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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나무숲 Jan 16. 2017

너의 서명은

거 봐요, 얘도 웃잖아.

어른이 됐다고 느끼게 됐던 지점들이 있는데, 초면인 사람을 대할 때 '~~ 씨'라고 부르거나 -나 역시 그리 불리게 되거나- 내 이름으로 된 카드를 발급받고 "서명"란을 마주했을 때다.


워낙 특징 없는 이름에 대한민국에서 발에 채고 채인다는 그 흔한 성씨를 가진 탓(?)에 내 서명 역시 별다를 게 없었다. 그저 좀 어른스러운 글씨체로 빈 종이에 몇 번이나 반복해 흘겨 쓰면서 나름의 서명을 만들어 냈다. 어쩌고저쩌고 하는 조항 아래 동의한다 서명하고, 나 임을 증명하노라고 서명하고, 그렇게 내 성인의 서명이 쌓여갔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가장 자주 마주하는 서명란, 그러니까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맞으시죠?"에 내가 주문한 게 맞아요, 여기 카드요. 할 때 쓰는 서명은 다르다. 나는 점 두 개와 곡선 하나로 나 임을 엄숙히 선언한다. 스마일이다.


"초딩이냐? 스마일이 뭐야 스마일이."

나의 채신머리없음을 지적하는 친구들의 타박에도 굴하지 않고, 나는 스마일 서명을 고수해 왔다. 그리고 가끔, 그 이유를 확인받을 때가 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전자식 사인 패드에 스마일을 그려 넣는 나를 보며 오랜만이라고 알아봐 주는 종업원도 있고,

"서명이 되게 독특해요 ^^"

라며 한 번 더 웃어주는 종업원도 있다.


이것으로 이유는 분명해졌다. 그저 있어빌리티 가득한 사인이 아니라, 웃음으로 나를 증명하고 싶었을지도, 혹은 누군가 한 번 더 웃어주길 바랐던 유치한 마음에서였는지 몰라도. 아무튼 나는 '~~ 씨'와 '신용' 등으로 점철되는 어른의 행동양식에서 조금 벗어나, 생경한 우리의 만남이 조금이라도 따뜻해지길 바랐던 거다.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라는 물음은 어른의 세계에서 다시 말해 '너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느냐'는 무시무시한 협박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기에. 하지만 적어도 소소한 일상의 만남에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에. 무엇보다 미소로 나를 선언해도, 괜찮지 않나?


보조개가 생겨서 웃는 걸 창피해했던 여자애가 어른이 되며 고안해 낸 서명 치고는 꽤나 모순적이긴 하지만. 이렇게라도 회색의 으른 세상에 피식, 훗, 같은 웃음이라도 많아졌으면 하는 나이브한 생각에서, 삼십 대가 돼서도 또 이러고 있다. 진짜 우리 웃을 일이 별로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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