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대표와 아르바이트생의 적정선

퇴사 후 명품 포장 아르바이트

by 선인장



대표2가 부쩍 말이 많아졌다.


- 저 많이 뚱뚱해요? 얼마 전에 병원 가서 검사했는데 전 날 금식하랬거든요. 진짜 금식하고 갔는데 자꾸 저한테 뭐 진짜 안 먹고 왔냐고, 확실하냐고 여러 번 묻는 거예요.


딱딱한 분위기를 굳이 풀려는 걸까.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웃으며 맞장구를 치다가 이렇게 수다스러운 분인지 몰랐다고 난색을 돌려 표현하니, 치매 예방을 위해선 말을 많이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웬 치매요. 그리곤 별다른 대꾸 안 하는 나를 슬쩍 보더니 거리낌 없이 묻는다.


- 애엄마세요?


- 예?


갑자기? 아직 이 정도 공격을 받을 사이는 아닌데. 아니면 진짜 그렇게 보이는 걸까?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자, 대표2가 장난스럽게 말을 덧붙인다.


- 아, 말투가 애 대하듯 다정하셔서요.


그쪽이 지나치게 퉁명스러웠던 거 아니고? 전임자한테 애아빠라고 들었는데, 본인과 동일시하고 싶었던 걸까? 대충 웃어넘기고 옷 포장에 매진하는데, 수다에 대한 변호가 이어진다. 본인이 요즘 기억력이 부쩍 나빠지고, 말을 너무 못 하는 것 같아서 연습이 필요한 것 같다고. 그래서 말을 더 많이 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다고.


그래... 3일 연속 신고 온 운동화를 보고 "새 신발이죠? 예쁘네요." 라며 뿌듯하게 말하는 표정에서 대표2의 기억력이 염려스러웠던 건 사실이다. 또한 뜬금없이 "택배 하는 사람이랑 원래 말 안 한다"느니, 어법에 있어 연습이 필요해 보였던는 것도 명백하다. 하지만 굳이 나랑요? 대표2가 나를 슬쩍 위아래로 훑더니 말을 잇는다.


- 근데... 되게 MZ처럼 입으시네요? MZ 아니면서.


오버사이즈 박스티, 와이드 청바지, 지저분한 운동화에 화장 안 한 맨얼굴과 질끈 묶은 머리. 나의 포장룩은 확실히 30대 여성의 포멀한 직장인과는 거리가 멀긴 하다. 인정. 그런데 저런 나의 옷차림을 보고도 '학생스럽다'기 보단 '관리 안 한 애엄마'를 떠올렸다니. 30대 아르바이트생인 나는 안 그래도 늘어나는 주름살이 서러운데.


- 제가 여기 오는데 꾸미고 올 필요는 없잖아요...?


- 저희 무시하세요?


대표2가 장난스럽게 버럭 한다. 예상을 빗나간 반응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 아뇨, 그게 아니고 택배 포장하는 일 하는데... 그럼 꾸미고 와요?


대표2는 그제야 알았다는 듯 끄덕이더니, 얼마 뒤 다시 또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는, 사회성 떨어지는 말로 나를 또 한 번 긁는다.


- 선인장님은 호르몬에 영향을 많이 받나 봐요.


뭐라냐, 대체...


한숨이 절로 나왔다. 무슨 뜻인데요. 그의 말은 즉슨, 늘 웃던 내가 무표정으로 포장하고 있으면 무서워 보인다고. 그럴 때면 내가 호르몬에 지배당한 상태로 보인다는 뜻이었다. 아니 그럼, 첫인사할 때 지은 미소를 두 시간 포장 하는 내내 유지해야 했던 걸까.


- 아뇨, 저 기분 겉으로 티 내는 사람 싫어하는데요...


- 아 그쵸?


대표2는 휘파람을 불며 태연하게 일을 이어갔다. 그리고 대표2의 막말에 몇 차례 얻어맞은 나는 더이상 예의를 갖추지 않기로 결심했다. 반격할 타이밍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다짐을 모르는 대표2가 본인의 성공신화를 줄줄 읊기 시작했다. 대학교를 가지 않고 본인의 명품 사업을 시작하게 된 수순을 묻지 않은 내게 쩌렁쩌렁 알려주는 대표 2. 나는 그를 슬쩍 보더니 물었다.


- 아~ 대표님은 회사 안 다녀보신 거예요?


- 네.


조금 망설이다 그에게 물었다.


- 혹시... 저도 공격 하나 해도 돼요?


- ? 네?


- 그런 것 같더라고요.


- ?


- 회사 안 다녀보신 거 같더라고요.


나는 그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는 잠시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대표2에게 질문을 이어갔다.


- 대표1은 회사 다녀보신 거예요? (그는 훨씬 사회성이 좋다)


- 네.


- 그런 것 같더라고요.


나는 더욱 해맑게 웃어보였다. 하지만 기죽지 않는 대표 2. 또 신나게 받아친다.


- 아~그래요? 제가 사업시작하기 전에 의류매장에서 오랫동안 일했었거든요. 거기 얼마나 별별 사람들이 다 있는데... 방금 저한테 뭐, 회사 안 다녀본 것 같다고 말하셨는데. 솔직히 제 입장에선 좀 우습죠.


말을 끝낸 대표2가 더없이 해사한 미소를 짓는다. 이 이상 선 넘는 공격은 하지 않으려 했던 나는 말문이 막힌다. 아. 뭔가 열받는다.





대표2의 장난은 계속됐다. 하루는 전 회사를 잠시 들렸다 출근한 (차려입은) 내게, 대표2가 웬일로 칭찬을 해왔다.


- 옷 예쁘게 입으셨네요?


하지만 기분 좋을 새를 주지 않고 바로 긁는 대표2.


- 누가 보면 데이트라도 하고 온 줄. 옛날 독립군 같고 아주 보기 좋아요.


나는 인내심을 갖고, 애써 웃으며 답했다.


- 네~ 구찌 가디건 좋아하시는 대표님 취향이 아니라면 다행이네요.


살짝 언짢은 표정을 짓던 대표2는 공용 작업대 위에 올려진 초콜릿 더미를 보고는 물었다.


- 이건 또 뭐예요?


- 전 회사 팀장님이 대표님들이랑 나눠먹으라며 주셨어요. 피곤할 때 드세요.


- 아.


대표2는 무표정하게 자리로 돌아갔다. 고맙다는 말은 해야되지 않니. 나는 목소리를 조금 높여 말했다.


- 고맙긴요 뭘!


말이 끝나기가 대표2의 정색이 돌아왔다.


- 안 먹을 건데요?


내가 입이 떠억 벌려진 채로 벙찌자 대표2는 빵 터진다. 그제야 고맙다고, 농담이라고.


이처럼 나는 대표 2의 '농담'에 지지 않으려고 자꾸 받아치긴 하는데, 뭔가 계속 말리는 기분이었다. 시작하지도 않은 싸움에서 연달아 지는 모양새였다. 카톡 답장이 늦기라도 하면 대표2가 비꼬며 물어왔다.


- 어디 미국이라도 가셨나 봐요?


대표2가 유부남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서였다.




친구들이 지난밤 아기가 앓은 태열에 마음을 졸이는 동안, 나는 대표2에게 쌍비읍 글씨체를 놀림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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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수하다 발견한 불량품은 따로 메모지에 적어두는데, 그때 내가 적었던 글씨체가 대표2 눈에 띄었나 보다. 어지간히 내가 편해졌는지 초딩이냐며, 저렇게 쌍비읍 쓰는 30대 처음 봤다며 한참을 놀리던 대표2. 대충 받아친 뒤 얼른 퇴근하려는데 뜬금없는 혼잣말이 들려온다.


- 아, 고기 먹고 싶다...


나는 별다른 대꾸 없이 사무실을 나섰다. 그런데 5분쯤 지났을까.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카톡이 온다.


[어디예요? 아직 멀리 안 갔으면 고기 먹을래요?ㅋㅋ]


별다른 대꾸를 했어야 하나. 대표2와의 1:1 식사는 불편해요. 고기도 원래 안 먹는다고요. 이렇게 말을 할 수 없는 나는 최대한 서로 민망하지 않을 멘트를 한참 동안 궁리하다, 금세 포기하곤 되는대로 답장을 보냈다.


[ㅠㅠ다음에 대표1님과 같이 밥 먹어요!]


나는 버스에 오르며 생각했다. 대표들과 이제 그만 친해져도 될 것 같다고. 특히나 대표2와는 보다 더 명확하고 뚜렷한 선을 긋는 게 맞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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