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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사람이 이리 빨리 돌변한다고?

퇴사 후 명품 포장 아르바이트

by 선인장



알바 생활에 불만이 점점 쌓일수록 나는 더욱더 악착같이 할 일을 해내고자 했다. 우선 당연히 무조건 지켜야 하는 기본부터. 단 하나의 불량품도 놓치지 않았고, 단 1센티의 오차도 없이 포장했으며, 단 1분도 출근시간에 늦거나 딴짓하지 않으려 했다. 그들이 말도안 되는 모습을 보일 수록 나는 모든 규율을 완벽하고 꼼꼼하게 지키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왜? 책잡히기 싫었다. 아니 책 잡힐 수 없었다. 또 선 넘는 요구를 했을 때 당당하게 전부 따져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무언가 지적질을 할 일이 생긴다면, 그때 대표가 "넌 뭐 얼마나 그리 잘했다고?"라고 되물을 수 있는 상황만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야 내가 요구할 권리가 생기고, 뒤에서 욕할 권리가 생긴다고 느꼈다. 부당한 상황에서 나는 완전무결해야 했다. 이 무슨 언제나 따질 일을 염두에 두고 있는... 대학교 시절 쌈닭 기질이 어디 가지 않는 걸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굳이 알바에서 뭘 그리 얼굴 찌푸리면서까지 따지려 하나, 싶기도 하다. 아닌 것 같으면 대충 예-예 하다가 관두면 되는 문제다. 내 평생직장도 꿈도 아니면서, 이곳에서 악착같이 내 권리를 지키려 애쓸 필요는 없었다.


그러니까 필요 이상의 강박이었다. 나는 대부분 이렇게까지 집착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때때로, 이러한 강박으로 인해 상황이 좋은 쪽으로 뒤바뀌기도 한다. 이번 역시 그랬다.






당연히도 나는 쉽게 대화창을 열지 못했다. 일터에서 만난, 친하지도 않은 남자의 반응은 수많은 경우의 수를 가지고 있었고, 하필 나는 S가 아닌 N이었다. 엇나간 내 핑퐁 플레이에 삔또가 상해 이번엔 강스파이크라도 날렸을지 모른다. 아니면 그냥 탁구채를 집어던졌을 수도 있고.


잠깐의 심호흡 뒤, 나는 대표2가 적어도 싸이코나 싸이코패스는 아니길 빌며 카톡창을 꾹 눌렀다. 그런데 내가 보낸 장문의 카톡에 맞먹는 큼지막한 회색 말풍선이 한눈에 들어왔다. 나는 쫄보로서 상처받을 마음의 준비, 그리고 분조장으로서 반격할 마음의 준비를 마친 후, 카톡을 읽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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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하며 화내는 카톡이었으면 차라리 덜 당황하지 않았을까. 심지어 실제로 말을 나눴을 때완 달리 논리 정연하다. 나는 수긍하는 그의 태도에 안심이 되면서도, '아니 대체 이 사람은 왜 내가 파악이 안 되지?' 하는 답답함이 일었다.


물론 저렇게 긴 사과를 받자 또 마음이 풀려버렸다. 한때 친구는 내게 <거울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곤 했는데, 나는 마치 그 가설을 증명이라도 하듯 대표2에게 질세라 친절한 사과카톡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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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3개월을 채울 생각은 단연코 없었다.


오해가 풀린 건 풀린 거고, 그 '오전부터 출근시간 통보 대기조' 체질이 아닌 건, 여전히 아니다. 이는 바뀌지 않았고, 대표2 역시 통관문제 때문에 여전히 같은 방식을 고수하려는 모양이었다. 대표1의 말과는 달랐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을 들으니 이해를 해야 하는 부분 같으면서도, 굳이 내가 그 생활을 이어갈 필요는 없는 노릇이었다. 체질에 맞는 유연한 근무자가 또 있겠지, 생각했다.


'다음 주, 무리면 다다음주 안에는 그만둬야지.'


나는 그렇게 굳게 결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나의 얄궂은 포장 알바. 사소한 다툼이 곱게 포장된 바로 그다음 날부터, 낯선 모습의 대표2가 낯선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 시작은 커피머신이었다. 내가 외투를 대충 걸치고 주문목록을 확인하기 위해 노트북을 열자마자, 출근할 때 눈도 안 마주쳤던 그가 허겁지겁 다가왔다. 그리곤 애써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내게 말했다.


- 아 제가 어제 커피머신을 닦아놨거든요? 이제 그거 편하게 쓰시면 돼요.


갑자기?... 내가 그간 편의점 1+1 커피를 마셔재낄 때에도, 저들만 비싼 테이크아웃 커피를 쪽쪽 마시고 있지 않았나. 당황한 나를 두고 자리로 돌아가려다, 다시 내게 다가오는 대표2.


- 아 혹시 캡슐은 어떤 거 좋아하세요...?


그리곤 입꼬리가 불균형하게 올라간, 어색한 미소 남발을 하기 시작한다. 나는 생각했다.


'아.. 저렇게(?) 웃는 사람이구나...'


두 번째로는 난데없는 칭찬이 이어졌다. 그들이 그렇게 노래 부른 대로 휘뚜루마뚜루 빠르게 포장하고 귀가하는 길, 대표2로부터 카톡 메시지가 왔다.


- 오늘 진짜 빨라지셨더라고요...ㅎㅎ 감사합니다.


나는 다시 생각했다.


'당연하지... 겁나 대충 했으니까...'


그 뒤에도 대표2는 계속해서 그 만의 스몰토크를 시도했다. 때때로 그의 질문과 칭찬은 당황을 지나 어느덧 황당함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게 만들었다. 이를테면 대표2가 했던, 며칠에 걸친 질문 세례들이 그랬다. 일한 지 한 달이 넘었는데 이제 와서 그는 뜬금없고 어이도 없는 질문들을 던졌다.


- 그러고 보니, 성함도 안 물어봤네요. 성함이...?


마치 그가 업무에 치여 그간 미뤄뒀던 예의를 뒤늦게 허겁지겁 차리고 있는 듯했다. 나는 생각했다.


'.... 아냐 너 물어봤어. 두 번이나... 나도 두 번 대답했고.'


다음 날 그가 말했다.


- 새로 사신 신발 예쁘더라고요~ ㅎㅎ


나는 생각했다.


'이거 신고 온 적 세 번 넘어...'


또 다른 날은 이렇게 물었다.


- 아 자꾸 까먹네요, 나이가 몇이시라고 했죠?


나는 생각했다.


'아냐... 이건 한 번도 안 물어봤어...'


뭐지, 이 사람...?






"근데 나쁜 사람은 아니더라고. 알고 보니 착해."


주말낮, 나는 오랜만에 만난 직장 동료에게 한참 동안 알바썰을 늘어놓고 있었다. 특히 회사 대표들에 대해선 수차례 '막장', '엉망진창' 등 헐뜯는 표현을 변주해 가며 울분을 토했다. 그리고는 구구절절 서문으로 밑밥을 깔았던 나의 옷 포장 실력을 증명이라도 하듯, 대표를 애써 포장하며 이야기를 마무리지으려 했는데, 이율배반적인 내 태도에 피식 웃던 동료가 말했다.


"야... 그냥 나쁘기만 하거나 착하기만 한 사람이 어딨어. 완전히 100프로 나쁘기만 한 사람은 세상에 없어. 사람들 전부 최소 그 정도씩은 착해."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대표가 100프로 나쁘기만 한 줄 알았거든...'


이처럼 첫인상이 이토록 구리면, 조그만 호의에도 감동을 받는 건 어쩔 수 없는 사람의 습성인가 보다.





한때 "우리 원래 택배 하는 사람들과 말 안 해요"라고 말했던 대표2는 어디 갔을까. 급격히 달라진 대표2의 친절한 모습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뭘 굳이 저렇게까지 하나 싶을 정도로 나를 신경 쓰는 게 느껴졌다. 하여 '마냥 나쁜 사람은 아니구나' 생각하게 됐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씁쓸해졌다. 결국 될 대로 지르는 게 답인 걸까?


왜 좋게 말하면 알아듣질 못 할까. 왜 웃으며 의견을 피력하면 무시하다가, 각 잡고 진지하게 재차 말해도 대충 넘기고, 굳이 인상 쓴 채 험한 말을 할 때 그제야 알아듣는 걸까. 왜 갑자기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는 거고.그런 소위 '강약약강' 태도의 사람들이 왜 이리 판을 치고 있나. 내가 뒤늦게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었네'라고 대표들을 여기기엔, 그저 나만큼 공격적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갑질당했던 수많은 전-아르바이트생들이 억울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새 정이라도 들었는지, 상냥함에 한없이 약한 나는 자꾸만 그들을 이해하고 싶어지는게 또 문제였다. 이전부터 사과만은 잘했던 모습을 굳이 다시 떠올리며, 대표들의 배려심은 없었던 게 아니고 가려져 있었을 뿐이었다고, 어쩌면 모두 오해였다고 대신 나서서 합리화하고 있었다. 심지어 하루는 주문 목록에 대표 중 한 명이 적은 듯 한 '누나 선물'을 보고 나도 모르게 흐뭇하게 웃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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