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 언어 노출 모임의 재구성
"말할 가치가 있는가?"
"분명하게 말했는가?"
"아름답게 말했는가?"
파커 J. 파머의 아내가 그의 초고를 읽을 때 고려하는 세 가지를 놓고 볼 때 이 글은 몽땅 잘려나가야 마땅하다. 그러나 나와 같이 영어 노출 모임을 구상하고 실행해 나가고자 하는 누군가에게는 반면교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모임의 짧고 지난한 역사를 더듬어 기록해 본다.
문을 두드리는 모든 이들을 반기고 싶었다.
그러나 영어 수준이나 영어 발화 실력과 마음의 준비 정도가 천차만별이었다.
"영어를 못하는데.. 들어가도 될까요?"
영어로만 말하는 모임이라고 설명을 적어놓았는데도 이런 문의를 주실 때에는 여러 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1. 영어를 못한다는 건 한국 문화에서 겸손의 표현일 수 있다.
2. 그동안 영어로 말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말할 수 있을지 본인 스스로도 잘 알지 못한다.
3. 영어 회화는 초급자 수준이지만 정말 하고 싶고 열심히 할 테니 하게만 해주었으면 좋겠다.
보통을 세 번째 상황인 경우가 많았다. 나 역시 영어 중급자에 겨우 미치는 정도이기 때문에 다른 분들의 영어 레벨테스트를 할 수도 없고 이런 질문을 받으면 꽤나 난감했다.
모임의 취지를 충분히 설명했으니 알아서 스스로 실력과 마음의 준비가 된 분만 신청하겠거니 했지만,
실제로 그걸 본인도 잘 모르겠다며 내게 허락을 구해오는 경우가 많았다.
마음이 불편했다. 딱 잘라 초급자는 안된다고 말할 수도 없었고, 그럴 자격도 없다고 느꼈으며,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게다가 초반에는 가까운 지역 내에서 영어로만 대화 가능한 사람을 찾기가 너무나 어려웠기에 더욱 그랬다.
그래서 초반에는 일단 "오세요~ 오세요~!" 해버렸다. 그랬더니 한 번도 영어로 말해본 적 없는 분, 학교 졸업 후에는 한 번도 영어를 해본 적이 없는 분도 계셨다. 그러다 보니 영어 노출 모임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긴 호흡으로 '영어 스터디 모임'을 별도로 꾸려야 했고, 마치 영어 강사가 된 듯 매번 수업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모임에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다. 매주 읽을 책의 분량과 공부를 안내해 드리고 체킹 해야 될 것 같은 느낌. 내가 원한 모임은 이런 게 아닌데.. 모임이 산으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어 대화가 가능한 분들이 모이고 나서도 한국어로만 대화하는 분들이 계시니 자연스럽게 조금 생각이 안나는 단어를 한국어로 하는 것으로 시작해 아예 한국어로 대화를 해버리게 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주 1회, 단 1시간이라도 계속 살아있는 소통의 도구로서 영어를 노출해주고 싶다'는 꿈은 너무나 요원하게 느껴졌다. 모두가 더 편한 언어로 소통하고자 하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본능이었으므로, 그걸 차단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마치 외국 여행을 왔을 때처럼 영어가 아니면 안 되는 상황을 만들어야 했는데, 모두 한국인이고 한국에서 이중언어상황을 만들다 보니 쉽지 않았다. 모임원의 강한 의지와 그걸 뒷받침할 규칙과 그에 대한 동의가 필요했다.
접점을 찾기 어려워 일단 모임을 이분화했다. 영어로만 대화가 가능한 중급자 이상의 모임과 한국어로 혼용하여 대화가 가능한 초급자 모임이었다. 2개의 모임을 분리 운영하다 보니 모임의 횟수도 많고, 공지와 운영에도 에너지가 너무 많이 들었다. 육아독립군인지라 안그래도 없는 시간 내에 이중 언어 교육에 대해 공부해 나가면서 다양한 연령과 지역을 고려하고 아이들의 반응을 관찰해 나가면서 운영 방법을 계속해서 수정해 나가야했다.
중급자들과의 첫 모임은 엄마들끼리의 카페 영어 수다 모임, 이름하여 'Mom only' time! 달콤했다!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브런치를 즐기며 다른 언어로 소통하고 있자니 해외여행에 온 것 같았다. 반복되는 육아 일상 속에서 얼마나 꿈같은 시간이었는지!
초급자들과의 첫 모임 역시 카페에서였다. 서로 다른 니즈를 확인하고 조율해 나가면서 교재나 장소를 의논했다. 그리고 두 번째 모임은 대부분 아이 없이 도서관에서 내가 강의처럼 진행을 했다. 영어에 강한 동기를 얻었다고 긍정적인 피드백을 많이 주셨지만, 개인적으로는 부족한 실력으로 소화되지 못한 지식을 떠들고만 온 것 같아 아쉬움과 부담감이 있었다. 영어 공부 모임은 어디에나 있을 것이었고, 내가 원하는 모임은 아니었다.
중급자들과의 두 번째 모임은 아이들과 함께 키즈카페에서 만났다. 아이들은 신나게 놀고 우리는 서로 영어로 대화하거나 서로의 아이들에게 영어로 말을 걸어줬다. 걷고 뛰기 시작한 Toddler 이상의 아이들은 이미 활동 반경이 넓어서 모두가 한 곳에 모여서 대화하는 시간은 전체의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었다. 엄마도 아이도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다른 언어로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으로 만족했다.
초급자들과 중급자가 한데 어우러진 세 번째 모임은 아이들과 함께 빈 공간을 무료로 대관하여 진행했다. 어른들끼리 대화를 한 후 그림책도 읽어주고, 노래도 불러주었다. 놀거리가 아무것도 없는 너른 공간에서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쫓아다니며 영어로 놀아주었다. 영어책을 읽어줘도 아직 낯설어서인지 잘 집중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모임이 끝나고 "오늘은 좀 학습적이었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어책을 읽어주고, 노래를 불러주고, 영어로 놀아주는 것이 그리 자연스러운 노출은 아니었고, 영어 놀이와 수업 그 중간 어디쯤이었다.
그러다 중급자들과의 네 번째 모임은 한 모임원의 가정에서 진행하게 되었다. 와! 꿈꾸던 영어 공동 육아 모임 그대로였다! 엄마들끼리는 즐겁게 영어로 수다를 떨고, 아이들은 각자의 놀이에 심취해 놀잇감으로 자유놀이를 하며, 집이다 보니 편히 먹이고 씻기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집에서의 영어 공동육아는 감염병과 아이들의 컨디션 등의 변수로 취소가 잦을 수 밖에 없어서 정기 모임을 안정적으로 가져가기 어려웠다.
초중급자의 다섯 번째 모임은 도서관의 협조를 얻어 진행되었다. 다른 이용객들에게 불편을 주는 건 아닐지, 도서관에서는 조용히 해야 한다는 규칙을 가르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고민이 되어 우선 아이들이 더 커서 준비가 될 때까지 잠정 중단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도서관에서의 영어책모임이라는 엄마의 환상이 무너진 순간이었다. 우리가 도서관 전체를 대관할 수 있을 때, 다른 이용객들의 없는 작은 도서관일 때만 가능했는데, 그런 도서관은 주차가 편하지 않았다. 다양한 지역에서 모임원이 오는 상황이었기에 공간의 분리와 무료 대관 가능 여부, 주차의 편의성 등을 모두 만족하는 장소를 찾는데 한참을 헤매었다.
돌고 돌아 결국 정기 모임 장소는 지역 내 저렴하고 쾌적한 키즈 카페로 결정했다. 드디어 3박자가 맞는 곳을 찾았다! 그리고 운이 좋겠도 지역 내 외국인 엄마들도 모임에 함께하게 되었다. 정말로 영어로만 대화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처음에는 한국인들과 말할 때보다 영어 말하기에 좀 더 소극적이게 되기도 했다. 나의 경우 듣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런데 아이가 정말 너무나 좋아했다. 어쩌다 보니 영어 회화 연습과 공부가 정말 필수적인 상황이 된 것이다.
영어 모임에는 정말 멋진 분들이 많아 배울 게 많다. 소신 있는 육아 철학을 지니신 분들, 영어 학습보다는 자연스러운 노출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이다 보니, 좀 더 아이에게 맞춰 천천히 나아가는 걸 기다릴 수 있는 분들이 모여 서로의 재능을 나누며 영어 품앗이를 하고 있다. 요리를 잘하시는 분은 쿠킹 클래스를 열어 집으로 모임원을 초대하기도 하고,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영어 노래를 주제로 모임원을 초대한다.
지금은 분산된 에너지를 한데 모으기 위해 모임을 일원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쉽지 않다. 확신도 부족하다. 어쨌거나 안정적인 장소와 요일을 정해두고, 나머지는 누구나 비정기적인 모임을 주최할 수 있도록 품앗이 모임으로서의 회칙을 세분화하고 나니 모임이 안정감을 갖고 알짜배기 회원을 조금씩 늘려가고 있다.
찾아보니 지역 사회로부터 무료 공간 대관 및 지원금 등을 받을 수 있는 기회도 많았다. 이렇게 함께 같은 지향점을 가진 부모들끼리 지원을 받아 모임을 만들어 운영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누군가 우리 모임의 비체계성과 무계획성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무계획이 계획이며, 자연스러운 노출이 우리 모임의 취지'라고! 아이들에게 인풋과 아웃풋을 학습적으로 유도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조금씩 '주제'를 가진 모임이 시도되고 있고, 이것이 프로그램까지는 아니더라도 흐름을 갖고 체계화될 수도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다.
조금 번거롭고 고되긴 하지만 혼자 가는 것보다 확실히 더 오래 멀리 갈 수 있다. 아이는 영어 거부를 지나 매일 영어 노래를 즐겁게 듣고 신나게 부르며 끝없이 영어책을 가져와 읽어달라고 한다. 좀 더 자신감 있게 영어로 가끔 말을 걸어주며 아이 아빠와도 영어를 주제로 다양한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불러주는 마더구스 노래와 영어책에 나오는 단어나 스토리 등을 두고 이런저런 얘기를 이어갈 수 있었다. 공통된 관심과 대화 주제가 오랜만에 생겼다! 엄마가 신바람이 나니 아빠도 아이도 함께 덩달아 유쾌하고 즐거운 시간이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
가장 감사하고 신기한 변화는 아이에게 한국어로 건네주는 말도 훨씬 풍부해졌다는 것! 사회적으로 단절되었던 엄마의 언어 중추가 활성화되고 언어적 감각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가이드라인에 따라 매일 정해진 시간, 정해진 장소에서 일정하게 영어로 말을 걸어줘야 할 것만 같은 압박감이 있었는데 다 갖다 버렸다. 아이가 영어책을 가져오는 순간, 영어노래를 틀어달라고 하는 순간이 바로 영어로 말을 하는 순간인 것이다! 완벽하지 않기로 했다.
확실한 건 우리 가족은 모두 함께 영어를 즐기는 중이다. 새로운 언어와 문화를 가족이 함께 공유하는 경험. 그로 인해 활력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고도 넘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