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은 책임감이 없는 사람이다.”
위의 말은 말이다.
내가 한 말이 아니다.
유명한 유튜버님이 하신 말씀이다.
구독자와 팔로워를 많이 거느린, 그만큼 돈도 많이 벌 것 같은 그가 한 말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는 세상이니 동의는 하지 못하고 흘려들었다.
본인은 우울증으로 잠시 고생을 한 적이 있다.
간호사일을 그만두고 공시생활을 2년 가까이했다.
사람도 만나지 않고 그저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지금의 행복을 잠시 접어둔채, 누가 누가 의자에 오래 앉아있나를 겨루는 경기장에 뛰어들었다.
한번 떨어진 시험은 나에게 두려움을 심어주었다.
만약 내가 또 떨어진다면 다음 해부터는 뽑는 인원이 대폭 줄고, 시험과목도 바뀌고 여러모로 나에게 불리하다.
흔히 지금이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공부하라고들 하는데
나에게는 정말로 이번이 끝이었다.
이런 조바심과 압박감이 나를 짓누르기 시작했고 점점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호흡이 가빠오르기 시작했다.
심지어 자려고 누워있는 가장 안락한 시간조차도 전력질주 한 것처럼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편히 잘 수도, 숨 쉴 수도, 그렇다고 공부에 집중할 수 도 없었다.
시험날이 가까워질수록 불안감과 우울감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만 했다
간호사였던 나는 약물 치료가 필요한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하지만 정신과 약들이 집중력에 방해가 된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았기 때문에 병원에 갈 수가 없었다.
흐르는 눈물이 멈추질 않아서 닦을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의자에 앉아있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해야 할 것을 그냥, 계속했다.
필기시험이 끝난 다음날 내가 가장 먼저 한 것은, 그렇다.
정신과를 찾아 간 것이였다.
그렇게 약을 먹고 다행히도 그해 공시는 합격으로 마무리 지었다.
약물 치료를 받고 시간이 지나서, 내 우울증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검사를 했다.
의학은 과학이다.
피 한 방울 내 몸에서 일어나는 생체징후도 모두 숫자로 치환한다.
우울한 내 마음처럼 추상적인 것마저도 숫자로 바꾼다.
검사결과 다행히도 내 우울은 낮은 숫자였고 먹던 약을 줄여갔다.
자기 전에 먹던 수면제를 가위로 잘라 절반씩 먹었고 하루 3번 먹던 약도 하루 두 번 먹다가, 한번 먹다가 결국 그렇게 정신과를 찾지 않게 되었다.
내 우울증이 가벼운 감기처럼 지나갈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나처럼 가벼운 감기 같은 우울증을 겪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반대의 사람들도 많다.
우울감에 아파하고 힘겨워 하다가 결국, 그 무게에 짓눌려 정말로 숨이 멎어버린 사람을 나는 응급실에서 심심찮게 보아왔다.
달리는 전철에 뛰어든 50대 여자, 자기 목에 칼을 찔러 넣은 20대 남성, 심폐소생술도 할 수 없게 10층에서 뛰어내린 남성도 있었다.
심지어 병원에서도 종종 자살시도가 이루어진다.
간호사를 하면서 가장 무서운 환자중 하나가 우울증을 앓고 있는 환자다.
나에게 두려움을 뼈속까지 심어준 경험이 몇 번 있었기 때문이다.
내 동료가 맡은 우울증 환자가 병원에서 도망쳤었고 물론 병원은 발칵 뒤집혔다.
병원 이곳저곳을 정신없이 돌아다니면서 찾아다녔다.
1~2시간이 흘렀을까 구급차가 응급실로 피투성이의 환자가 실려왔다.
높은 5층 건물에서 뛰어내려 온 몸에 피칠갑을 한 환자가 들어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도망친 우울증 환자였다. 그당시 함께 늦은 새벽 병원을 지키던 병원 스텝들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또 한번은 코로나 시국에 혼자 격리되어 있는 방은 환자의 안전을 위해 CCTV가 설치 되어있었다. 환자가 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모니터를 들여다 봤는데, 모니터 속에서 환자가 수액 줄로 목을 매고있는 중이었다.
코로나고 뭐고 그냥 맨몸으로 격리방으로 뛰어들어가 환자를 막았다.
다행히 생명에 지장은 없었지만 환자들의 이런 행동에 나도 많은 충격을 받았고 아마도 내 수명이 몇 년은 줄어들었던 것 같다.
환자들이 이런 행동을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었인지 아는가?
그렇다, 우울증이다.
사람들은 모두가 우울감을 느끼고 경험한다.
그래서인지 우울증을 자신이 경험하는 우울감의 그 언저리이거나 조금 더 심한 정도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우울증은 교통사고를 당해 어디가 부러지거나 몸에서 분수처럼 피를 뿌리는 외상처럼
그 상처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괜찮아? 많이 힘들지? 치료는 잘 받고 있어?”
라는 공감과 위로의 말보다는 아픔을, 병을 극복의 대상으로 보고 충고와 지적을 서슴지 않는다.
심지어 아프다고 말하지만 믿지 않는 경우도 보았다.
“우울하지 않기로 마음먹어봐!”
“노력을 통해서 지금의 환경에서 벗어나세요”
“우울증으로 방패삼지마?”
“어딜 봐서 우울증이야?”
우울증 환자가 늘면서 우울증 유경험자인 인플루언서도 많다.
“제가 우울증에 걸려봤고 약도 먹어봐서 알아요”
“노력하세요”
만약 이들이 이렇게 말한다면 이들은 어쩌면 나처럼 감기처럼 가볍게 지나가는 우울증에 걸렸을 가능성이 크다.
피를 철철 흘리며 아파했던 사람이라면 남의 깊은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절대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 못할 테니까!
우울증은 그 상처가, 그 깊이가 눈에 보이지 않고 CT나 엑스레이로도 촬영이 불가능하다.
눈앞에 사지멀쩡하고 웃고 있는 사람이 마음속에서 피를 토하고,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서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선택을 하려는 사람일 수도 있음을 알았으면 한다.
간호사인 나조차도 그 때 그 환자들이 자살시도를 할 것이라고 상상도 못했었다.
적어도 우리 모두 아픈 사람에게 충고가 아닌 작은 위로 한마디를 건넬 수 있는 따뜻한 사람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