2. 섬세하지만 여전히 내외하는 대표1. 그렇게 각자 다른 형태의 관계로, 나는 그들과 매일 두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런저런 사담을 몇 차례 나눈 후, 대표들과 부쩍 가까워졌다. 카톡에선 격식차린 어투대신 자연스럽게 말끝마다 'ㅋㅋ'를 붙였다. 딱딱한 단답형 문장이 아닌 둥글고 가벼운 대화가 오갔다.


사무실에서 단둘이 보낸 시간이 유독 많았던 대표2는 점점 더 말이 많아졌다. 초면에 본체만체 않고 쌀쌀맞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치매 예방을 위한 그의 수다는 어느새 본격적인 모터를 달았다. 처음엔 의심했던, 대표2의 엠비티아이가 ENFP라는 사실이 수긍 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한물간 엠비티아이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하자면, 만만치 않게 무뚝뚝하고 소심했던 대표1의 엠비티아이는 또 ENTJ라고. 나는 이렇게나 조용하고 낯을 가리던 두 대표 모두가 외향성을 뜻하는 'E' 유형이라는 게 새삼 신기하면서도, 언제나 사람의 첫인상과 첫 느낌을 맹신했던 스스로를 돌아보기도 했다. 반면 대표1도 내 엠비티아이에 의문을 가졌다. 처음 본 사람에게 거리낌 없이 말을 붙이고 헤실헤실 가짜웃음을 짓는 내가 'I'유형이란 게 말이 안 된다며, 대표1은 내게 재검사를 필히 받길 권했다.


포장 일은 여전히 힘에 부치는 부분이 있었지만, 대표들과의 사이가 한결 편해지자 이런저런 재미를 찾을 수 있었다. 아직까진 조금 서먹한 대표1이 자리에 없을 때 내게 플레이리스트 선곡 권한이 주어졌는데(아무래도 구슬픈 발라드는 대표1의 취향이었나 보다), 그런 날에는 포장하며 치유받는 느낌마저 들었다. 나의 요청에 대표2는 늘 "아 귀찮게 하지 좀 마요"라고 퉁명스레 말했지만, 내가 "아 제발요. 오늘 포장할 거 너어무 많잖아요."하고 조르면 이내 블루투스 스피커를 연결해주곤 했다. 그러면 나는 이별을 앓는 곡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데이식스에게 위로와 응원을 받으며 포장을 해나갈 수 있었다.


사람과 있을 때 정적을 견디지 못하는 나는 늘 억지로 말을 붙이는 버릇이 있는데, 대표2가 입을 열기 시작하자 그런 노력을 해야 할 필요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덕분에 둘만 있는 좁은 공간도 부담 없고 편해졌다. 그렇게 나는 점점 말수가 줄고, 대표는 반대로 말수가 늘어났다. 극과 극에 있다고 생각했던 대표와 내가 서로의 평균으로 점점 향해가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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