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명품 포장 아르바이트
대표2가 부쩍 말이 많아졌다.
- 저 많이 뚱뚱해요? 얼마 전에 병원 가서 검사했는데 전 날 금식하랬거든요. 진짜 금식하고 갔는데 자꾸 저한테 뭐 진짜 안 먹고 왔냐고, 확실하냐고 여러 번 묻는 거예요.
딱딱한 분위기를 굳이 풀려는 걸까.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웃으며 맞장구를 치다가 이렇게 수다스러운 분인지 몰랐다고 난색을 돌려 표현하니, 치매 예방을 위해선 말을 많이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웬 치매요. 그리곤 별다른 대꾸 안 하는 나를 슬쩍 보더니 거리낌 없이 묻는다.
- 애엄마세요?
- 예?
갑자기? 아직 이 정도 공격을 받을 사이는 아닌데. 아니면 진짜 그렇게 보이는 걸까?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자, 대표2가 장난스럽게 말을 덧붙인다.
- 아, 말투가 애 대하듯 다정하셔서요.
그쪽이 지나치게 퉁명스러웠던 거 아니고? 대충 웃어넘기고 옷 포장에 매진하는데, 수다에 대한 변호가 이어진다. 본인이 요즘 기억력이 부쩍 나빠지고, 말을 너무 못 하는 것 같아서 연습이 필요한 것 같다고. 그래서 말을 더 많이 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다고.
그래... 3일 연속 신고 온 운동화를 보고 "새 신발이죠? 예쁘네요." 라며 뿌듯하게 말하는 표정에서 대표2의 기억력이 염려스러웠던 건 사실이다. 또한 뜬금없이 "택배 하는 사람이랑 원래 말 안 한다"느니, 어법에 있어 연습이 필요해 보였던는 것도 명백하다. 하지만 굳이 나랑요? 대표2가 나를 슬쩍 위아래로 훑더니 말을 잇는다.
- 근데... 되게 MZ처럼 입으시네요? MZ 아니면서.
오버사이즈 박스티, 와이드 청바지, 지저분한 운동화에 화장 안 한 맨얼굴과 질끈 묶은 머리. 나의 포장룩은 확실히 30대 여성의 포멀한 직장인과는 거리가 멀긴 하다. 인정. 그런데 저런 나의 옷차림을 보고도 '학생스럽다'기 보단 '관리 안 한 애엄마'를 떠올렸다니. 30대 아르바이트생인 나는 안 그래도 늘어나는 주름살이 서러운데.
- 제가 여기 오는데 꾸미고 올 필요는 없잖아요...?
- 저희 무시하세요?
대표2가 장난스럽게 버럭 한다. 예상을 빗나간 반응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 아뇨, 그게 아니고 택배 포장하는 일 하는데... 그럼 꾸미고 와요?
대표2는 그제야 알았다는 듯 끄덕이더니, 얼마 뒤 다시 또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는, 사회성 떨어지는 말로 나를 또 한 번 긁는다.
- 선인장님은 호르몬에 영향을 많이 받나 봐요.
뭐라냐, 대체...
한숨이 절로 나왔다. 무슨 뜻인데요. 그의 말은 즉슨, 늘 웃던 내가 무표정으로 포장하고 있으면 무서워 보인다고. 그럴 때면 내가 호르몬에 지배당한 상태로 보인다는 뜻이었다. 아니 그럼, 첫인사할 때 지은 미소를 두 시간 포장 하는 내내 유지해야 했던 걸까.
- 아뇨, 저 기분 겉으로 티 내는 사람 싫어하는데요...
- 아 그쵸?
대표2는 휘파람을 불며 태연하게 일을 이어갔다. 그리고 대표2의 막말에 몇 차례 얻어맞은 나는 더이상 예의를 갖추지 않기로 결심했다. 반격할 타이밍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다짐을 모르는 대표2가 본인의 성공신화를 줄줄 읊기 시작했다. 대학교를 가지 않고 본인의 명품 사업을 시작하게 된 수순을 묻지 않은 내게 쩌렁쩌렁 알려주는 대표 2. 나는 그를 슬쩍 보더니 물었다.
- 아~ 대표님은 회사 안 다녀보신 거예요?
- 네.
조금 망설이다 그에게 물었다.
- 혹시... 저도 공격 하나 해도 돼요?
- ? 네?
- 그런 것 같더라고요.
- ?
- 회사 안 다녀보신 거 같더라고요.
나는 그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는 잠시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대표2에게 질문을 이어갔다.
- 대표1은 회사 다녀보신 거예요? (그는 훨씬 사회성이 좋다)
- 네.
- 그런 것 같더라고요.
나는 더욱 해맑게 웃어보였다. 하지만 기죽지 않는 대표 2. 또 신나게 받아친다.
- 아~그래요? 제가 사업시작하기 전에 동대문에서 오랫동안 일했었거든요. 거기 얼마나 별별 사람들이 다 있는데... 방금 저한테 뭐, 회사 안 다녀본 것 같다고 말하셨는데. 솔직히 제 입장에선 좀 우습죠.
말을 끝낸 대표2가 더없이 해사한 미소를 짓는다. 이 이상 선 넘는 공격은 하지 않으려 했던 나는 말문이 막힌다. 아. 뭔가 열받는다.
대표2의 장난은 계속됐다. 하루는 전 회사를 잠시 들렸다 출근한 (차려입은) 내게, 대표2가 웬일로 칭찬을 해왔다.
- 옷 예쁘게 입으셨네요?
하지만 기분 좋을 새를 주지 않고 바로 긁는 대표2.
- 누가 보면 데이트라도 하고 온 줄. 옛날 독립군 같고 아주 보기 좋아요.
나는 인내심을 갖고, 애써 웃으며 답했다.
- 네~ 구찌 가디건 좋아하시는 대표님 취향이 아니라면 다행이네요.
살짝 언짢은 표정을 짓던 대표2는 공용 작업대 위에 올려진 초콜릿 더미를 보고는 물었다.
- 이건 또 뭐예요?
- 전 회사 팀장님이 대표님들이랑 나눠먹으라며 주셨어요. 피곤할 때 드세요.
- 아.
대표2는 무표정하게 자리로 돌아갔다. 고맙다는 말은 해야되지 않니. 나는 목소리를 조금 높여 말했다.
- 고맙긴요 뭘!
말이 끝나기가 대표2의 정색이 돌아왔다.
- 안 먹을 건데요?
내가 입이 떠억 벌려진 채로 벙찌자 대표2는 빵 터진다. 그제야 고맙다고, 농담이라고.
이처럼 나는 대표 2의 '농담'에 지지 않으려고 자꾸 받아치긴 하는데, 뭔가 계속 말리는 기분이었다. 시작하지도 않은 싸움에서 연달아 지는 모양새였다. 카톡 답장이 늦기라도 하면 대표2가 비꼬며 물어왔다.
- 어디 미국이라도 가셨나 봐요?
대표2가 돌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서였다.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대표와 아르바이트생은 얼만큼 가까워지는 게 적당한 걸까? 얼마나 서로에 대해서 아는 게 깔끔할까? 평소와 같던 어느 날, 대표2가 내 핸드폰 바탕화면 속 반려묘를 보더니 대뜸 말을 건넸다.
- 저도 제 강아지가 보고 싶네요.
나는 옷 포장을 이어가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 빨리 퇴근하고 보러 가시면 되죠.
- 근데... 못 봐요.
순간 철렁. 대표2가 키우던 반려견이 무지개다리를 건넜나. 그렇다면 어떻게 애도를 표해야 하지 망설이고 있었는데, 난처한 내 표정을 알아챈 대표2가 말을 덧붙였다.
- 아, 그게 아니고 따로 살거든요.
휴. 다행이다. 그렇다면 반려견은 부모님이 계신 본가에 있는 걸까. 아내가 강아지 알러지라도 있나. 어쨌거나 한결 안심한 나는 가볍게 말했다.
- 자주 보러 가시면 되죠.
그런데, 또 한 번 예상치 못한 답이 돌아왔다.
- 제가 이혼해서요. 강아지가 아내 쪽에 있어요.
아. 이번엔 다행이 아니다.
누군가 이혼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이에 유감을 표현하기도, 응원을 해주기도 애매해 당황하게 된다. 이번 역시 그랬다. 그리고 평소의 가벼운 스몰토크가 아닌, 극히 사적이고 내밀한 이야기로 느껴져 조금 어색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 번 시작한 대표2의 사담은 멈추지 않았다.
- 근데 진짜 자식같이 키웠어서... 전처한테 매달 양육비를 보내요. 강아지 양육비를.
- 아...
- 좀 이상한가요?
- 아뇨, 그럴 수 있죠.....
대답이 시원찮았는지 잠시동안 정적이 오갔다. 나는 강아지 양육비에 대해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기에 이런 말이나 지껄였을 뿐이었다.
- 참, 제 알바비는 이번 주 언제 들어오나요?
친구들이 지난밤 아기가 앓은 태열에 마음을 졸이는 동안, 나는 대표2에게 쌍비읍 글씨체를 놀림받고 있었다.
검수하다 발견한 불량품은 따로 메모지에 적어두는데, 그때 내가 적었던 글씨체가 대표2 눈에 띄었나 보다. 어지간히 내가 편해졌는지 초딩이냐며, 저렇게 쌍비읍 쓰는 30대 처음 봤다며 한참을 놀리던 대표2. 대충 받아친 뒤 얼른 퇴근하려는데 뜬금없는 혼잣말이 들려온다.
- 아, 고기 먹고 싶다...
나는 별다른 대꾸 없이 사무실을 나섰다. 그런데 5분쯤 지났을까.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카톡이 온다.
[어디예요? 아직 멀리 안 갔으면 고기 먹을래요?ㅋㅋ]
별다른 대꾸를 했어야 하나. 대표2와의 1:1 식사는 불편해요. 고기도 원래 안 먹는다고요. 이렇게 말을 할 수 없는 나는 최대한 서로 민망하지 않을 멘트를 한참 동안 궁리하다, 금세 포기하곤 되는대로 답장을 보냈다.
[ㅠㅠ다음에 대표1님과 같이 밥 먹어요!]
나는 버스에 오르며 생각했다. 대표들과 이제 그만 친해져도 될 것 같다고. 특히나 대표2와는 보다 더 명확하고 뚜렷한 선을 긋는 게 맞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