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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30대의 알바생은 자존심이 상해야 하는가

퇴사 후 명품 포장 아르바이트

by 선인장

30대의 아르바이트생.


나는 이 타이틀에 얼마나 자존심이 상해야 하는 걸까? 퇴사 후 아르바이트를 하는 나는 [자존심이 상하길 빈번히 강요받는 기분]이 들곤 했다.


명품 포장을 하기 전, 회사가 운영하는 공유오피스에서 인포 아르바이트를 했다. 당시 나는 나름의 목표를 위해 퇴사했고, 경제적, 심리적으로 모두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다.


나는 회사에서 운영하는 그 공유오피스가 퍽 마음에 들었다. 최적의 환경이었다. 오가던 사람들의 결이 나의 취향이었고, 내가 원하는 '뇌 빼고 할 수 있는' 단순 노동이 주를 이뤘으며, 소정의 용돈을 벌 수 있는 꿀알바였다.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안 정규직으로 일했던 사람들과 자주 마주칠 수 있다는 사실도 나에겐 이점이었다. 말도 안 될 정도로 인품이 좋은 구성원이었기에, 퇴사할 때 사람들과 헤어지는 게 가장 아쉬울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내가 공유 오피스에서 정직원이 아닌 아르바이트생으로, 연봉이 아닌 최저시급을 받으며, 펜대를 잡는 게 아닌 끌차를 끈다는 것이 전남자친구 입장에서는 다소 창피한 일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내가 얼마나 '없어 보이는 일'을 하고 있는지 상기시켰다.


- 거기서 동기들 마주치면 안 쪽팔리니.

- 너 참 자존심이 없구나.

- 그러니 결국, 너 참 자존감이 높나 보구나.


하면서 내 자존감을 깎아내렸다. 하지만 애초에 왜 자존심이 상해야 하는지 그리 와닿지 않았던 내가 오히려 '대가리 꽃밭'이었던 걸까? 이상한 일이었다. 만약 내가 정말 자존심이 상할 만큼 힘든 처지에서 힘든 일을 하고 있다면, 그조차도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생활력 있고, 자립심 있는 나 얼마나 멋져. 전남친 너처럼 남들에게 '있어 보이는' 것보다 실속을 중시하는 나, 얼마나 곧아.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소수인 듯했다. 의아했다.


아르바이트를 구하기 어려웠던 이유도 비슷했다. 내가 소위 '없어 보이는'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을 거라는 고정관념 때문인지, 아무리 단순 노동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싶다고 어필해도 추천받기 힘들었다. "너 같은 고급 인력을 아무 데나 쓸 수 없지."라는 듣기 좋은 말도 부담스러웠다. 더울 때는 시원한 곳에서, 추울 때에서 따뜻한 곳에서 컴퓨터를 두드리며 일했던 내가 신체적으로 고된 일을 오래 버틸 수 있는지 의심받는 기분이었다. 오히려 나는 그게 콤플렉스였다.





회사 공유 오피스 알바는 극히 이상적이었다. 대기업 특유의 이미지 관리 덕분에 예우를 받으며 일할 수 있었다. '갑'-'을'관계에서 '을'의 역할임을 상기해야 하는 상황이 없었다. 물론 내 인사를 받지 않던 이용자가 내가 이전에 이곳의 정직원이었음을 알고 태도를 바꾸는 일도 간혹 있었지만, 최소한 회사와 직원들은 넘치게 나를 존중해 줬다.


하지만 포장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깨달았다. 정말이지 '꽃' 같은 아르바이트를 해왔구나. 아르바이트생과 회사의 관계가 돈을 주고받는 계약관계라기보다, 결국 필요에 의해 맺어진 관계에서 더 아쉬운 쪽이 '을'이라는 생각은 참 순진했구나. 나는 명품 포장 알바를 하며, 보통의 사람들이 30대 알바생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대하는지, 그리고 어떤 환경에 놓여 있다고 짐작하는지 온몸으로 체감했다.


우선 그들에게 나는 선택이 아닌 필요에 의해 포장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당일에 출근 시간을 통보받아도 당연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고, 인사할 때 굳이 웃으려 노력할 필요 없는 사람이었다. 물론 점차 친밀한 관계가 됐지만, 내가 아르바이트 조건에 관한 질문을 하자 "자기가 갑인 줄 알고 있네?" 라며 장난스럽게 내뱉은 대표1의 말에서 여실히 깨달았다. 내가 아무래도 자존심이 상해야 할 상황이 맞나 보다.


평균적으로 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들을 고려해 처지를 추측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속으로 깔보는 것까지도 막을 수 없다. 하지만 생각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태도로 틈틈이 드러난다는 게 문제였다.


피치 못하게 자리를 비워야 할 때 전임자 그 누구도 연락을 받지 않는 모습을 보자 더욱 확신했다.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었다. 두 시간 알바 대타를 자처한다고 살림살이가 나아질 리도 없으니 돕지 않는 게 당연했다. 많은 대화가 오가지 않았으니 정 같은 게 있을 리도 만무했을 거다.


그럴 땐 기억을 더듬어 상대가 내게 보여준 존중을 가늠해 보게 된다. 저리 투명하게 극단적 수직관계를 드러내는 대표들을 전임자가 도울 리 없었다. 그거야 말로 "너 참 자존심도 없구나"는 말을 들을 일이었다.


숫자와 계산으로 점철된 관계에서도 인간적인 호의가 필요한 순간은 분명히 온다.






퇴근 전, 혼자 야근하고 있던 대표1은 내게 물었다.


- 저희 회사 분위기가 많이 안 좋죠?


지들도 알긴 아는구나. 대뜸 받은 질문에 당황했지만 나는 굳이 부정하지 않고 질문으로 대신했다.


- 혹시 무슨 일 있나요...?


딱히 제대로 된 답변을 기대하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는데, 대표1은 기다렸다는 듯 내게 고충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 명품업계가 어려워진 지 꽤 됐거든요. 여기 의자랑 책상 보시다시피, 저희도 원래 직원이 세 명 더 있었는데 업계 상황이 안 좋아지면서 전부 그만두게 됐어요. 1년 전만 해도 저희도 원래 웃고 농담하고 그랬어요.


- (상상 안 가는데..) 아... 넵넵.


- 뭐 여자 직원은 없었긴 한데. 제가 1년 사이에 15킬로가 빠졌어요.


- (어쩐지 그래서 다리가 내 팔보다 가늘었구나..) 아... 진짜 힘드셨나 봐요.


- 네. 그래도 이렇게 물어봐 줘서 고마워요. 진짜 근데 저희가 지금 얘기 엄청 많이 나누는 편이에요.


- (? 고마워해야 돼?..) 아 그렇군요.


- 네. 사실 전임자분은 저희랑 나이도 비슷해 보이고 했는데 말을 거의 두 마디? 그 정도밖에 안 했어요.


- 네 들었어요. 동갑이시라고 하더라고요.


- 그래요? 그것도 전 몰랐어요. 하여튼 저도 사정을 얘기 한번 하고 싶었어요. 저희가 분위기가 늘 이렇다 보니 아르바이트생분들이 많이 힘들어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 (알긴 아는구나... 근데 갑자기 말 많이 거는 것도 싫은데) 아 근데 조용히 포장만 하고 싶은 사람들도 많을 거예요!


- 그럼 다행이고요.


- (제발 많이 말걸지마..) 진짜요. 저도 그래서 나름 힐링하고 있거든요.


- 하여튼 맨날 일이 터져요. 저희도 웃으며 일하고 싶은데. 그런 공기 분위기 줘서 미안하고, 어서 퇴근해 보세요.


길어질 줄 모르고 어정쩡하게 서서 마음에도 없는 질문을 했는데 뜻하지 않게 굉장히 많은 사연을 들은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조금 당황했지만, 듣다 보니 그의 구구절절한 난항이 진솔하게 느껴졌다. 얼마나 힘들면 몸무게가 저리 빠지지. 대표1이 안쓰럽기도 했다. 물론 그가 포르셰 오너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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