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간, 사람의 세상에 신이 없는 시기
1월
대한
겪어야 비로소 알 수 있는 진심
감기에 걸렸습니다.
목이 잠기고 기침이 나지만
병원에 갈 만큼 아프지는 않아요.
돌이켜보면 매년 이즈음 감기를 앓았고
앓고 나면 한 뼘 더 봄에 가까워집니다.
잘 지내고 계신가요.
대한
24 절기의 마지막 절기입니다.
‘큰 추위’라는 뜻이지만 오히려 소한보다 춥지 않아서
‘소한의 얼음이 대한에 녹는다’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작은 추위에 얼어붙었던 세상이
커다란 추위에 녹아내립니다.
자연은 크다고 강하거나
작다고 약하지만은 않은 걸까요.
소한 다음 대한,
작은 것 뒤에 큰 것을 두는 옛사람의 마음을 생각합니다.
신구간을 들어보셨나요. 제주도에서는 대한 후 오 일째부터 입춘 삼일 전까지를 신구간이라 부릅니다. 옛 신은 하늘로 올라가고 새로운 신은 아직 지상에 내려오지 않아서 사람의 세상에 신이 없는 시기. 그때에는 불길한 날도 길한 날도 따로 없기 때문에 이사와 집수리를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신이 없는 일주일.
사람들은 분주히 움직입니다.
새로운 날을 위해 집을 고치고 짐을 옮깁니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주고받는 인사에 신의 몫은 없습니다.
이사를 자주 다녀서 고향을 잊었습니다.
어딜 가도 내 집, 내 고향 같다고 말한 적도 있지만
사실 고향은 기억에 없습니다.
기억에 없는 것을 잊을 수는 없겠지요.
사실 내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나조차 나만의 것은 아니고
없는 사람이라면 잊을 수도 없을 텐데
여기저기 묻어서 존재합니다.
나는 말합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선생님은 묻습니다.
좋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요?
말을 하면 할수록 더럽히는 것만 같습니다.
작은 것을 부풀리고 큰 것을 부서트립니다.
괜찮다고 말하기 위해 괜찮지 않음을 늘어놓고
대범한 척하려다가 작은 마음까지 들켜버릴 때
아프지 않다고 말하지만
기침과 재채기는 숨길 수 없습니다.
드넓은 바다와 드높은 산 앞에서
나는 한없이 작은 존재,
바다와 신은 나에게
강함을 뽐낼 필요 없겠지만
산이 들을 수 없을 때에야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친절이 두렵습니다. 버려질 것 같아서요. 행복한 시간을 뒤덮는 두려운 그림자. 언제나 뭔가 잘못한 것만 같아서요. 잘못했다면 벌을 받을 테니까요. 결국 실망할 거야. 이미 실망했겠지. 그래요, 나는 모순덩어리입니다. 앞뒤가 맞지 않거든요. 맞아요, 나는 아픈 사람입니다. 감추고 있으니까요. 다가오지 마세요. 쓰다듬지 마세요. 겁이 나면 물어버릴 테니까. 그래도 웃을 수 있겠어? 실망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부디 나를 고쳐주세요. 포기하지 말아 주세요. 나아질 수 있다고, 아니 지금 그대로 충분히 좋은 사람이라고
시험하고 싶어서 달려드는 존재는 언제나 작은 나.
커다란 당신은 그저 바라보고 있네요.
신이 보고 있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아픈 사람이 있습니다.
겨울의 감기는 자연스러운 일.
그러니 조금 더 아플 수 있다고 말해주세요.
아직 신이 오지 않았으니 천천히 나아도 된다고
아무도 너를 판단하지 않으니
당분간 깊은 꿈에 파묻혀도 좋다고
너의 회복에 신의 몫은 없을 거라고.
좋은 사람에게 얼룩처럼 나를 묻히고 다닌 적이 있습니다.
묻어 있으면 나도 그처럼 좋아질 것 같았거든요.
그래요, 아마도 나는 기억되고 싶었나 봅니다.
커다란 추위는 얼음을 녹이며 봄을 향해 걸어갑니다.
작은 나는 여기 잠시 머무를게요.
조금 더 아픈 다음 나아가겠습니다.
겨울의 한가운데서 겨울을 그리워합니다.
- 최진영 '어떤 비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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