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예의 『라스트 젤리 샷』에서 나타난 오버테크놀로지 시대 SF의 의미
청예의 [라스트 젤리 샷]에서 나타난 오버테크놀로지 시대 SF의 의미
SF는 근대 이후 비인간 캐릭터(non-human Character)들의 실질적인 요람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현재는 너무도 당연하게 사용하고 있는 로봇(robot)이라는 용어도 1920년 카렐 차페크(Karel Čapek)의 희곡에서 처음 조어되었고, 외계인(Alien)도 설정과 특징들을 구체화한 것도 SF라는 장르 내에서였다. 현대의 판타지 장르가 신화시대부터 이어져 온 엘프와 드워프 등의 비인간 종족들을 캐릭터로 관습화했다면, SF 장르는 지구 바깥의 존재들이나 인간이 만들어 낸 피조물로서의 비인간 개체들을 서사의 주역으로 관습화했다. 그러기 때문에 SF에서 비인간을 구현한다는 것은 특이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SF 다운’ 장르적 형태를 만들어내는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만큼 SF에서 비인간은 역사적인 맥락과 궤도들을 가지고 있고, 반대로 동시대적인 의미들을 세분화하기도 한다. SF에서 다루는 주제 및 소재들은 고정된 관습이 아니다. 이는 브라이언 에트버리(Brian Attebery)가 이야기했던 ‘포물선 서술’의 개념을 통해서 확인이 가능하다. 비인간 개체의 대표 격이라고 할 수 있는 로봇도 처음에는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는 존재로 등장하여 결국 인간을 위협하는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존재로 그려졌었는데, 이는 이데올로기 시대에 인간의 노동과 주체성에 대한 지점들에서 발생한 사고실험이었다.
이후에는 인공지능 기술이 개념적으로 발달하면서부터 ‘지능’ 혹은 ‘논리적 판단’ 혹은 ‘감정’의 문제들을 논의하였고,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인간성에 대한 문제들을 다루는 포스트휴머니즘(post humanism)의 다양한 사고실험 장이 되었다. 결국 인간의 모사(摹寫)라는 지점에서 발생한 로봇의 장르적 코드들은 과학기술의 발달과 이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의 변화양상, 거기에 관여하는 다양한 인문‧사회학적 담론을 통해 변화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기술의 발달과 이에 따른 사회의 변화 양상들이 SF의 세계들을 구체화하고 또 다른 이러한 상황에서 현재 거대언어모델(Large Language Model, LLM)을 비롯한 다양한 생성형 인공지능(Generative Artificial Intelligence)의 시대가 되어버린 이 시대의 인공지능과 로봇으로 재현되는 비인간 개체들은 어떠한 형태로 포물선을 그리면서 움직이고 있을까? 이는 오히려 굉장히 난해하고 복잡한 지점이기도 하다. 2016년 알파고(AlphaGo)와 이세돌 9단이 대국을 벌였을 때, 한국 사회는 그야말로 SF 서사들에서 꾸준히 전개하던 인간 대 기계의 사건들이 현실에 현현(顯現)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한 관심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잦아들었고, 이후에는 구체적인 담론의 변화 없이 ChatGPT를 맞이하게 되었다.
'물론 한국의 SF 서사 내에서는 인공지능과 비인간 개체들에 대한 다양한 사고실험들이 진행되지 않은 것은 아니라. 오히려 세간의 관심은 사그라들었지만 SF 창작 내에서는 다양한 변주와 시도들이 이어졌다. 로봇의 상용화에 대해서는 섹스 로봇 정도에서 그치는 상상력들의 빈곤을 지나, 젠더 개념을 통해 인간의 윤리를 재질문하는 작품(「얼마나 닮았는가」)에서부터, 돌봄노동의 문제를 통해 인간의 생활세계에 위치하게 될 인공지능 기반 로봇들이 가지게 될 다양한 문제들을 비판적으로 사고실험(「TRS가 돌보고 있습니다」)하는 작품들이 꾸준하게 창작되어 왔다. 그리고 제6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인 청예의 [라스트 젤리 샷](2023, 허블) 역시 인공지능과 로봇에 대한 사고실험을 진행하는 한국 SF의 포물선 내에 위치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가속화되고 있는 기술 발달의 한가운데서 그것을 사고실험 하는 것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과 문제들을 함께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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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 실패의 보고서들에서 우리는 어떠한 지점에 도달할 수 있을까? 단순히 인공지능은 역시 인간과 비슷하게 되는 것을 불가능하다거나, 위험하다라는 일차원적인 테크노포비아(Technophobia)의 시각들에 도달하는 것은 21세기의 SF에서 그리 효과적인 방법론은 아니다. 하지만 막연한 공포감이나 거부감을 걷어낸 실패 보고서는 우리가 이 시대의 고려해야 할 다양한 문제들을 생각하는데 도움이 된다. [라스트 젤리 샷]에서 나타난 이야기들 역시 그러하다. 먼저 우리는 현재 예술 활동에 대한 ‘노동’ 차원에서의 접근을 명확하게 만들어 놓지 못한 상태이다. 이는 소설에서 보여주는 23세기에도 마찬가지여서 아마추어 작곡가에게 노동으로서의 예술 활동은 여전히 인간이 수행할 수 있는 숭고한 무언가로 남아있다. 여기에 엑스가 배정되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기능적 결과를 산출할 수 있지만, 예술에 대한 함께 만들기(making-with)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실패가 도출된다.
무당에게 배정되었던 ‘데우스’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고도로 발달한 과학기술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현재까지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다양한 것들에 대한 새로운 설명의 방법들을 강하게 요청받고 있다. 소설에서의 세계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여서 병원에서 고치고 있지 못하는 병을 무당을 통해서 해결하고자 하는 이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이를 희망과 믿음이라는 관념적 단어가 차지하고 있지만, 인봇이자 지능의 신인 데우스는 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 실패가 발생한다. 이는 지능을 단순히 논리적인 계산식으로 이해하는데서 오는 인봇의 절대적인 오류라고 할 수 있다.
관계를 중요시했으며, 인간에게 도움이 되고자 했던 마키나의 실패는 조금 다른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마키나는 온전히 한 가족의 구성원이 되어 도움이 되길 원했지만 결국 이에 실패한다. 이는 마키나의 행위에서 촉발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족구성원들이 인간과 인봇을 완벽하게 구분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인봇인 마키나는 자신이 목표로 했던 지점들을 달성해야 하는 강박에 결국 가족 자체를 해체해 버리는 선택을 하고 만다. 이러한 일종의 파국적 결말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 모두 결과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오류의 방식이다. 그런데 이들이 이러한 결과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결국 존재로서의 공존 방식에 대한 이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현재 인공지능의 발달과 함께 중요시되고 있는 핵심적인 부분이기도 한다.
이미 인공지능 혹은 비인간 개체들과의 공동체 구성에 있어서 중요한 지점은 소위 응답-능력(response-ability)라고 불리는 것이다. 계산식이나 프로그래밍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일차원 적인 정보에 의해 맞다고 여기는 것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반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들로부터 출발해 우리가 정보와 논리의 시대를 지나고 있지만 결국 그 안에서 근본적으로 우리의 관계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이와 같은 관계 맺기에 대한 다양한 역량이라는 결과들이 중요시되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갈라테아의 인봇들은 설정 단계에서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그런 이유에서 소설에서 실패 보고서 이후의 이야기들은 다소 긴장감이나 설득력이 떨어지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실패 보고서 자체가 보여주는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들은 그 자체로 다양한 사고실험의 지점들을 제공한다. 현재 우리 사회는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다양한 구성원들과의 응답-능력을 중요시하고 있는가? 효율적이라는 가치들을 우선시하면서 납작하게 도구화된 능력주의를 통해 상대방의 사정이나 상황들을 지나치게 무시하고 있진 않은가? 그것이 절대 가치가 된 사회가 완성이 된다면, 우리는 초지능을 지닌 인봇들의 행위들을 소설에서와 같이 ‘실패’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인공지능 발달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무엇을 고려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이 [라스트 젤리 샷]이 SF라는 장르로서 현대 한국 사회에 제시하는 메시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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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포스텍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APCTP)의 웹진 《크로스로드》2024년 1월호(통권 220호) "SF-Review"섹션에 실렸습니다. 본문의 일부를 여기에 옮겼고, 전문은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