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명품 포장 아르바이트
매일 아침, 몇 시에 출근해야 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대표2의 문자만을 기다렸다. 그중 어느 날은 기존 출근시간 한 시간 전에 '오늘은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연락을 받기도 했다. 급하게 머리를 말리고 있던 나는 짜증이 솟구쳤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이 알바, 결코 오래는 못 하겠다고.
당근 알바 특, 짧고 굵은 채용공고는 해석의 여지가 많았다. '포장' 업무는 내가 생각했던 '물건을 깨끗한 투명 비닐 OPP포장지에 넣은 뒤 종이 포장지로 반듯하게 두르는 일'에 국한되지 않았다. 불량 물품 검수 및 오염 제거 작업은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었지만, 쿠폰 제작까지 요구하자 '포장 업무'가 무엇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출퇴근 시간을 지나치게 넉넉히 적는 선임자를 보고 이를 '꼼수'라고 느꼈던 나는 이제야 그가 이해됐다. 꼼수가 아닌, 대표들의 무시와 갑질에도 버틸 수 있는 일종의 묘수였다.
어느 정도 포장 일이 손에 익자 대표2의 혼잣말을 가장한 잔소리가 멈췄다. 속도는 눈에 띄게 빨라졌고, 대표2는"이렇게 빨리 걸릴 거 아닌데...쓰읍..."라고 등 뒤에서 궁시렁거리는 대신 '이제 빨라지셨더라고요.' 라는 문자를 보내오기도 했다.
하지만 불규칙적인 출근시간은 여전했고 적응이 되지 않았다. 결국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한 달가량 되었을 때, 나는 대표2에게 애로사항을 알리기로 결심했다. 퇴근 직전, 나는 담타를 위해 테라스로 향하던 대표2를 불러 세웠다.
- 저...제가 출근 시간이 이렇게 매일 다를 줄은 몰랐거든요. 길게 일하긴 힘들 것 같아요.
그러자 대표2는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하며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 네? 아니 제가 이 부분 여쭤봤을 땐 된다면서요.
- ..? 그런 말 들은 적 없는데요? 물어보신 적도 없어요.
- 제가 분명 두 시간 보다 더 일할 수도 있다고 말했는데.
- 그건 말씀하셨는데, 업무시간 뒤에 야근을 종종 하는 줄 알았지, 출근 시간이 매일 유동적인 줄은 몰랐는데요... 그리고 전 날이 아닌 당일에 출근시간을 말씀해 주시는 건, 제가 매일 오전부터 기다리고 있어야 하니 무리예요."
- 그것도 제가 면접 때 분명히 말씀드렸어요.
- 전 들은 기억이 없는데요?
- 아 그래서 뽑은건데. 말씀드렸더니 괜찮다고 하셔서.
- 네? 아니 무슨...
- 갑자기 관두신다고 하시면 저희가 곤란하죠.
- 아니, 당장 그만두겠다는 건 아니고요. 오래는 못 할 것 같다는 겁니다. 공고에도 안 적혀 있는 사항이었고...
- 그러니까 제가 분명 면접 때 말씀 드렸었잖아요.
망할 짧고 굵은 채용공고. 면접 때 말했다던 공고 외 업무 내용들을 내가 녹음이라도 했어야 하는 걸까? 대화는 그 뒤론 무한루프 었다.
- 아 분명히 말했는데.
- 아니 전 들은 적 없다고요.
도르마무가 이어졌고 20분 가량 지나자, 나와 대표2는 작업대 앞에 서서 얼굴이 빨개져 씩씩대고 있었다. 그럼에도 유치하고 무의미한 말다툼은 계속됐다. 도저히 서로 굽힐 기색이 없자, 보다 못한 대표1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그 역시 답답하고 짜증 난 표정으로 중재를 시작했다.
- 제가 앉아서 들어보니 이야기에 진전이 없을 것 같아서요. 계속 서로 똑같은 말만 하던데. 그러니까 출근 시간이 언제인지 매일 기다리셔야 하는 게 힘든 거잖아요.
- (이제야 말이 좀 통하네;)... 네.
- 그럼 이제부턴 안 그러셔도 되고, 어쩌다 물량이 너무 많을 것 같으면 전 날 밤까진 말씀드릴게요. 그러면 된 거잖아요. 그쵸?
- ... 네.
- 네, 그럼 그렇게 할 테니 퇴근하시면 됩니다.
대표들 이야기만 나오면 유독 퉁명스러웠던 선임자는 그들의 인성을 진작에 알아본 걸까? 그래서 그렇게 "관심 없다" 거듭 피력했던 걸까?
퇴근 전 회사에서 대표2와 내가 나눈 대화는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핑퐁과도 같았다. 대표1의 중재 덕에 일단락 됐지만, 나는 집에 가는 동안에도 답답함이 안 풀려 머리의 열기가 식을 줄을 몰랐다. 그 망할 혼잣말어투로 끊임없이 내 기억력을 탓했던 대표2의 불통. 그리고 마치 내가 앞으로 3개월 간의 알바 업무에 온전한 책임이 있는 양 원망하던, 그 고집스런 표정과 툴툴거리던 말투. 피곤한 와중에 번갈아가며 떠올리니 진절머리가 났다.
하지만 사무실을 나와서도 대표2는 굽히지 않았다. 대신 퇴근한 나에게 카톡으로 시비를 걸어왔다. [분명 말했다] 고. 그리고, [그러니 아무리 짧아도 올해 까진 해주셔야 한다]고.
내가 기억력 나쁜 호구처럼 보였던 걸까? 그리고 말했다고 한들, 왜 내가 당연히 올해까진 해야 하는 거지? 나는 그의 강압적인 말투에 답답함을 넘어 열불이 나기 시작했다. 부들거리고 있는데 대표2에게서 메시지 하나가 더 왔다.
[올해까지 3달밖에 안 남았는데.]
... 그만둘 거다. 그만둘 건데, 3달 안 채우고 그만둘 거긴 한데, 이렇게 내 탓인 듯 그만두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분노를 장전했다. 집에 들어가기도 전, 큰 길가에서 걸음을 멈춘 뒤 와다다 쏟아냈다. 와중에도 어느 정도 말은 또 골라, 그렇게 장장 열 줄이 넘는 카톡을 전송했다. 잠깐동안 대표2 팔에 그려져 있던 큼지막한 문신들이 떠올랐지만...아 몰라. 열받으니까.
[네 세 달 긴 것도 아니고 할 의향 있었는데요. 저 정말 면접 때 당일 시간 통보에 대해 들은 적이 없거든요. 그거 말씀하시면서 제가 관두게 되면 저 때문에 곤란하시다고 하셔서 저도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세 달 일해야 한다고 못 박으시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요. 면접공고에 당일통보를 정확히 적으신 게 아니고, 매우 짧은 면접이었고, 그렇다면 커뮤니케이션 오류인 것 같은데 제가 그런 식의 스케줄이 무리라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제게 당일통보 시스템은 매일 다른 일을 하는 일용직 노동 같은 예상치 못한 시스템이라 들었으면 분명 기억했을 것 같거든요.]
나는 스스로를 토닥인 뒤 아주 홀가분하고 속 시원한 마음으로 집에 들어갔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메시지 창에 들어가 '읽음' 표시를 확인했다. 집에 들어가 대충 씻고 나와 사랑하는 반려묘 뒤치다꺼리를 마쳤는데도, 핸드폰이 불길할 만큼 조용하다.
이대로 그만두게 되려나. 뭐, 이 명품 포장 아르바이트에서 벗어나는 건 나 역시 땡큐다. 애초에 하루 두 시간만 하는 아르바이트가 내 살림살이에 큰 도움이 될 리도 없었다. 막판엔 대표2가 하도 툴툴거리며 보채는 바람에 포장의 오롯한 즐거움을 느낄 새도 만무하고.
하지만 30분이 지나서도 대표2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자, 통쾌함이 있던 자리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물론, 메시지를 보낸 건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다만 기억 속 대표2의 용문신이 점점 더 해괴한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대표2의 험악한 인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 속에서 과장됐고, 거의 조폭 수준에까지 이르자 나는 잔뜩 초조해졌다. 그렇다. 나는 억울한 상황을 못 견디는 성질머리를 지닌 분조장임과 동시에, 겁은 심지어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쫄보였다. 나는 내가 보낸 메시지를 복기하기 시작했다. '아, 일용직 어쭈구 말 너무 쎘나;;'라는 생각과 함께. 그리고 생각했다.
'역시.... 도보 거리 알바를 하지 않길 잘했어....'
사실, 그냥 그만두면 될 것을. 굳이 왜 따박따박 따져댔을까. 선임자라면 이런 짓꺼리 안 했을텐데. 조금, 아주 조금은 후회하고 있던 차,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대표2로부터 온 답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