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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용석 Feb 22. 2021

세상에 완벽한 피임은 없다

Griswold, Eisenstadt 판례로 보는 '피임의 권리'

I. 들어가며

  옛날에는 어린아이들의 입에서 틈만 나면 "심심해"라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유튜브의 등장으로 인해 이제는 그러한 말이 좀 줄어들지 않았을까 싶다.  유튜브를 보고 있노라면,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게 된다.  그중 얼마 전 접했던 영상이 바로 '이름 짓기 콘텐츠'였다.  제시어에 맞게 제목을 짓는 콘텐츠였는데, 한참을 재미있게 보다가 하나의 제시어 및 그 답이 날 깊은 생각에 잠기게 했다.  아무도 사지 않을 것 같은 콘돔의 이름을 지어달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시대가 많이 변했다.  어렸을 적에는 피임기구가 유머의 소재가 되지 못했고, 성(性)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공개적으로 하는 것 역시 꺼려졌다.  하지만, 이제 그러한 이야기들은 우리의 일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야기가 되었고 단지 어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린 학생들까지 쉽게 이야기할 수 있게 변한 것 같다.  이러한 변화와 흐름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다양한 사회과학적 방법으로 접근해볼 수 있겠지만, 이를 법의 관점에서 접근해보면 재미있게 풀어낼 수 있을 거 같다.  피임의 보급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미국 연방대법원의 두 가지 판례를 소개하고, 피임의 보급화에 따라 성관계의 개념이 어떻게 변해왔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II. 피임과 성관계가 가지는 무게의 변화

1. 성관계가 가지는 무게

  내게 있어서 성관계란 꽤나 무거운 개념이다.  성관계가 가지는 무게를 측정하기 위해서는 해당 행위가 가지고 있는 '책임'의 무게를 측정해야 한다.  성관계의 책임은 음식점에서 밥을 먹고 돈을 내는 그런 가벼운 책임이 아니라 바로 '생명'에 대한 책임이다.  후술 하겠지만, 현재까지는 100%의 피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성관계(일반적인 의미의)는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성관계가 가지는 무게는 한 생명이 잉태될 수 있다는 책임의 무게와 동등하다고 생각한다.  아마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내 또래 친구들 중에는 1%도 없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인류 역사상 이러한 관점을 가졌던 사람들은 꽤나 많았고, 심지어 이러한 관점이 사회 전반적인 관점이던 시대도 존재했다.


  종교가 법의 위치에 있었던 과거 시대에는 피임을 강하게 제한했다.  생명이란 신의 선물이었기에, 인간이 의도적으로 그 선물을 거절할 수 없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이러한 모습을 쉽게 볼 수 없지만, 지금도 이슬람 및 일부 보수주의 기독교에서는 피임을 금지하거나 아주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또한 카톨릭에서도 아직까지 교황청이 공식적으로 피임기구의 사용을 금지하고 있을 만큼 이러한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종교들은 남녀간의 성관계를 생명 잉태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종교의 시대를 지나 이제 종교의 권위가 바닥까지 떨어져 대부분의 사람들이 종교의 교리를 고리타분한 격언으로 취급하는 오늘날, 이러한 관점으로 성관계의 의미에 대한 이야기를 건넨다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지도 모른다.  내 주변 친구들과 대화 그리고 대중매체들의 이야기들만 놓고 보면, 더 이상 성관계는 그다지 무겁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책임을 가져다주는 행위라기보다, 즐기고 욕구를 해소하는 행위처럼 표현되고 있다.  어떻게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일까?


2. 성관계의 무게를 가볍게 만들려는 시도들

  인류 역사에서는 지속적으로 '성관계'가 가지는 무게를 가볍게 만들려는 시도가 있어왔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아마 종교적 교리가 법의 위치에 있었던 시대에서 지나치게 성적 욕구가 억눌렸던 것에 대한 반작용이 아니었을까 싶다.  사람들은 성관계에 대한 무거운 시선과 관점을 구시대적 사고로 이야기하는 동시에, 하나의 권리로서 '성관계를 즐길 권리'를 주창하였다.  우리나라에서 혹자는 "섹스는 게임이다"라는 이야기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불과 10년이 좀 더 지난 오늘날, 당시 그 이야기로 모두에게 한바탕 파장이 일었던 사회는 더 이상 우리 곁에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 웃으며 그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성관계의 무게를 가볍게 만들려는 시도는 사회 각 분야에서 존재해왔다.  문화의 영역에서 그 시도는 가장 많았고, 또 효과적이었다.  10년 전 성관계 장면이 영화에 나오던 것과, 오늘날 성관계 장면이 영화에 나오는 것의 차이를 본다면 그 시도들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사상과 정책의 영역에서도 그러한 시도는 효과를 보였다.  더 이상 결혼 밖 미혼남녀의 성관계는 도덕적으로 손가락질받지 않는 일이 되어버렸다.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이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피임약 및 피임기구의 보급화는 성관계의 무게를 가볍게 만드는 데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관계에 따르는 책임을 지게 될 확률을 획기적으로 줄였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더 이상 성관계는 책임을 가져오는 행위가 아니라, 즐기고 누릴 수 있는 행위로 인식될 수 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러한 피임약 및 피임기구의 보급화가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다.  이에는 놀랍게도 '법'의 역할이 정말 크게 존재했다.  법의 영역에서 종교적 색채가 가득 담긴 법에 대한 반감과 함께, 여성의 인권신장, 그리고 성관계에 대한 인식 변화를 담은 소송이 진행되었고 이것은 전 세계적으로 피임의 보급화를 불러일으키며 오늘날로의 변화의 시작이 되었다.


III. 피임의 보급화를 이루어낸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례

1. 결혼한 부부에게 피임할 권리는 존재하는가: Griswold v. Connecticut, 381 U.S. 479 (1965)

  때는 1960년대 미국이다.  1960년 미국의 30개 주(State)에는 피임약 및 피임 기구의 광고와 판매를 제한하는 법률이 존재했다.  게다가 코네티컷(Connecticut)과 매사추세츠(Massachusetts)에서는 피임 그 자체를 완전히 금지하고 있었다.  코네티컷 주에서는 피임약 또는 기구의 사용이 $50의 벌금 또는 1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질 수 있는 범죄였다.  피고 등은 코네티컷 주에서 피임 클리닉을 제공하는 산부인과를 개업하였고, 코네티컷 법에 의해서 체포 및 기소되어 $100의 벌금형을 받게 되었다.  이에 피고인은 소송을 제기한다.


  Griswold 주장의 핵심은 '코네티컷의 피임 금지법이 수정헌법 제14조 위반'이라는 것이었다.  흔히 우리가 적법 절차(Due Process)로 잘 알고 있는 수정헌법 제14조는 어떠한 주도 미국 시민의 특권 또는 시민으로서 누리는 면책특권을 제한하는 법을 만들거나 제한할 수 없으며, 시민의 생명, 자유, 재산을 적법절차 없이 빼앗을 수 없고, 사법권 내에서 법이 모두에게 동등하게 적용되어야 함을 규정한다.

14th Amendment to the United States Constitution

"No state shall make or enforce any law which shall abridge the privileges or immunities of citizens of the United States; nor shall any state deprive any person of life, liberty, or property, without due process of law; nor deny to any person within its jurisdiction the equal protection of the laws."


  연방대법원은 7-2로 Griswold의 손을 들어준다.  하지만, 전면적인 피임약 및 기구의 사용을 허락한 것이 아닌 '결혼 한 부부관계'에서의 피임약 및 기구 사용을 허용하였다.  그 주된 근거는 코네티컷의 피임금지법이 수정헌법 제14조 위반이라는 것이었다.  다수의견을 작성한 Douglas 대법관은 피임에 대한 자기 결정권이 헌법상의 사생활권에 포함된다며 기존 헌법에 명문으로 적혀있지 않은 권리를 새롭게 헌법상 권리로 격상시켰다.  새로운 권리가 창조된 것이다.  법원은 기존 헌법이 명문상으로 사생활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지 않고 있지만, 결혼한 부부의 사생활권이 수정헌법 제1, 3, 4, 5, 9조에서 도출될 수 있다고 판시했다.  경찰이 결혼한 부부가 사용하는 침실에서 피임약 또는 피임기구를 사용하는지를 수색할 수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이것이 소위 사생활권에 어긋나는 일임을 지적했다.  반면 소수의견(Dissent)에서 Black, Stewart 대법관은 사생활권이라는 권리에 대한 헌법 조항이 없는데 어떻게 적혀있지 않은 새로운 헌법을 법관이 만들어 새로운 권리를 창조해낼 수 있느냐고 비판했다.  특히 Stewart는 코네티컷 주의 법이 어리석은 법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을 있는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진정한 보수주의의 품격을 보여줬다.


2. 모든 사람에게 피임의 권리는 존재하는가: Eisenstadt v. Baird, 405 U.S. 438 (1972)

  1965년 연방대법원은 Griswold v. Connecticut을 통해 법적으로 결혼한 부부 내에서의 피임을 허용하였다.  이로부터 7년 뒤 연방대법원은 Eisenstadt v. Baird에서 모든 미국 시민에게(부부가 아닌 미혼 커플에게까지) 피임의 권리가 존재하느냐에 대한 질문에 맞닥뜨리게 된다.  원고는 Griswold v. Connecticut에서 받아들여진 사생활권이 법적으로 결혼한 부부에게만 적용된다는 것은 수정헌법 제14조의 Equal Protection(평등 원칙)을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앞서 Griswold v. Connecticut에서 규정된 사생활권에 포함된 피임권이 결혼한 부부에게는 적용되지만, 결혼하지 않은 커플에게 적용되지 않는 것이 위헌이라는 것이다.


  이 사건에서 문제가 되었던 매사추세츠 법은 피임약 및 용품의 사용을 금지하는 법이 아닌 '배포 금지법'이었다.  따라서 경찰에 의한 사생활의 감시를 주로 다뤘던 Griswold와는 그 성격이 조금 달랐다.  매사추세츠 주 법은 미혼자에게 피임용품의 배포를 금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부의 감시에서 부부의 침실이라는 성역은 반드시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던 사생활권이 이제 정부의 감시라는 좁은 범위를 벗어나 개인에게 자신이 원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자유가 존재한다는 것에까지 확장될 수 있느냐가 주요 쟁점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논의가 이전보다 훨씬 확장된 것이다.


연방대법원은 6-1로 Eisenstadt의 손을 들어준다.  미혼과 기혼 개인들을 구분하는 것이 수정헌법 제14조 Equal Protection을 만족하기 위한 Rational Basis Test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다수의견은 사생활권이 넓은 범위의 권리라면, 사생활권이라는 권리는 모든 개인들의 '임신을 할 것인지 하지 않을 것인지'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것에도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고 판시했다.  오직 대법원장 Burger만이 반대의견을 작성하는데, 피임약과 기구의 모든 시민에 대한 배급에 따른 사용을 금지한 데에는 어떠한 부작용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Burger는 당해 소송에서 문제 된 매사추세츠 주 법은 어떠한 부작용이 있을지 모르는 피임약 및 기구의 사용과 관련해 자기 주민들의 건강을 지킬 수 있는 공익(public interest)을 가진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단지 한 명의 의견에 불과하였다.


이로서 1972년, 미국은 피임약을 복용하고 피임기구를 사용하여 임신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선택권이 모든 시민들 개개인에게 있다고 천명하게 된다.

"If the right of privacy means anything, wrote Justice William J. Brennan, Jr. for the majority, it is the right of the individual, married or single, to be free from unwarranted governmental intrusion into matters so fundamentally affecting a person as the decision whether to bear or beget a child."

Eisenstadt v. Baird, 405 U.S. 438 (1972).


3. 보론: 사생활권의 확대에 따른 결혼 개념의 변화

  우리는 1965년 해당 판결 이후 연방대법원이 결혼을 어떻게 해체시켜나가는지 결론을 다 알고 있는 입장에서, Griswold v. connecticut 판결 다수의견 재판부가 결혼이 얼마나 성스러운 결합이자 연합인지를 설명하는 부분은 굉장히 흥미로운 부분이다.

"Marriage is a coming together for better or for worse, hopefully enduring, and intimate to the degree of being sacred. It is an association that promotes a way of life, not causes; a harmony in living, not political faiths; a bilateral loyalty, not commercial or social projects. Yet it is an association for as noble a purpose as any involved in our prior decisions."

Griswold v. Connecticut, 381 U.S. 479 (1965) at 485–86.


  한편 Eisenstadt v. Baird에서 재판부는 결혼 관계를 다시 정립하는데, "부부는 정신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독립체가 아닌, 각각 구별되는 지적이며 감정적 모습을 가진 두 개인의 연합"이라고 정의했다.  앞서 Griswold에서 부부의 '결합'과 '연합'을 중시하던 모습에서 미국 사회에서 7년간 결혼과 부부에 대한 가치가 어떠한 방향으로 변화되어가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이로부터 1년 뒤, 미국 현대사의 B.C.와 A.D. 를 나누는 기준점이 되었다고 일컬어지는 그 유명한 판례 Roe v. Wade가 등장한다.  임신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판단의 자유가 이미 임신한 상태에서 태아를 낙태할 수 있는 권리에까지 확장되게 된 것이다.  그 시작은 Griswold와 Eisenstadt였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그것이 이 두가지 판례가 가지고 있는 깊은 의미이다.


IV. 대한민국 사회에서의 피임권

1. 편의점과 약국에서 "콘돔 하나 주세요"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오늘이 되기까지

  대한민국 사회에서 누구나 쉽게 피임약을 처방받고, 피임기구를 쉽게 살 수 있게 된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기존 정책은 피임 약제 수입과 국내 생산을 금지하였고 산아제한을 반대하고 있었다.  (양재모, 「우리나라 인구정책의 종합분석」 참조).  그러나 1962년부터 실시되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병행하여 5.16 군사정변 이후 군사정권이 가족계획사업을 국가 책임으로서 시행하면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인구정책 50년사편찬위원회, 『출산 억제에서 출산 장려로: 한국 인구 정책 50년』, 보건복지부, 2016, 36-37쪽).  정부는 인구증가 억제 없이 경제성장이 어렵다고 판단했고, 이러한 가족계획사업을 1962년부터 1996년까지 시행했다.  산아제한 정책으로 국가에서 무료로 불임수술을 해주었고,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출산을 억제시키는 정책들이 이루어졌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피임 보급화는 이렇게 시작되었고, 저출산 위기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 모든 변화들이 Griswold v. Connecticut에 대한 논의가 나온 1965년 전후라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코로나 19 사태로 모두가 어려웠던 2020년, 우리나라 피임약 및 피임기구의 소비량은 급격히 늘었다고 한다.  수많은 의료 관련 종사자와 보건 관련자, 심지어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모두에게 피임을 권장하고 추천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우리 대한민국에서 발생하게 된 것은 우리 시민들이 머리를 맞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토론을 하고 가치판단을 거친 결과라기 보다는, 저 멀리 미국에서 시작된 두 가지 판결과 그 판결로 인해 전세계의 흐름이 변화되었고 그 변화가 만들어낸 결과라는 점은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2. 대한민국 청소년과 피임

  최근에는 청소년의 피임약 및 기구 구입의 자유와 관련한 목소리들이 높아지고 있다.  이를 '피임 접근권'이란 단어를 만들어 표현하고 있는 글도 존재했다.  성관계와 사랑을 동일선상에서 표현하고 있는 수많은 글들도 눈에 띈다.  우리나라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콘돔 사용률이 최하위이고, 낙태율이 1위라는 점을 들어 청소년에 피임기구를 널리 배포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모두 필요한 이야기들이다.  무분별한 성적 개방 속에 제대로 된 피임 교육을 받지 못한 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을 청소년들은 생각하면 꼭 필요한 기조로 생각된다.  하지만 청소년을 대상으로 인류사에서 피임과 관련해서 이렇게 긴 역사가 존재했고, 나아가 수없이 많은 갑론을박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글은 쉽게 찾아볼 수가 없다.


V. 나오며

1. 세상에 완벽한 피임은 없다

  나보다 9살 어린 친동생이 첫 연애를 시작했었을 때, 형으로써 해주고 싶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를 글로 쓰다 보니 글이 꽤나 길어졌다.  내가 브런치에 썼던 수많은 글들 중에서도 꽤나 긴 길이를 자랑하는 이 글의 결론은 사실 간단하다.  90% 이상의 피임 성공률을 자랑하는 피임약 및 기구의 보편화로 인해 모두가 성관계는 놀이처럼 즐길 수 있는 것이라며, 단지 피임만 잘하면 그 무게가 가볍다고 이야기하는 오늘날 주류의 이야기가 너무나도 당연한 진리라고 생각하지 말자는 것이다.  오늘날 저러한 이야기가 보편화되기 까지는 수없이 많은 과정들이 존재했고, 그 과정에 따른 비교적 최근의 변화이다.  특히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지 않는 '세상에 완벽한 피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또한 깊이 생각해 볼 문제이다.


  모든 의학 전문가들이 하나같이 같은 이야기를 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정의하는 성관계와 관련해서 완벽한 피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100% 확률을 자랑하는 피임법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크게 개의치 않는다.  피임법을  사용한다면 90%-99.9% 높은 확률로 피임이 가능하기에, 10%-0.1% 임신 확률을 무시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드라마나 영화, 우리의 일상에서도 임신 이후 실수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만약 법률적으로 이를 바라본다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해당 상황에서 사용하는  단어 '실수' 정말 단순한 실수일까, 아니면 책임을 가지는 과실 또는 중과실일까?


  통계청 따르면, 2018 대한민국의 기혼부부의 경우 콘돔(25.1%); 월경주기법(23.9%); 질외사정법(22.3%); 정관수술(14.7%) 주된 피임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모든 목록 중에서 100% 확률을 가진 피임법은 당연히 없다.  정자의 원천을 봉쇄하는 정관수술마저도 0.1-0.15% 임신의 확률이 존재한다고 한다.  (참고로 질외사정법은 피임법이 아니다.) 일반적으로는 사용되지 않는 구리 루프; 호르몬 루프; 피임 주사; 임플라논(피하 이식 장치) 경우에도 일반 피임법보다 훨씬 높은 100%에 근접하는 성공률을 자랑하지만,  어떤 문헌에서도 100%라는 숫자를 감히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아직까지 100% 피임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2. 성관계의 무게에 대한 고민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이 처음으로 성관계를 경험하는 나이가 몇 살일까?  2013년 22.1세였던 성경험 시작의 나이는, 불과 5년 뒤인 2018년 13.6세가 되었다.  앞서 살펴보았던 수많은 글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청소년에 대한 피임약 및 기구의 보급화와 접근성 강화가 정말 시급하다는 생각이 불현듯 밀려온다.


  평소 이런저런 생각은 있었지만, 해당 분야에 전문성이 없기 때문에 관련하여 많은 글을 찾아 읽어볼 수밖에 없었다.  글을 작성하면서 찾아봤던 대부분의 글들과 콘텐츠들은 성관계의 결과와 책임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보다는, 단지 그 과정에 있는 쾌락과 건강적 유익만을 이야기하는 추세로 보인다.  특히,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성교육 글과 콘텐츠는 모두 '조심해야 하는 건 맞아 근데 너네 하고 싶지? 그러니까 피임기구 잘 써'라는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글들을 읽으며 어른들이 청소년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이야기가 고작 이것뿐인가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피임에 대한 정보를 주고, 이를 권장하는 것은 당연히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그와 함께 두 가지 이야기가 덧붙여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먼저 피임기구를 쓰는 것이 성관계의 두 주체로 하여금 아이를 탄생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0%로 만들어준다는 잘못된 생각을 갖지 말게 해 주어야 한다.  피임 기구를 썼든, 약을 먹었든, 심지어 정관 수술을 했든 간에 성관계를 갖는다는 것이 언제나 한 생명의 부모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과 그 가능성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함께 알려주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 성관계가 가지고 있는 무게에 대해 스스로 생각해볼 수 있는 고민거리를 던져주어야 한다.  스스로 성관계가 무엇인지에 생각해볼 시간도 없이, 그저 기성세대들이 자신들의 짧은 삶에서 이미 내려놓은 답이 불변의 진리이자 정답인 것처럼 생각하게 되어 스스로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없애지 말자는 것이다.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는 아이들로 하여금 그 선택을 위한 충분한 정보와 기회를 주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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