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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율 Jun 09. 2024

엄마의 슬픈 역전

아빠 위로

아빠가 처음 젖을 물렸다.

아빠가 처음 젖병도 물렸다.

아빠가 처음 트림을 시켰다.

아빠가 처음 아이를 안았다.

아빠가 처음 기저귀를 갈렸다.

아빠가 처음 속싸개를 해줬다.


뭐든 아빠가 처음이었고

뭐든 아빠가 엄마보다 잘했다.


임신 기간부터 육아용품을 엄마보다 더 잘 알아본 후 선택했고

엄마는 아이를 배고 있을 뿐이지

다른 모든 준비와 보살핌은 모두 아빠가 다 했다.


엄마는 그런 아이 아빠에게 의지했고 

그런 삶이 계속될 줄 알았다.

다정한 아빠 덕분에

우리 가족은 다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짧은 출산휴가 기간이 끝나고 

아빠는 가족을 위해 일터로 돌아갔다. 

누구보다 아쉬운 건 아빠였다.

회복되지 않은 엄마와 아가를 단둘이 두고 발을 떼기 어려워했다.


뭐든 서툰 엄마가 잃어버린 생활 근육을 되찾아가며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달았다.


이제 아이의 모든 처음은 엄마가 되었다.

아빠는 사진과 영상, 엄마의 말을 통해서

아이의 처음을 만난다.

엄마가 시행착오를 거치며 쌓아간 노하우들을

아빠에게 전수하기 시작했다.

엄마의 잔소리가 시작된 것이다.

집은 엄마의 일터가 되었다.

아빠가 오면 일터에서 풀지 못한 숙제들을

아빠에게 내어 준다.

아빠는 퇴근하고 지쳐 집에 돌아오면 

엄마의 잔소리와 숙제가 쏟아진다.

두 번째 직장으로 출근하는 아빠.

가족을 위해 못다 한 일은 남겨두고 

회식과 야근을 마다하며 칼같이 퇴근한 아빠를

엄마는 챙겨줄 힘이 남아있지 않다.

아빠는 지친 엄마와 아이를 챙기며

자신의 지친 몸까지 챙긴다.

누군가 엄마나 아빠, 아이를 잠깐씩만 돌봐준다면 한결 나을 것 같은데

양가나 어린이집의 도움 없이 

오롯이 부부 두 사람의 힘으로 아이를 기르면서

이렇게 엄마와 아빠는 지쳐가고

아빠의 몸에는 자꾸 이상신호가 켜졌다.

아빠는 매일 하던 운동을 멈춘 지 오래다.

잠도 부족한데 운동까지 할 여력은 없다.

주말에 하루 늦잠을 자는 것 외에 

아빠에게 휴식은 없다.

밤에 깬 아이의 잠을 연장하는 것도 아빠의 일이다.

아빠가 도무지 어쩔 수 없을 때에만

엄마가 출동한다.

젖 물려 재우는 밤수유를 끊기 위해 아빠는 아이의 밤을 지킨다.


모든 처음은 분명 아빠였는데 

이제 엄마의 독차지가 되었다.

뭐든 아빠가 더 잘했는데

이제 엄마가 더 잘하는 게 많이 생겼다.


엄마의 역전승!

너무나 슬픈 역전승이다.

아빠도, 엄마도 

모두에게 슬픈 결말.


신이시여,

아니 저기 저기 윗분들 들리시나요.

대한민국에서 두 사람이 아이를 기른다는 것이 이렇습니다.

좋은 아빠가 된다는 일이 이렇게 힘듭니다.

가정보육을 한다는 것이 이렇게 고됩니다.

아빠가 이렇게 잘 도와줘도 힘듭니다.

아이를 하나 더 낳으라고요? 못합니다. 

둘이서 둘을 키우는 건 못해요.

둘이서 넷을 돌보는 건 못해요.


우리는 좋은 부모가 되고 싶습니다.

3년 가정육아, 2년 모유수유, 2년 무염식

정말 권장되는 건 다 하고 싶지요.

기관의 도움을 받기로 마음먹으면

하나도 지킬 수 없습니다.


아이의 모든 처음을 이제 

어린이집 선생님들께 내어드려야 합니다.

아빠에게도, 엄마에게도, 아이에게도

모두에게 못내 아쉬운 결말.


이제 아빠에게도 엄마에게도 치우치지 않도록

사회로 내보내야 할 때가 오고 있음을,

기다리던 입소 순번 도래 연락을 받고도

하나도 기쁘지 않은 날에,

우리가 아이의 모든 처음을 지켜냈던, 함께했던 

기나긴, 찰나의 시간들을

기억하고 싶어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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