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명품 포장 아르바이트
명품을 포장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아르바이트 공고에선 '의류 및 잡화 포장 알바'라고만 명시되어 있었고, 나는 면접날이 돼서야 정확히 어떤 종류의 옷인지를 알게 됐다. 명. 품. 이라고 대표2가 말했다. 그리고 이름부터 자동적으로 부담이 가는 그 단어와 나는 딱히 친하지 않다.
하지만 큰 걱정은 없었다. 학창시절 학교 위치 때문에 명품거리를 쭉 가로질러 통학을 했던지라, 비록 갖고 있진 않더라도 충분히 많은 브랜드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참으로 순진한 생각이었다. 전세계의 폭넓은 명품 시장에 고작 내가 지나쳤던 건물 만큼의 브랜드가 전부일 리가.
내가 출근하기 전, 매일 대표들은 엑셀 파일에 그 날의 주문 목력을 기입해 놓는다. 그런데 인수인계 할 때부터 내가 여태 몰랐던 브랜드들이 눈에 띄었다. 그 중 하나가 'the row' 였다. 지금은 흔해진 이 고가의 명품을 처음 봤을 때, 그토록 깔끔한 디자인에 나는 처음으로 '이런 명품이면 나도 사고싶다' 는 생각까지 들었다.
개뿔. 내 기준 소박한 모양새와는 달리 더 로우는 아주 요란한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내 아르바이트 일급의 100배 이상이었다. 택에 가격표를 칼로 뗄 때, 칼이 가방 쪽으로 향했다면, 행여 흠집이라도 냈다면...아, 차라리 긁어도 내 팔뚝을 긁지.
그리고 간혹 엑셀파일에 브랜드명이 안 적혀있거나(내가 로고를 보고 당연히 브랜드를 알 거라 추측), 혹은 다른 명칭으로 적혀 있을 때가 있었다. 후자의 경우는 Max Mara였는데, 엑셀 파일에 도무지 해당 브랜드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어쩔 수없이 나는 적막을 깨고 조심스럽게 대표2를 불렀다. 그리고 파일이 잘못된 것 같다고 확신에 차 지적했다. 그러자 대표2는 물끄러미 주문 목록을 보더니 피식 웃고는, 셀 하나를 수정했다. Sportmax 에서, Max Mara로…
막스마라라는 브랜드는 안다. 하지만 스포트막스는 사실 들어본 적도 없었다. 단어 길이도 비슷한데 대표2(인지 1인지)은 굳이 왜 스포트막스라 적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의류 택에도 분명 막스마라라고 적혀 있었는데 왜!
대표 1, 2의 자리 앞엔 사무용 책상 세 개가 더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의 주인은 자진해서 회사를 떠난 직원들이라고 한다. 근래 명품 시장이 위축돼 사업이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주문목록을 볼 때마다 매번 놀랐다. 아직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많은 명품들을 매일같이 주문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명품에 큰 관심이 없다. 명품을 좋아하는 대표들이 수차례 대충 포장하라 종용해도, 명품에 관심 없는 내가 이렇게 정성을 쏟고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나는 어느 누군가의 <30대 여성이라면 친구 결혼식에 들고 갈 명품백 하나 쯤은 있어야지> 라는 말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으니까. 돈을 쓸 여유가 차고 넘친다면 인정. 하지만 그만큼 돈을 쓸 '여유'가 아닌 '애정'이 있다는 건, 생활비를 아끼고 아낀 뒤 새벽같이 오픈런을 달린다는 건, 나로선 의아하고 생소한 일이었다.
실제로 친구의 결혼식 뒤풀이 때, 다른 동창의 명품백을 봤냐며 여자들이 열띤 대화를 나누는걸 들은 적이 있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의 삐까뻔쩍한 가방과 옷차림을 스캔하며, 고급스럽게 꾸민 여성들은 그녀의 능력과 경제력을 가늠해보고 있었다. 이런 뒷 이야기를 몇 차례 목격하다 보니, 나는 얕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에 명품백을 사는 심리가 이해가기 시작했다. 결혼식처럼 잠깐 보고 스치는 상황에서 상대의 안위를 평가하는 방법은 '보여지는 것' 밖에는 없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가 든 샤넬백에 기가 죽지도, 열망이 생기지도 않았다. 20대 때는 심지어 명품 소비에 대한 안좋은 편견이 박히기도 했다. 적어도 소비에 있어서만큼은 내가 검소하고 현명하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허무한 건, 명품이 많은 지인과 하나도 없는 내가 매달 저축하는 월급은 비슷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 나는 다른 류의 탕진잼을 열심히 실천하고 있었다. 그저 어디에 가치를 두느냐의 문제였다. 나는 명품백에 가치를 두지 않는 대신, 전자기기에 과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다른 이가 목에 무심히 걸친 고가의 헤드폰을 스캔하며 나 역시 그들의 능력과 경제력을 가늠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명품을 들지 않아도 위축되지 않는 이유는, 언제든 원하는 헤드폰을 살 수 있다고 믿어서인지도 모른다. 명품백을 못 드는 상황이었다면, 그런데 주변 친구들은 너도 나도 갖고 있다면, 그 때에도 난 위축되지 않을 수 있을까? 원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자신이 없다. 갖고 싶은 것을 '안' 갖기로 '선택'한게 아닌, '어쩔 수 없이' '못' 가졌을 때 오는 갈증이 얼마나 큰지 나는 잘 알고 있으니까. 첫사랑이 그랬고, 내 오랜 꿈 역시 그랬다.
물품의 금액대를 알게 되자 나는 포장에 더 많은 정성과 시간을 쏟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점점 화가 났다. 빨리 하라고 재촉할 수는 있다. 하지만 꼼꼼하게 완성한 나의 포장을 대표2가 "쓰레기 같다"고 말했던 건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때부터 그의 언행에 대한 내 불만이 켜켜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화를 잘 못 참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