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편지를 쓰고도 전하지 못할 때가 있다. 마음이 따라주지 않아서, 혹은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라캉은 편지는 항상 목적지에 도착한다고 말했는데(맥락은 전혀 다르지만, 나는 이 말을 단순한 수사로 즐겨 사용한다). 지금도 2020년 연하장을 대신해 시를 필사한 엽서 한 장을, 전해주지 못하고 아직까지(10월) 가지고 있다. 코로나 사태 이후로 엽서의 수신인과 만나지 못했다. 이 엽서는 전해질까? 이럴 때 라캉의 말을 생각하면 괜히 안심이 되고, 아쉬움과 조급함도 조금은 견딜 만하다. 엽서는 전해질 것이고, 설령 전하지 못하더라도 그 나름대로 마음의 문제가 해결되는 일이 있겠지. 삶에는 작은 우연과 기적이 많으니까.
서가 정리를 하다 『친애하는 미스터 최』를 발견했을 때에도 그런 작은 우연을 만난 기분이었다. 한국에서는 『사는 게 뭐라고』로 유명한 사노 요코와 그의 친구 최정호가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책. 나는 통영에 있는 봄날의 책방(『친애하는 미스터 최』를 발간한 남해의 봄날에서 운영하고 있다)에서 이 책과 처음 만났다. 그때는 내가 서점에서 일하게 될 거라고는 짐작도 못했다. 무척 더운 여름이었고, 여행 중이었다. 아스팔트 위로 수시로 일렁이는 아지랑이만큼이나 미래가 선명하지 못한 시기였던 것 같다. 다른 지방, 그것도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떠난 여행에 마음이 들떠 평소보다 활기찬 태도로 1박 2일을 보낸 기억이 난다.
통영에 간 건, 유학 중인 친구 S가 방학 동안 통영의 부모님 집에서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S가 묵을 공간을 마련해줄 수 없었던 L과 나는 그를 보기 위해 기꺼이 통영행을 결정했고, 고속버스 자리를 맞춰서 예매했다. 통영도, L과의 여행도 처음이었다. 말은 안 했지만, L과 처음 길게 대화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고등학생 때 교회에서 참석한 선교대회로 홍콩에 갔다가 귀국하는 밤비행기였다. L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5시간이 조금 못 되는 비행 중에 족히 두세 시간은 필담을 나눴다. 짧고 빠른 편지라고 해야 할까, 길고 느린 메신저 앱―당시에는 문자였지만―이라고 해야 할까. 종이에 볼펜으로 적어서인지 편지의 느낌에 조금 더 가까웠다. 그러니까 우리는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친구가 되었다고, 이제와 정리해본다. 우리의 어떤 국면들에 그렇게 편지가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조금 특별한 기분이 된다.
1박 2일은 짧은 시간이다. 그 와중에 내가 가고 싶다는 서점에 함께 가준 친구들의 모습이, 『친애하는 미스터 최』 표지 위로 겹쳐졌다. 통영에 다녀오고도 한참 뒤의 일이지만, L과 나는 다시 유럽에 있는 S에게 편지를 써서 보낸다. 팬데믹으로 편지는 족히 두세 달이 걸려서야 도착하고, 그 사이에 우리는 편지가 아무래도 도착하지 못하고 증발할 것 같다는 비관적인 생각을 한다. 나는 그 편지에 라캉은 편지가 항상 목적지에 도착한다고 말했다고 쓴다. 처음에는 라캉을 데리다로 착각해 잘못 적었고, 편지를 모아서 보내기로 한 L이 발송하기 전에 그것을 고쳐준다.
최정호에게 보낸 사노 요코의 편지 중에는 이런 게 있다.
최정호 선생님 오래오래 전에 강연 비디오를 보냈는데 받으셨나요? 살아 있나요? 죽었나요? 살아 있다면 다음 둘 중 하나에 동그라미를 쳐서 보내 주세요. 살아 있다 죽었다 (죽었다면 성묘하러 가겠습니다.) 1997년 10월 7일
처음 읽었을 때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읽으면서는, 독자를 웃게 만드는 괄호 속의 문장에 약간 등이 서늘해졌다. 만약에 동그라미 친 답장이 오지 않는다면, 한참을 기다리던 사노 요코는 성묘를 하러 갈 것이고, 그렇게도 편지는 목적지에 도착했을 것이다. 저 편지는 처음부터 어떻게든 도착하고야 마는 편지로 쓰인 것이다. 나도 S에게 보내는 편지에 라캉을 인용하는 대신 이렇게 쓸 걸 그랬다.
오래오래 전에 편지를 보냈는데 받았어?
살아 있어? 죽었어? 살아 있으면 다음 둘 중 하나를 골라서 메시지를 보내줘.
살아 있다
죽었다
(죽었다면 내가 그곳으로 갈게.)
2020년 모월 모일
어쩌면 원래 편지가 도착을 목적으로 쓰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글이 읽히기 위해 쓰이는 것처럼 운명이나 섭리에 가까운 것이라고. 사랑은 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한 시절은 끝나기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아직 아무 것도 끝나지 않았구나.
이 글에 통영이 등장하지 않았지만 통영이 끝나버렸고 삶이 계속되었듯, 만나지 못한 겨울의 날들이 등장한 적도 없이 끝나버리고 나는 영원히 반복될 것만 같은 양식의 삶을 살고 있다(이 문장은 황인찬 시인의 문장을 빌려 썼다. 「이것이 나의 최악, 그것이 나의 최선」).
10개월은 짧은 시간이다. 『친애하는 미스터 최』에 머무른 시선은 마지막에 나의 작은 고시원 방 책장에 꽂힌, 바래져가는 엽서에 가 닿는다. 절대 함부로 버리지 않지만, 단정함과는 거리가 먼 칸에 그것은 책갈피와 몇몇 시집, <윤희에게> 미니 포스터, 3M 포스트잇, 안과 진료비 내역서와 수술 안내서류, 정형외과의 진료 차트, 문학 행사 굿즈, 일하는 매장의 리플렛과 함께 꽂혀 있다. 기준이 없는 공간이지만, 책상에서 잘 보이는 자리다. 엽서를 잊거나 잃을까봐 그곳에 꽂았다. 그 사실을 잊을 만큼 오랜 시간이 흐르지는 않았다.
한두 달 뒤에는 엽서에 더할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휴무일에 동네 문구점에서 쉽게 살 수 있는 무난하고 단정한 편지지에 쓰는 게 좋겠다. 도착하겠지만, 당장은 아닐 수도 있는 편지를. 아무도 인용하지 않고 쓰는 게 좋겠다. 그러면 라캉을 데리다로 헷갈리지도 않을 것이다. 누가 고쳐줄 일도 없이, 그저 나의 작은 친애를 담으면 좋겠다. 그리고 당신도 편지를 쓰면 좋겠다. 우리가 편지를 품은 서로가 되어 내년을 맞이하면 그게 가장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