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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장 Nov 21. 2024

아 알겠어 알겠다고!

회사 대신 명품 포장 아르바이트

인수인계가 끝나고 선임자 없이 포장해야 되는 그 첫날.


나는 어김없이 들려오는 90년대 발라드에 질세라 밝고 크게 인사하며 회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대표1은 질세라 침울하고 성의 없는 인사로 화답했다. 그래도 뭐, 자리에 앉아 인상만 쓰고 있는 대표2보단 선녀였다. 물론 대표1의 자리가 문을 열면 눈이 마주칠 수밖에 없는 자리긴 하지만...대표1 역시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표2와 같은 표정으로 답하긴 했지만...


일단 소몰이 창법을 이겨내고 오늘도 즐겁게 포장해 보자! 는 의욕 넘치는 다짐과 함께, 나 홀로 포장 첫날을 시작했다.


옷 포장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우선 작업대 위에 회사 로고가 박힌 종이 포장지를 깔기. 아무리 퇴근 전 돌돌이로 밀고 물티슈로 닦아도 작업대 위 먼지는 언제나 디폴트 값이었다. 하여 옷 포장은 무조건 종이 포장지 위에서. 그리고 배송 온 의류를 꼼꼼히 검수하기. 다행히 첫날이라 대표들이 직접 검수를 마친 옷 두어 벌이 놓여 있었다.


첫 번째 포장 미션은 핑크색 셔츠. 그런데 가격표를 보니 50만 원...? 나 당근에서 5천 원짜리 옷 포장 해왔는데...?


개인 취향이겠다만 내 눈엔 정말 구린 셔츠였기에... 나는 조금의 현타가 왔다. 사람들이 진짜 돈이 남아도나 보다 생각하며, 이 가격이니 대표들이 검수를 도맡아 해 줬구나 이해가 갔다. 그래. 부자들은 이미 예쁜 옷들은 차고 넘치게 갖고 있으니 이런 옷도 시도해 보고 그래야지. 다시 정신 차리고 포장에 집중. 나는 부담이 돼 오천 원짜리 포장에 비해 100배는 아니더라도 10배는 가까히 심혈을 기울이려 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담배 피우러 일어난 줄 알았던 대표1이 갑자기 내게 다가웠다. 그리곤 여전한 무표정과 어울리지 않는 공손한 말투로 내게 물었다.


"뭐 어려운 거 없으시죠? 물어볼 거 있으면 편하게 물어보세요."

"(저 분위기에?... 됐다...) 아 넵넵."


그런데 영 미덥잖았는지 재차 묻는다.


"이게 아직은 많이 헷갈리실 수 있어서 하는 말이거든요. 물어보세요 꼭."

"(그래 해볼게...) 넵넵."

"아니 정말로요."

"(아니 알겠다고) 넵넵!"


조금 짜증이 나기 시작하던 차에 대표가 덧붙였다.


"원래 이전 분들은 인수인계 일주일씩 받으셨는데, 어쩔 수 없이 이틀만 받으셔가지고."


응? 이 옷 포장을... 일주일 배울 게 있어?


"아... 넵 우선 하다가 모르는 게 있으면 대표님 자리로 가서 여쭤볼게요."

"네~그러세요."


그 말을 끝으로 대표1은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대표1 덕분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다소 표정과 싱크가 안 맞는 말투긴 했지만, 어조로 보아 정말 기분이 꽤 괜찮은 모양이었다. 굳이 눈치 보지 않고 물어봐도 되니 '명품 포장'에 대한 걱정을 덜었다. 그저 이전 알바들은 대체 일주일 동안 뭘 배운 건지, 나의 선임자는 어떻게 그 과정을 이틀 동안 콤팩트하게 압축해서 내게 가르쳤는지, 조금 찝찝할 뿐이었다.


다시 옷 포장으로 돌아가서. 포장지 위에 핑크색 셔츠를 곱게 편 뒤, 비닐 포장지 아랫단 너비에 맞게 각을 맞춰 접는다. 개는 방식은 내가 당근마켓에서 해왔던 방식과 다르지 않아 익숙하고 쉬웠다. 비닐포장지에 넣을 땐 손으로 살짝 반으로 접은 후 밀어 넣기. 다음엔 꾸욱 눌러 공기 빼기(나에겐 이마저 즐거운). 그리고 이제 종이포장지로 이중 포장을 할 시간. 두터운 서류를 포장하듯 양 끝을 밀봉하여 테이프로 붙이면 된다. 그리고 브랜드 브로셔, 할인 쿠폰과 함께 택배박스에 넣으면 끝. 아, 노트북에 입력된 대로 주문한 고객의 송장을 찾아 붙이면 진짜 끝.


끈에 얼룩이 묻어 보고하기 위해 찍어뒀던 사진


이젠 회색 프라다 스니커즈 차례. 신발박스 째 종이포장만 해야 되는데, 생각보다 크기가 커 잠깐 고민이 됐다. 종이 포장지의 규격으론 역부족이었다. 두 개를 이어서 붙이자, 하며 종이의 양 끝을 맞춰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등 뒤가 서늘했다. 그러더니 귀 뒤에 입김이 불어 기분 나쁘게 따뜻해졌고, 나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는 기겁했다. 대체 언제부터 지켜봤는지, 대표1의 엄근진 얼굴이 내 어깨너머 가까이 있었다. 마치 90년대 공포 영화처럼. 나는 왹! 하는 괴상한 소리와 함께 발을 헛디뎌 반쯤 주저앉았다. 그런데 대표1은 이에 같이 놀라더니, 갑자기 웃기 시작한다. 뭐지...이 사람...? 나는 조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대표1에게서 처음 본, 날것 그대로의 웃음이었다...


"아 죄송해요."


 나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애써 추스르고, 대표1은 웃음을 애써 추슬렀다.


"하.... 물어볼게요,  물어본다고요. 다 하고 박스 포장 전에 검사받으러 갈테니 걱정 마세요."

"아니에요, 그러실 필욘 없고. 잘하시네요."


그리고 대표1은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다시 프라다 신발을 곱게 싸며 생각에 잠겼다. 그렇구나. 노래취향뿐만이 아니라, 개그코드도 나와 상극인 사람이구나. 대표1은 내가 웃으며 인사할 땐 노려보고, 내가 놀라서 노려볼 땐 웃는구나. 이 회사... 뭔가 나랑 안 맞아....


하지만 역시나, 대표1은 양반이었다는 걸 얼마 안 지나 통렬히 깨닫는다. 대표2는 내가 이해할 수 없고 종잡을 수도 없는, 나와 정말, 정말, 정말. 안 맞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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