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대신 명품 포장 아르바이트
퇴사 후 얼떨결에 구한 이번 아르바이트는 '당근', 그러니까 '당신의 근처'에서 구한 알바답게 꽤나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그렇다고 도보로 이동할 정도는 또 아니어서 버스를 타야 하지만. 사실 이 정도 거리가 오히려 마음 편하다. 걸어서 출퇴근했던 당근알바 선임자들과 다르게, 나는 집 근처 나와바리에서 알바 대표들과 조우하는 일만큼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이사 전 나는 한 동네에서 약 25년을 살았다. 집에서 코 앞인 편의점에 가는 중에도 학창 시절 지인 두어 명은 만날 수 있을 만큼의 경력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경력이 조금 짜증 나고 불편했다. 한겨울 두툼한 패딩과 네 겹의 웃옷 아래에도 굳. 이. 브라를 챙겨 입는 등 자꾸만 자기 검열을 해야 했으니까. 그럼에도 사춘기 감수성은 언제나 번거로움과 귀찮음을 눌렀다.
하지만 현재 나는 그런 무용한 짓을 할 에너지도, 의지도 없다. 그러니 이사한 동네만큼은 지인-free 공간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내가 해외에 간 것처럼, 아니면 타지인이 이곳에 온 것처럼 자유롭게 노브라로 싸돌아다니고 싶었다. 집 근방 50미터가 매일 생경한 양, 혹은 마주치는 이웃들이 매번 초면인 양 산책하는 게 좋았다. 그리고 가능한 오래 그 상태를 유지할 수 있길 바랐다.
그러니 도보거리에서 일하는 40대 남자 두 명과 안면을 틀 수는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이전 직장처럼 서울의 끝에서 끝으로 횡단할 의향 또한 없었고.
버스 타고 15분. 적당히 멀면서도 적당히 가까운, 또 적당히 낯설면서도 적당히 친숙한 그곳이 딱이었다. 내게 지나칠 정도로 적당했다.
알바 첫 주는 허겁지겁과 허둥지둥의 무한 순환이었다.
우선 단순노동에서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게... 생각보다 빡셌다. 사무실 분위기와 대표들의 태도는 차치하더라도 몇 가지 애로사항들이 있었는데:
우선 첫 째. 팔에 알이 배겼다. 무거운 택배 상자를 드는 업무가 아니라고 명확히 공고에 명시해 놓고는 하루에 박스 몇 십 개씩 나르는 일은 기본이었다. 박스가 무겁지 않았음에도 첫째 주가 지나자 양 팔이 엄청 당기기 시작했다.
둘. 포장해야 하는 물품의 양이 매일 천차만별이었다. 그리고 그 개수를 그날 아침에야 알 수 있는 시스템이었는데, 하여 언제 내가 야근을 할지, 얼마나 늦게 끝날지 미리 알 수가 없었다. 어떤 날은 다섯 개 포장을 해 30분 만에 끝나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사십 개를 포장해 서너 시간이 걸리기도 했으니까.
셋. 심지어 대표2는 개수가 많을 땐 내가 일찍 출근하길 바랐다. 그러니까 매일 오전 중 포장해야 하는 택배 수량을 대표가 알게 되면, 그 개수에 따라 내 출근시간을 조정하려 했다. 이를테면 40개의 택배 포장이 네 시간이 걸린다 했을 때 [기존 업무 시간 4시~6시]를 [4시~8시]로 두 시간 야근하는 게 아닌, [2시~6시] 동안, 두 시간 일찍 와 주길 요청하는 식이었다. 그리고 이 출근 시간을 당일 정오쯤 알려줬다.
넷. 내가 잘 모르는 다양한 명품들. 손 떨리는 제품의 가격.
다섯. 자꾸만 빨리 포장하라 재촉하는 대표들. 덜 꼼꼼히 대충대충 하라는 대표들.
대표들이 자꾸만 작업대로 찾아왔다. 담배 피우러 나갈 때마다 번갈아가면서 내 포장을 지켜봤다. 대표1은 그래도 선녀이자 양반. 질문 쪽을 맡았다.
"괜찮으시죠? 모르는 거 없으세요?"
"지금까지 몇 개 하셨어요?"
"송장은 붙이셨죠?"
그런데 대표2는 내 등 뒤에서 혼잣말을 한다. 그리고 그 혼잣말이 내게 말을 걸 때의 목소리보다 컸다. 아. 대표2는 핀잔을 맡았구나. 푹신~한 쿠션 언어로 불만을 표하고. 아주 넌~지시 에둘러서 지시해 왔다.
"쓰읍... 이게 이렇게 오래 걸릴 게 아닌데..." 혹은
"인수인계받으셨을 텐데... 쓰읍" 아니면
"이렇게 계속하시면 안 될 텐데... 쓰읍..."이나
"아니... 글케까진 하실 필요 없는데..." 하면서.
이럴 거면, 이쯤이면 존댓말로 혼잣말하지. 자꾸 말줄임표 쓰지 말고.. 그리고 그 혼잣말에 내가 "네?" 응답하거나 획 돌면 또 모른 척한다.
"아니에요~하던 거 하세요~ 좀만 더 두고 볼게요~"
"....."
나흘쯤 지났을까. 점점 대표1은 찾아오지 않았다. 대신 여전히 인사 한 마디 나누지 않는 대표2가 계속해서 혼잣말로 나를 살살 긁었다. 기분 탓인지 대표2의 담배냄새가 훨씬 지독하게 등 뒤에서 풍겨왔다. 신경 쓰여 빨리 하려다가도 괜히 손이 떨려 더 오래 걸렸다. 나는 참다 참다 그럼 시범을 보여달라 말했다. 그리고 대표2가 한 포장은....
그러니까 다시. 결국 애로사항 네 번째로 돌아간다. 이 가격의 제품이 떡하니 쓰여있는데, 어쩔 수없이 고가인 걸 내가 알게 됐는데, 나는 대표2가 시범보인 그런 몰골로 <대충> 포장할 수가 없는 거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고 했던가...
하지만 웬걸? 몸이 고생하면 머리는 편안하지...!
머리는 불안과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워지고, 한적한 CPU에서 쉴 수 있다. 오히려 좋다. 그리고 그런 단순무식한 논리에서 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게 사실이었다. 생각했던 강도는 아니었다만... 그래도 운동하는 셈 치면 나쁘지 않았다. 허리를 최대한 조심하고, 그대로 무릎만 굽히고 엉덩이는 뒤로 빼고, 그 자세로 박스를 아령처럼 들면서, 이 틈에 스쿼트나 하지 뭐. 그러니 박스를 나르는 데까진 오케이.
그런데 몸이 고생하는데도... 머리 또한 고생하고 있었다. 그래서 문제였다.
뇌 빼고 명상하는 기분으로 사부작사부작 포장할 줄 알았지만 개뿔. 식은땀 뻘뻘 흘리며 부랴부랴 뜯고, 피고, 닦고, 보고, 떼고, 적고, 개고, 넣고, 붙이고, 옮기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나 혼자 검수를 맡았다는 부담감에 뇌에 과부하가 오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한 시간쯤 포장하다 보면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최대한 꼼꼼히, 아니 그보다 최대한 정신 바짝 차리고 빠르게 일을 마치고 거울을 보면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그리고 매일 아침. 오늘의 출근 시간이 정해지길 긴장한 채 기다려야 했다. 몇 시에 가야 될지 대표의 연락을 통해 알 수 있었지만 이 연락이 몇 시에 올지 또한 미지수였다. 그러니 나는 일어나서부터 대기조상태였다. 카톡 알람은 웬만하면 다 무음으로 해놓는데 그럴 수 없었다.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싶었다. 그리고 열흘 가량 지나자 '그래! 이건 좀 아니지!!' 싶은 마음으로 바뀌었다. 또 한 번 내 등뒤에서 큰 소리로 혼잣말한다면... 이젠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씁 씁 거리면서 갸우뚱하는 대표에게 질세라 된소리가 나오기 직전이었고, 불만은 툭 치면 쏟아지기 직전이었다. 일촉즉발. 그저 애로사항 첫 번째에서 다섯 번째 중 어느 걸 먼저 말할지의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