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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구리 Apr 20. 2021

나는 인복이 없나 봐

#3. 열정을 버리게 만든 상사

tvN '유 퀴즈 온 더 블록'을 보다가 오열한 적이 있다. 

광고대행사 TBWA 대리가 출연했던 에피소드였다. 


https://youtu.be/G3gDuoAD6c4

TBWA 재직자의 실수담 (2:30부터~)


광고 제안서를 제출하지 못한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사원에게 불호령 대신, 술 한 잔 함께 기울이며 다독여 줬다는 팀장의 이야기. 이때부터 눈물을 찔끔거리기 시작했는데, 이후 나온 당시 팀장(현 국장)의 인터뷰를 보고 오열하고 말았다. 


"저희가 하는 일이 광고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이 되게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일보다 송준이를 걱정했다. 위에 보고를 드렸을 때, 선배들의 첫마디가 '그래서 송준이 괜찮냐'였다."


사람이 중요하지 않은 일이 있었던가.

지금까지 회사에서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상사의 마음 씀씀이이자, 회사 문화였다.



2010년 3월. 

2번째 회사 폐업 시점에 지인 추천으로 지원한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중소기업이지만, 사업이 꾸준히 잘 되어 현금 부자인 회사였다. 회사 네임 밸류도 이전 회사들보다 높았고, 회사 자금력도 빵빵한 만큼 폐업 걱정도 없었다.


문제는 팀장이었다.

당시 33살이었던 여자 팀장의 직급은 대리지만, 직책이 팀장이었다. 능력을 인정받은 커리어 우먼이라고 생각했는데, 스스로를 '노처녀'라고 칭하며 자주 자학하곤 했다. 33살이 무슨 노처녀인가 싶지만, 11년 전 이야기인 데다 개인의 기준은 모두 다르므로...


재앙의 서막은 입사 2일째 되던 날이었다.

나의 입사 환영이자, 옆 팀 직원분의 퇴사 송별회로 회식자리를 갖게 되었다. 입사 환영인만큼 간단한 호구조사가 시작되었는데, 내가 사는 곳에서 차로 3분 거리에 옆 팀 주임(남자)이 살고 있었다. 주임이 자차로 출퇴근하고 있으니 카풀을 하면 좋지 않냐며 직원들이 권유했고, 자연스럽게 카풀을 하게 되었다. 항상 지하철과 버스로 출근하다가 조수석에 앉아 가니 너무나 편안했다. 지하철과 버스에서 성추행당한 경험이 꽤나 있던 나에겐 마음의 평안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 평안은 오래가지 못했다. 

입사 첫날부터 팀장이 친절한 스타일은 아니라곤 생각했지만, 그 날 이후 나를 아예 원수 대하듯 했다. (당시엔 몰랐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카풀을 시작하면서부터 였다.)

출근시간을 고정적이지만, 퇴근시간을 유동적인지라 카풀은 출근 위주로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약속이 있다고 일찍 퇴근한 주임은, 다음날 분노가 가득 찬 얼굴이었다.  

출근길에 듣지 못했던 그 분노의 이유를 퇴근시간 즈음 알게 되었다. 주임은 메신저를 통해 '퇴사해야 할 것 같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전날 주임의 약속은 내 팀장과의 약속이었다. 고마운 일도 있고 해서 밥을 산다고 했단다. 1차 밥을 먹고 2차 술을 마시러 갔던 모양이다. 밤 11시가 되었는데도 팀장은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고, 다음날 출근 압박에 주임은 어서 집에 가자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팀장이 계속 미적거리며 심야 영화를 보자, 3차를 가자해서 주임이 계속 거절을 했다고 한다. 그러자 팀장이 주임에게 '오늘 밤 같이 있자'라고 했단다. 주임은 그 말을 듣자마자 팀장을 놔두고 집으로 갔다고 했다. 팀장이 갑자기 오전 반차를 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 사건 이후 주임은 정말 일주일 만에 퇴사를 했고, 나의 2개월짜리 카풀의 평안은 끝이 났다.




팀장은 회사에서도 유명한 사이코였다.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 직원과 카풀하는 부하직원이 얼마나 미웠겠는가. 게다가 그 사건 자체도 부끄러운데, 그 이후 주임이 퇴사를 했으니 얼마나 기분이 나빴을까. 주임이 나에게 그 날의 일을 말하지 않았을까 걱정도 되었을 것 같다. 하지만 자업자득인 것을 인정했다면, 그녀는 사이코가 아니었을 터.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팀장은 모두 내 탓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내가 본인이 좋아하는 남자와 카풀을 한 것 자체도 문제고,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가 자기 부하직원을 좋아하게 되는 비극을 상상했을 것이고, 그 때문에 본인이 급해져서 주임에게 (사귀자는 고백도 아닌) 급발진 발언을 내뱉고 말았다며 모든 화살을 나에게 돌렸을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나를 '야!'라고 불렀다. '개구리 씨', '개 사원' 따위는 기대도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분노는 폭발하고 말았다. 



니가 뭐라고 짓거리고 다녔길래..

기자와 미팅 후, 사무실로 돌아온 팀장의 발소리가 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쿵, 쿵, 쿵! 그리곤 가죽 커버 다이어리를 본인 책상 위로 집어던졌다. 퍽!!! 잠시 후 찢어지는 목소리로 소릴 질렀다. "야!! 야!!!!!!!!!" 

나를 향한 고함이었다. 자리에서 조용히 일을 하고 있던 나는 놀라 얼빠진 표정으로 팀장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팀장의 쿵쿵거리던 발소리와 흥분이 회오리치는 숨소리, 다이어리 던지는 소리, 야! 찢어지던 비명,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 모든 것이 의아하고 황당했다. 멍하니 팀장을 바라보자 그녀는 다시 한번 소릴 질렀다. "야!! 이리 오라고!!!"

너무 놀라 팀장 자리로 가자 랩이라도 하듯 엄청난 속도로 알 수 없는 말들을 쏟아냈다. 


"니가 뭐라고 짓거리고 다녔길래 기자 새끼가 나한테 그딴 소릴 짓 거려!! 엉?!! 뭐? 뭐! 열폭? 열폭!!! 니가 뭔데? 니가 뭔데 내가 열폭을 해?!!!"


앞뒤 없이 냅다 소릴 질러대는 팀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나는 말을 잃었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손이 떨려 그저 멍하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팀장은 이후에도 더 소릴 질렀던 것 같지만 내용은 기억나질 않는다. 그리곤 나에게 성가시다는 듯 손등을 튕기며 가라고 손짓했다. 나는 조용히 화장실로 향했고, 그제야 눈물이 줄줄 흘렀다. 서러움에 복받친 눈물과 신음소리를 휴지로 틀어막았다.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것은 다음날 나를 추천해준 지인을 통해서다. 

그 날 그녀는 기자를 만났다. 기자는 새로 입사한 신입사원인 내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일전에 딱 한 번 팀장과 만난 기자가 있었다. 그 기자가 다른 기자들에게 새로운 직원이 왔다고 소문을 낸 모양이다. 기자는 왜 신입이랑 같이 안 나왔냐고 했고, 팀장은 걔가 여길 왜 오냐고 했단다. 그때 기자가 '왜 신입한테 열폭하세요~'라고 웃으며 받아쳤다고 했다. 그게 전부였다. 




니가 한 게 뭐가 있어?

연말 평가기간이 다가왔다. 본인이 한 일을 적으라며 팀장은 공란 가득한 엑셀 파일을 전달했다. 이런 평가가 처음인지라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옆자리 주임에게 물어보니, 일단 생각나는 대로 전부 적으면 팀장이 2차 정리해서 보고한다고 했다. 나는 그동안 진행했던 업무에 대해 모두 적었다. 업무별로 분류해서 최대한 비즈니스 용어로 꼼꼼히 적었다. 주임에게 이렇게 적으면 되냐는 1차 검사를 받고 팀장에게 메일을 보냈다. 

잠시 후 팀장이 나를 불렀다. 


"팀 업무 너 혼자 다 하냐? 아주 안 한 일이 없네. 안 한 일이 없어."


진행한 업무를 모두 작성해야 한다고 해서 모두 적었다고 말하자


"그니까 너 혼자 팀 업무 다했냐고! 니가 한 게 뭐가 있어? 이 일을 니가 했다고? 이 일 너 혼자 다 했냐?!"


팀장은 내가 적은 업무 성과 문구를 Ctrl+X(잘라내기) 해서 주임 평가서에 Ctrl+V(붙여 넣기)를 했다. 나를 무시하는 팀장이 내가 작성한 문구를 그대로 갖다 붙이는 모순된 행동과 비아냥 거리는 말투보다 눈 앞에서 잘려나가는 내 업무 성과를 보고도 아무 말 못 하는 내 처지에 울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업무 평가를 팀장이 하는데... 




니가 PM이잖아!

평가서 작성 후, 업무에 대한 열정이 많이 사라지고 있었다. 어차피 내가 뭘 한다고 해도 인정받지 못할 것이고, 주임이 한 업무로 둔갑할 테니 말이다. 


그 무렵 회사에서 진행하는 이벤트를 신문 지면 광고로 집행한다며, 광고 아이디어를 내서 보고하라는 팀장의 지시를 받았다. 업무에 대한 열정은 사그라들고 있었지만, 광고에 대한 열정은 아직 불타고 있던 나는 신이 나서 아이디어를 보고했다. 파격적인 레이아웃의 내 아이디어는 팀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료들의 열띤 찬성으로 채택되었다. 디자이너와 몇 날 며칠을 고민하며 광고 시안을 완성했고, 광고 시안을 본부장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광고 아이디어는 팀장의 것으로 둔갑했다. 디자이너가 나에게 괜찮냐고 물었고, 괜찮다고 대답하는 내 입 맛이 쓰디썼다. 


아름답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광고는 신문에 아름답게 실렸다.

주말 동안 광고가 실리고, 월요일에 광고를 통한 이벤트 유입수를 확인했다. 그런데 유입수가 '0'이었다. 등골이 오싹했다. 뭔가 잘못된 것이다. 

알고 보니 광고에 게재된 URL이 개발자의 실수로 잘못 전달된 것이다. 팀장은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며 노발대발했다. 


"야! 니가 PM이잖아! 사전에 확인 안 했어?!"


사전에 확인 안 한 나의 잘못이었다. 경험이 부족했다. 그런데 내가 언제부터 PM이 된 걸까? 

아이디어를 내라는 지시에 아이디어를 냈고, 광고 시안을 만들라고 해서 만들었고, 이벤트 페이지를 만들라고 해서 만들었고, 이벤트 URL를 개발자에게 받으라고 해서 받았다. 지시한 대로 실무를 모두 내가 하긴 했지만, PM은 팀장이었다. 

URL 오류로 개발자도, 팀장도 사유서를 쓰지 않았다. 나만 썼다. 




퇴사당하다. 

이 사건 후, 본부장이 나를 불렀다. 팀장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며, 그동안 팀장과 참으로 많은 대화를 나눈 눈치였다.  


그간 팀장은 내가 치마를 입으면 짧다고, 남자 동료와 대화하는 모습을 보곤 남자 직원한테 꼬리 친다고, 여자 동료와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훔쳐보며 일 안 하고 논다고, SNS 담당을 맡겨놓곤 SNS만 보고 있다고 뒷담화를 하고 다녔다. 나의 평판에 조금이라도 상처를 내고 싶어 했다. 결국 팀장은 본부장에게 달려간 것이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권고사직 처리를 해줄 테니 퇴사를 하라고 했다. 처리를 해주는 게 아니라 그냥 '권고사직'인데 말이다. 1년은 무조건 버티자고 10개월을 참아온 나는 결국 퇴사를 당했다.

나는 버리는 카드였다.



이 회사를 마지막으로 나는 '광고'라는 두 음절에 대한 열정을 버렸다. 

사람에게 질려버린 마음을 회복하는 데에 소비된 에너지는 '열정'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나 보다. 바닥을 드러낸 열정은 내가 하는 만큼 인정받는 일을 하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퇴사를 당하고 2개월도 안 돼서 내 인생 4번째 회사에 입사했지만, 1년 넘게 악몽을 꿨다.

덕분에 회사에 임하는 태도가 반전되는 계기가 되었다.


할 말은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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