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영의 『종의 기원담』을 통해 보는 비안간-인간 존재들의 공생 가능성
김보영의 [종의 기원담] (아작, 2023)의 작가의 말에는 이러한 구절이 나온다. “부디 이야기를 자신에게 익숙한 세상에 맞추기 위해, 모든 것을 은유로 보며 눈에 보이는 단어를 다른 단어로 치환하려 애쓰지는 말기를 바란다. 단어는 눈에 보이는 단어 그대로의 뜻이다. 이것은 결국 로봇의 이야기다.” 작가는 SF가 이야기에 대한 사유 없이 도식적으로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allegory)로만 읽히는 것, 특히 로봇을 이야기의 중심으로 가지고 왔음에도 그저 인간에 대한 은유로만 읽히면서 사라지는 것들을 경계했던 것으로 보인다. 로봇이 이야기에 등장한 이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너무 손쉽게 소거하고 관습적으로 인간을 중심에 두고 읽어내는 것들을 말이다. 이러한 우려를 받아들여 [종의 기원담]은 “기계 생명을 향한 찬가”이며 “사물에 깃든 생명에 바치는 경애”로 읽어야 그 세계가 제대로 보인다. 그러기에 우리는 [종의 기원담]의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1029 모델의 로봇 케이 히스티온에게 우선 집중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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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담]의 세계는 로봇에 대한 이야기지만 제2편과 제3편으로 확장되면서부터 ‘인간’이란 존재가 이들의 세계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로봇들이 주인이었던 세계에 주인공인 케이의 논문으로부터 출발한 유기 생물학이 발달하게 되고, 그것이 결국 유기 생물들의 탄생을 위한 변화를 만들어 낸다. 이러한 변화의 양상이 쉬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이들은 유기 생물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마치 신화와 같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특히 10만 여년 전에 멸종한 유기 생물이 다시 자랄 수 있는 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다양한 실험들을 거치지만 번번이 실패하기만 한다. 로봇류들이 존재하기에 적합하게 구축되어 있는 세계에서 유기 생물들은 생존 조건은 상상한다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무기 생물이 생물의 기준이 되어있는 세상에서 그에 반하는 영역에 있는 유기 생물들은 상식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서 케이가 던지는 질문은 인상적이다. 케이는 “우리가 너무 로봇 기준으로 생각하는게 아닐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유기 생물들이 생존할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의 가능성에 대해 상상하고자 한다. 유기 생물들이 가지고 있는 당연한 조건인 성장이나 변화들이 “철학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으로 여겨지는 세계에서 케이의 이러한 질문은 그것만으로도 과감하고 위험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케이가 수행하고 있는 것은 리차드 그루신(Richard Grusin) 등이 이야기했던 ‘비인간 전환(nonhuman turn)’을 떠올리게 하는 ‘인간 전환(human turn)’인 것이다. 인간중심으로 구축되어 있는 세계에서 당면한 한계와 문제들을 해결하게 위한 방법으로 대두되고 인는 비인간 전환과 같이 로봇류들의 세계에서 이전에 없던 문제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인간 전환이라는 인식론적 전회(Epistemological turn)가 필요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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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공생(Symbiosis)의 가능성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를 완벽하게 생각하지 않고, 거기에서 두려움이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제2편에서 케이가 만들어 냈던 비극들은 케이가 스스로에게 가진 두려움으로부터 연유한 것이었다. 케이의 이와 같은 두려움은 로봇류의 특성과 맞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불안정으로 인해 케이는 인간들이 내리는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지 않는 존재로 만들어 준다. 대개의 로봇류들이 인간이 내리는 명령에 무비판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을 보이는 데 반해 이에 저항할 수 있고, 부정할 수 있는 자율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들이 로봇류들과의 공생을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지점이 되었다. 자신들의 명령에 무조건 적으로 복종하는 위계 상의 하위 존재자 아니라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할 수 있는 존재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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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가능성은 결국 그다음으로 향한다. “서로 다른 종 사이의 지배 체계를 부여한 고대의 어떤 정신 나간 초월자”의 예상을 훌쩍 벗어나서 위계가 해체되어 있는 세상을 만들어 낸 로봇류와 인간들은 “로봇의 영혼이 인간의 몸에 깃들어 태어날지도” 모르고, “우리가(로봇류가) 인간이 되어 다시 번성할 수도” 있는 세상을 꿈꾼다. SF적이고 과격하게 무기 생물과 유기 생물이 서로 상호 작용하여 일종의 공생 발생을 이루게 되는 세상에 대한 상상인 것이다. 마치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가 이야기 했던 ‘공생자 행성(Symbiotic Planet)’의 이상적이고 초월적인 모습이 [종의 기원담] 내에서 펼쳐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대적 담론들에 조응하는 소설 속 세계와 인식의 전회들은 현대의 우리에게 직면해 있는 많은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들을 사고 실험하게 한다. 결국 [종의 기원담]은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과 기존의 위계에서 벗어나 모든 종(種)들이 동등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마지막까지 살고자 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 시대에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거대한 인식론적 전회의 양상을 소설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글은 포스텍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APCTP)의 웹진 《크로스로드》2024년 7월호(통권 226호) "SF-Review"섹션에 실렸습니다. 본문 일부를 여기에 옮겼고, 전문은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