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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루저 Apr 23. 2018

할리데이비슨의 촌스러움에 대하여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할리데이비슨에 대한 편견이 난무합니다. 물논 주변에 그렇지 않은 라이더들이 많은 건 알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니 너그럽게... :)





0. 


할리데이비슨. 혹은 할-리.

오토바이에 대해 전혀 몰라도 '할리'라고 하면 대부분 알 만큼 유명한 브랜드이며, 브랜드를 넘어선 어떤 총체적인 문화이자 이미지이기도 하다.


보통 '할리'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바이크는 부다다당 말발굽 같은 소리(이자 소음공해)를 내고, 인디언 소품스러운 가죽가방을 덕지덕지 달고 있으며, 겨드랑이를 자랑스레 드러내는 만-세 포지션으로 타는 그런 바이크.

그걸 타는 사람은 왠지 두건을 쓰고, 가죽으로 온몸을 치장하고, 주렁주렁 체인은 덤이며, 해골 그래픽이나 실버악세사리를 좋아하며 우르르 몰려다닐 것 같은 이미지이다. 한국인으로 상상한다면 '최민수'이고, 외국인으로 상상한다면 '터미네이터 아저씨'(아놀드 슈워제네거) 정도가 적당하다.


그리고 이건 바이크에 관심 없는 사람들이 바이크를 상상하는 이미지 중에 가장 강력하게 표준화된 이미지이기도 하다. (보통 한국에서 바이크는 할리나 배달 오토바이, 아니면 폭주족 정도로 밖에 표상되지 않으니.)


 

전형적인 할-리. 구글 검색어 역시도 'Typical Harley Owner'.



특히나 한국에선 돈 많은 아저씨들의 취미 중 대표적인 취미로 할리 문화가 정착되면서, 특유의 '촌스러움'그 자체가 되었다. 그것도 그냥 촌스러움이 아닌, 본인들 스스로는 너무나 멋있다고 흠뻑 빠져있는, 안타까운 그들만의 촌스러움.


나 역시도 할리데이비슨의 마초-아저씨 문화가 바이크에 대한 많은 편견들을 생산하고 있다고 믿어왔다. 모든 바이크를 개인의 취향이나 미감과 상관없이 '이 모델 얼마야' '이 파츠 얼마야'라면서 돈으로 환산하는 그 특유의 대화방식과, 최신 연식의 비교적 합리적인 가격의 할-리는 할-리로 쳐주지도 않는 그 몹쓸 자부심을 싫어했다. 더불어 마초-아저씨에 대한 문제의식이 전혀 없이 스스로 열렬히 재생산하는 그 모습과, 그 이미지가 라이더 전체에게 퍼져나가는 상황을 매우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던 중에, 얼마 전 소위 '할-리 아자씨'를 우연히 만나게 되면서 이 생각들이 조금 바뀌게 되었다.




1.


얼마 전 평일 낮에 바이크 센터에 가게 될 일이 있었다.


바이크 부품을 달기 위한 브라켓을 만들어주는 퇴계로(한국 바이크의 성지!)의 센터였고, 나이 지긋하신 주인 아자씨가 3평 남짓한 공간에서 뚝딱뚝딱해주는 정감 있는 업체이기도 하다. 조그만 작업장이기 때문에 보통은 예약을 하고 가거나 전화로 스케줄을 확인하고 가야하고, 나 역시도 미리 예약을 하고 갔다.


내 바이크 작업을 시작할 때쯤 매우 비싼(신차 값이 3000만 원을 가뿐히 넘는)할-리를 탄 아자씨 한 분이 그 좁은 골목을 매우 큰 바이크를 끌고 낑낑거리고 오셨고, 역시나 가죽조끼에 두건에 체인을 온몸에 둘둘 감고 계셨다. 거의 동시에 할리아저씨가 퀵으로 배달을 시킨 부품이 도착했는데, (역시나 찡이 마구 박힌) 가죽 사이드백이었다. 할리아저씨는 내 바이크를 만지고 있는 주인아저씨에게 물었다.


"앗. 저 수요일 4시에 사이드백 달겠다고 예약 잡아놨는데.. 지금 바로 못하는 건가요?"


알고보니 주인아저씨의 실수로 같은 시간에 2개의 예약을 받아버린 상황이었고, 주인아자씨와 할리아자씨 서로가 난감하게 되었다. 주인아자씨는 미안하다며 내일 바로 해주겠다고 하셨는데, 할리아자씨는 그것 또한 난감한 듯이


"아뇨 제가 월차 내고 온 거라 내일은 출근해야 하는데요..."라고 말하시며, 근처에서 시간 때우다가 밤늦은 시간에 받아도 되니까 꼭 좀 오늘 안에 해주시면 안 되냐고 꽤나 절박하게(주인아자씨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매우 노력하며) 물었다. 그 모습이 짠하기도, 미안해하는 주인아자씨가 애잔하기도 하여 나는 이번 주 편한 시간에 다시 와도 되니 할리아자씨 작업을 먼저 해주셔도 된다고 말하고는 내 바이크를 정리했다.


정리하면서 할리아자씨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그 아저씨에 대해서 조금 알게 되었다.


알고 보니 그 바이크는 아저씨가 한 달 전에 신차로 산 바이크이고, 놀랍게도 아저씨에게 첫 바이크라고 했다. 그리고 아직 바이크를 200킬로도 안 탔으며, 동호회의 추천으로 이 업체를 알게 되어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고 하셨다. 


할리아자씨가 타고 오신 할리데이비슨 로드킹 투어러 모델




2.


이 얘기들을 듣고 나니, 최근 몇 년 간의 아자씨 모습이 너무나 선명하게 머리에 그려졌다.


50대 중반쯤으로 경제력이 꽤나 있어 보이는 중산층 아저씨는 일상의 취미나 혹은 자신만의 스타일 없이 일만 하며 오랜 기간 살아오셨을 테고,

그러던 중 '모터사이클'이라는 비싼 취미에 관심이자 어떤 동경을 갖게 되었을 테고,

자신과 비슷한 상황인 사람들을 주변에 살펴보니 다들 할-리 정도는 타니까, 첫 바이크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큰 할리를 사야겠다고 자연스럽게 결정하셨을 테고,

그럼에도 가족과 주위의 시선 때문에 몇 달 간은 겨우 머릿속으로만 자신이 할-리타는 모습을 상상하며 설레는 미래를 그려보셨을 테고,

이런저런 가족 설득 끝에 구입함과 동시에 할리 매장에 있는 직원의 추천과 동호회 지인의 뽐뿌를 받아 가죽바지, 가죽조끼, 두건, 체인 등을 싹 사셨을 테고 주변인들의 말처럼 이게 진짜 이쁘다고 생각하셨을 테며,

흐뭇하게 할-리 동호회에 가입하니, 많은 사람들이 할-리리면 가죽 가방 정도는 달아줘야 한다고 (물론 찡이 난무하는) 가방과 그걸 다는 업체를 추천해주셨을 테고,


그 가방을 달기 위해서, 월차를 쓴 후 액세서리를 풀 장착하고 (아저씨가 산다고 하셨던)수원에서 퇴계로까지 긴장을 하며 바이크를 겨우 몰고 오셨을 테다.


두건을 쓴 채 땀을 뻘뻘 흘리며 나에게 연신 고맙다고 하는 아저씨의 얼굴에 담긴 자부심과 고마움을 보고 있자, 이처럼 아자씨의 인생이 짐작이 되며 지극히도 촌스럽다고만 생각했던 그 모습이 조금은 다르게 보였다.


아마도 인생에서 나름의 미감과 스타일을 가꿔올 수 있었다면, 결코 선택하지 않았을 아재스러운 취향들이, 촌스럽기보다는 조금은 귀엽고 감성적으로 보였다. 오랜 기간 방치되었다가 그렇게 촌스럽게 길들여져 온 아자씨의 미감이 문득 나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했고, 그 촌스러운 가방을 달기 위해서 전전긍긍하며 큰 바이크를 여기까지 몰고 왔을 그 조마조마함이 행복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월차를 내고 나온 상황 때문에 아들뻘이나 되는 나와 3평 남짓한 센터 주인아자씨에게 매우 조심스럽게 부탁하던 그 모습이, 무척이나 안쓰러웠다.




3. 


이 만남은 '할-리'에 대한 나의 많은 생각들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고, 그 이후로는 할리의 촌스러움을 쉽게 조롱하지는 않는다. 더불어 매우 세련된 모습으로 할리를 타는 분들이 한국에도 많아진 게 눈에 들어오기도 하고, 할리가 키워온 한국 바이크 씬의 파이가 분명히 크다는 사실도 새삼 알게 되었다.


이제 남은 건, 왜곡된 편견을 바꿔나가야 할 지금의 젊은 라이더들이 아닐까 한다. 여전히 극단적인 마초 문화를 지향하는 집단이 있는가 하면, 세련된 문화로 만들어나가기 위해 무척이나 애쓰는 집단들도 있다. 또한 아직도 가격이랑 스펙만 따져가며 스피드를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 스타일과 멋의 연장으로 바이크를 선택하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다.


우리 시대의 할-리, 혹은 바이크의 이미지는 어떤 모습으로 굳혀갈지는 결국 우리의 몫이다. 제발 촌스럽게 보이지는 말자.


올드 할리. 어쩌면 한국의 일부 할리는 시대를 역행하며 촌스러워 지는 걸지도..



SLOW, SAFE, EN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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