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대나무숲 Jan 19. 2020

매일 지문만 닳고 닳네

겨울엔 우르르쾅쾅 콰지직 하는 소리들이 자주 들린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영역들이 있다. 얼어붙은 정수리에 무언가 콕, 수직하강으로 떨어져 쪼르륵 하고 쾅 갈라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다.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가지를 보며 ‘아, 저 나무는 오늘도 저렇게 허공에 손을 뻗어 부단히 뭔가를 뒤져 찾고 있구나. 그러느라 자기가 벌거벗고 있단 것도 잊었구나(겨울에 한하여)’ 하는 생각은 자주 하는 편이다.  겨울이 되니 손등이 자주 트고 갈라진다. 피가 흐를 정도였던 적도 있었는데 그냥 지금은 손 관절이 접히는 부분마다 건조한 틈만 벌어져 있고, 피는 흐르지 않는다.


매일 손을 가장 많이 쓰며 산다. 아니, 지문을 가장 많이 쓴다. 같이 있으면서도, 그런데, 손등의 틈들은 매일 더 넓어지고 깊어지고. 그런데 피는 흐르지 않고. 손가락의 지문은 더 넓어지지도 깊어지지도 피는 당연히 흐르지도 않고 그냥 닳고만 있다. 무엇을 위한 풍화작용일까 생각해보면 기억에 남는 문장들이 별로 없어 슬프다. 그렇다고 애지중지 뭔가를, 누군가를 쓰다듬은 것도 아니고 그냥 닳기만 한다.


매일 손을 내밀어 찾는 것은 질투일까 사랑일까 망각일까 의무일까.  피도 나지 않고 닳기만 하고 게다가 보기 흉해기지만 한다면 내 손은 무슨 의미일까. 무섭다. 정신없이 무언가를 찾고, 그러느라 나도 모르는 새 쩍쩍 피가 나고 갈라져 봐야 내 손의 의미를알게될것만같다.


그럼 잠깐 손이 가는대로 내버려 둬 볼까 - 어느 흐릿한 형상의 사람이 또렷하게 보이는 누군가를 마주치거나 조용히 관찰할 기회가 생기면 글을 썼다고 한다. ’턱을 괴고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5월 이었고, 창 밖에서 바람이 초록으로 불어 들어왔다.’ 라든가 ‘쓸쓸한 눈인사만 하고, 멀어져 갔다.’ 같은 글이었다고 한다. 그리곤 쓴 글들을 보여주었는데, 누군가는 무척 기뻐했다고 한다. 그 글들이 모두 영수증 뒷면이나 쓰다 남은 냅킨같은 얇고 무용한 것들에, 도.무.지. 알아볼 수 없는 모양으로 휘갈겨 써있어서 특히 기뻐했다고 한다.


아무런 말을 새벽 내내 손으로 문질렀던 날들이 셀 수없이 많았다. 무슨 문장들이었는지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내가 참으로 열심히 쓰고, 또 쓰고, 지우고, 몽상하고, 괴로워했던 것만은 잊히지 않는다. 또 잠깐 마음대로 내버려 둬 볼까 - 무례하거나 오만하거나 우울하거나 투덜대거나… 그래, 다 좋다. 물색없는 것만은 참을 수가 없다. 물색없으려 노력하는 것도 싫다. 물색없는 것들 사이에선 물색없지 않은 것들이 무례하거나 오만하거나 우울하거나 투덜대는 것들이 되어 어째서 물색없지 않냐며 물색없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아느냐, 물색없는 것을 향한 찬사를 물색없지 않지 않은 듯한 태도로 듣는 척 해야하며 그러다가… 이쯤 해야겠다.


내뱉고 나면 1000% 후회할 걸 알면서도 참지 못하고 내뱉는 자기파괴적인 정직함이 좋았다. ‘너는 참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모양으로 솔직하구나’ 그 모양은 어떤 모양이었지? 손을 들어 손바닥을 들여다 본다. 보이지 않는다. 보일 리가 없다.


피가, 흐르질, 않는다. 지문은, 닳아, 없어지고만있다. 손등만, 계속, 못생겨져 간다. 민둥민둥 미끄러울 손으로 무엇을 뒤지고, 쥐어야 하나.


매거진의 이전글 너의 서명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