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과 왜곡 사이
안녕하세요! 카라멜팝콘입니다!
도대체 이 놈의 더위는 언제쯤 사그라들까요ㅜㅜ 저녁엔 더위 이제 한풀 꺾인다는 뉴스가 나오는데, 낮에는 폭염특보 뉴스 뜨는게 며칠짼지..
어쨌거나 오늘은 <덕혜옹주>를 들고 왔습니다. 손예진 박해일 주연인 영화로 개봉 전부터 역사 왜곡 문제로 시끌시끌했었는데요, 지금도 여전히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폭염으로 영화관 피서가 늘면서 <덕혜옹주>도 폭염특수를 누리고 있기는 합니다.
아무래도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한 영화인데다, 덕혜옹주 자체도 알려진 바가 많이 없기 때문에 사전에 덕혜옹주에 대해 알아볼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꾼 조선 황실의 사실상 마지막 공주로 알려져 있죠. 옹주라는 단어는 왕의 서녀에게 쓰는 말이라고 합니다. 정식 왕비가 아닌 후궁에게서 낳은 딸이라는 의미죠.
덕혜옹주는 고종이 환갑 때 얻은 늦둥이 딸로서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일제에 강압적으로 끌려가 강제로 결혼하고 나중에는 정신병을 얻은 채 37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오게 되는 가련한 여인입니다.
영화에서 손예진과 박해일의 신들린 연기는 압권입니다.
손예진은 전작 <비밀은 없다>에서도 광기의 연기를 선보이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었는데, 이번에는 그보다는 좀 더 차분하면서도 역사를 정통으로 마주하는 힘없는 소국의 공주를 연기합니다.
특히 일본 패망 후 시모노셰키 항에서 보여주는 미친 사람 연기는 손예진의 인생 연기 중 하나라고 생각되니 눈여겨 보시길 바랍니다.
덕혜옹주를 곁에서 항상 지켜주는 보디가드 같은 역할로 나오는 김장한(박해일)의 연기도 놓쳐서는 안 될 부분입니다. 박해일의 절제된 연기톤도 영화에 잘 어우러졌고,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아도 박해일의 연기만을 통해서 옹주에 대한 연민도 충분히 느껴졌습니다.
악역으로 덕혜옹주는 물론 조선 황실의 가정사에 사사건건 개입하는 한택수(윤제문)도 정말 얄밉게, 또 명성에 걸맞는 연기를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덕혜옹주의 인생 전반에 걸쳐 장애가 되는 인물이 한택수 한명 뿐이라는 겁니다. 많은 에피소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사건의 끝에는 한택수가 있죠. 옹주를 일본으로 보내는 것도, 교육을 시키는 것도, 결혼을 주선하는 것도, 추적하는 것 등등 한 두명 정도 일본 측 인물을 넣는 것도 스토리의 다양성을 위해서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윤제문과 티격태격(?)하는 인물로 덕혜옹주의 시녀인 복순(라미란)이나오는데요, 윤제문과의 케미가 소소한 웃음을 주곤 합니다. 미란 누님은 참 보면 볼수록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배우인 것 같네요.
영화에서 또 돋보이는 인물 중 하나로 이우(고수)가 있는데요, 일단 고수가 너무 잘생겨서 빛이 납니다. 크레딧에서 나오는 이우 왕자의 실제 사진 역시 매우 잘 생겼더군요. 닮은 꼴이라 감독님이 직접 캐스팅을 주도했다고 합니다. 고수의 다부진 몸과 카리스마 연기를 길게 볼 수 없어서 아쉬울 정도로 임팩트 있었습니다.
대체적으로 배우들의 연기가 훌륭한 영화이지만 뮤지컬과 연극에서 종횡무진하고 있는 정상훈(복돌)의 연기는 뭔가 어색한 감이 있습니다. 뮤지컬 발성과 연극식 연기가 아직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런 발성과 연기가 어울리는 영화도 있지만 <덕혜옹주>는 보다 차분하고 절제된 연기 톤이 더 적절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정상훈의 연기는 분명 아쉬운 부분이 있던 것은 사실입니다.
제가 다른 때보다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 보다 상세하게 이야기한 것은이 영화는 이것이 전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실존 인물의 삶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스토리에 큰 반전이라든지 임팩트가 없으며, 어떻게 보면 밋밋하기까지 할 정도입니다.
<덕혜옹주>는 영화의 방향을 명확하게 설정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조선 황실의 마지막 자제들이 마지막 자존심으로 일제에 대항하는 모습을 통해 민족적 자긍심과 애국심을 고취시키기에도 부족하고,
덕혜옹주와 김장한의 로맨스를 다루고 있는 것도 아니며,
비극의 역사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가녀린 여인의 삶을 집중 조명하는것도 아닙니다.
여러가지를 실존 인물과 실제 역사에 대입해 픽션으로 엮으려다보니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약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더군다나 현재 <덕혜옹주>가 비난에 직면하고 있는 부분은 덕혜옹주의 지나친 미화에 있습니다. 덕혜옹주는 유치원 시절부터 일본식 교육을 철저하게 받아왔으며 학창시절도 일본에서 보내고 일본인과 결혼해 일본에서 가정을 꾸려온 여인입니다.
아버지인 고종이 일제에 의해 독살당했다고 믿고 있지만, 단지 이 사실 하나로 일제에 대해 적개심을 품었는지, 두려움과 불안감을 가졌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거기다 사료를 통해서 보이는 덕혜옹주는 소극적으로라도 독립이나 애국에 대한 제스쳐를 취한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일제를 피해 영친왕과 함께 망명을 임시정부로 망명을 시도한다거나 조선인 강제징용 노동자들에게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온다'는 눈물의 연설을 했다고 하는 것은 명백한 미화입니다.
역사와 실존인물을 다루는 영화는 어느 정도 사실에 기반한 이야기를 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픽션을 가미하고 싶었다면 덕혜옹주는 적합한 인물은 절대 아닙니다. 너무도 다른 외모는 물론이며 굳이 조선인 여자를 주인공으로 하고 싶었다면 처음부터 아애 픽션으로 가는 편이 나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고종이나 순종에게 사실은 숨겨진 딸이 있었다는 식의 설정이 오히려 더 설득력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네요.
잊혀진 조선 황실의 자제들을 재조명하고 그래도 조국을 위해 뭐라도 했다고 믿고 싶은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면 영화에서도 등장하는 이우 왕자가 훨씬 적합한 인물이었을 겁니다. 이우는 실제로도 독립운동과 연결되어 있는 인물이기도 하고 히로시마에서 원폭으로 사망하는 정말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던 인물이기도 하기 때문이죠.
<덕혜옹주>는 지난 봄 대한민국을 들끓게 했던 영화 <귀향>과 비슷한 방향으로 갔어야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일제에 강점당한 힘없는 조선의 마지막 공주로서 어쩔 수 없이 역사의 한 켠을 짊어져야 했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불안함, 두려움, 죄책감 등이 뒤엉킨 삶을 살아가다 결국엔 미쳐버리고 말았던, 혹은 미쳐야만 살 수 있었던 가녀린 비운의 여인의 인생을 담담하고 차분하게 보여줬으면 어땠을까요? 굳이 이런 비판에 시달릴만큼 픽션을 가미하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공감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요?
미디어로서 영화, 영상이 가지는 힘은 상상 이상입니다.
사람들은 태조 왕건, 여인천하, 정도전, 광개토태왕 등 사극을 통해 역사에 관심을 갖거나 알게 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나중에 사람들이 덕혜옹주를 정말 독립투사로 기억하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듭니다.
일제강점기로 넘어가는 한국 근대사에서 조선왕조 말미의 책임은 절대적입니다. 조선황실이 일제에 의해 호의호식 한 것도 맞고, 독립에 적극적인 제스쳐를 취하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일제에 의해 눈과 귀가 가려진 채 살아야 했던 조선황실의 어린 자제가 과연 백성과 조국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었을까요? <덕혜옹주>의 설정대로 옹주가 일제에 대하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아버지인 고종을 위한 개인적인 복수심은 아니었을까요?
광복 후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게 된 이상 조선황실은 그야말로 역사가 되었습니다. 일본이나 영국처럼 입헌군주제도 아닌 우리나라에서 독립을 위해 어떤 액션도 취하지 않은 대한제국황실의 자제에 대해 있지도 않았던 사실을 픽션이랍시고 넣어 미화까지 해가면서 감동팔이를 하고 이들을 기억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영화의 완성도는 좋은 편이라 더 아쉽습니다. 덕혜옹주의 있는 그대로의 삶을 보여주었더라도 가슴 아팠던 일제시대의 조선을 느낄 수 있었을텐데, 과도한 미화로 오히려 불편했던 영화입니다.
(5개: 재미+작품성=어머, 이건 꼭 봐야해!)
(4개: 작품성or재미=딱히 싫어하는 취향이 아니라면 보면 좋을 영화)
(3개: 무난하게 볼 수 있는 킬링타임용)
(2개: 취향을 심하게 타거나 굳이 안 봐도 될...)
(1개: 왜 만들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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